왼쪽부터 배우 고(故) 김운하와 고(故) 판영진. (극단 신세계 제공, 판영진 미니홈피 캡처)
화려하게 피지 못한 꽃의 결말은 비극이었다. 두 명의 무명 배우들이 또 한번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연극배우 고(故) 김운하(본명 김창규) 씨와 영화배우 고(故) 판영진 씨.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각기 고독사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숨을 거두고 나서야, 이들은 무명의 설움을 벗을 수 있었다. 4년 전 사망한 시나리오 작가 고(故) 최고은 씨가 그러했듯이.
김 씨는 대학 졸업 후, 부친의 이름 '김운하'로 연극무대에서 활동했다. 불안정한 수입건강을 악화시켰고, 끝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전해졌다.
그의 시체는 지난 22일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한 평 남짓한 고시원 방에서 발견됐다. 사망한 지 5일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처음에는 무연고자로 처리됐지만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뒤늦게 모여 빈소를 차렸다. 상주는 대학 동문이, 영정 사진은 공연 사진으로 대신했다.
판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 2008년 주연을 맡았던 독립영화 '나비두더지'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가 됐다.
당시 인터뷰 기사를 보면 그는 스무 살 때부터 영화배우의 꿈을 꿨다. 꿈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운좋게 '나비두더지'로 데뷔해 47세에 신인배우 타이틀을 달았다. 이 영화로 부천판타스틱영화제(PIFF)에도 초청받았다. 그리고 7년이 흐른 어느 날, 그는 삶 대신 죽음을 택했다.
숨지기 전, 판 씨는 지인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지인은 그를 찾아나섰지만 22일 밤,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주택 앞의 차 안에서 싸늘한 고인의 시체를 발견했다.
판 씨는 그간 자동차 딜러를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고, 우울증까지 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 같은 진술을 토대로 정확한 사망 원인을 조사 중이다.
공통점은 이들 모두 '생활고'가 사망의 결정적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한번 예술인 복지 논쟁에 불이 붙었다. 특히 '최고은 법'이라고 불리는 예술인복지법의 실질적 효력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됐다.
정의당 정진후 국회의원은 24일 논평을 통해 "정부는 아직도 예술인들의 절박한 처지를 외면하고 있다"면서 "문체부는 올해 창작준비금 지원사업을 통해 예술인 3,500명에게 1인당 300만원씩 모두 105억 원을 지원하기로 했지만 기재부 등 정부 내 이견으로 지금까지 1원 한 장 집행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날 서울연극협회 임선빈 사무국장은 CBS '박재홍의 뉴스쇼'에 출연해 예술인복지법의 실태를 알렸다.
그는 해당 제도가 모든 예술인이 보편적으로 이용가능한 것이 아니라 선별적 복지라고 설명했다. 기준에 합당한 예술인만이 특별한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술 활동 증빙을 해, 예술인으로 인정 받는다 해도 사각지대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임 사무국장은 "법 안에서도 법적근거를 정확히 갖고 예술인 실태조사를 하라고 제시돼 있다. 그런데 저희는 그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보고 있다"면서 "주거 형태, 가족관계, 월수익 등을 정확히 파악한 데이터를 가지고 다시 분석적으로 접근해 현장 상황에 맞게 복지법이 개편, 개선되거나 이런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예술인들의 노동조합, 예술인소셜유니온도 여기에 가세했다.
예술인소셜유니온과 문화연대는 같은 날 논평을 발표해 "두 예술인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예술인 복지를 둘러싼 해묵은,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들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예술인복지법의 실효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예술인복지법이 예술인의 노동의제, 예술인복지재단의 독립성 보장 문제, 안정적인 사업 수행을 위한 별도의 예술인복지 예산 확보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은 채 예술인복지재단 설립과 관련한 내용만으로 부실하게 제정 되면서 예술현장에서는 법의 실효성에 대한 우려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고 비판했다.
다수의 예술인들과 예술정책 전문가들은 이 때문에 예술인의 보편적 복지제도로의 편입과 개별 예술 활동의 특수성에 기반한 맞춤형 지원정책의 마련 등을 촉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