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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성신 "사법부, 디지털성범죄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



사건/사고

    온성신 "사법부, 디지털성범죄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

    ['n번방' 방청연대①]가해자의 재판을 '감시'하는 이유
    지난 4월 '와치맨' 공판 첫 방청…"가해자 너무 평범해 충격"
    "n번방은 소라넷, 웹하드 카르텔 때부터 이미 예고된 참사"
    "디지털성범죄, 오프라인 범죄와 비교불가…法 인식부터 잘못"
    "재판 가면 혼자일 때 없어…함께 연대하는 여성들, 큰 힘"

    ※ 지난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한국사회에는 '페미니즘 리부트' 물결이 일었다. 당시 SNS에서 널리 퍼진 문구 중엔 'Girls Do Not Need A Prince(여성들은 왕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가 있었다. 올 초 'n번방'을 통해 드러난 텔레그램 기반 '디지털 성착취 범죄'에 분노한 여성들은 더 이상 사법부의 판단을 '방관'하지 않는다. 가해자들의 재판을 직접 '감시'하며 사법부의 '새로고침'을 요구하는 방청연대의 목소리를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온성신 "사법부, 디지털성범죄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
    (계속)
    성신여자대학교 자치언론 '온성신' 로고.(사진=온성신 제공)

     

    성신여대에서 영상을 전공 중인 '우미'(가명·25)는 졸업을 한 학기 남겨뒀다. '취준'(취업준비)에 한창일 때지만 우미에겐 지난 4월부터 몰두하고 있는 과업이 하나 더 있다. 약 1년 전, 학내 자치언론인 '온성신'을 창립한 우미는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관련 재판을 30회 가량 방청하는 한편, 이를 꼬박꼬박 수기(手記)로 기록해 블로그·SNS에 기사로 남기고 있다.

    오정희 작가의 소설 '새'의 주인공 이름을 딴 '우미'는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이'라는 뜻이다. "실제 우미의 삶은 배제당하고 삭제당하는 삶에 가까운데, 그 모순이 슬프고 좋아서" 필명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나이임에도, 견디기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준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막연한 응원'처럼 느껴진다고도 했다. 'n번방'이 한때만 시끄러웠던 범죄로 기억되지 않도록 연대하고 있는 그에게 꽤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난 14일, '박사' 조주빈(25)의 공범인 '부따' 강훈(19)의 2차 공판기일이 열린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 근처에서 우미를 만났다. 이날 강훈 측은 "범죄집단을 조직한 사실도, 활동한 사실도 없다"며 음란물 유포 외 다른 혐의는 모두 조주빈의 단독범행이라고 주장했다.

    ◇"n번방은 소라넷, '웹하드 카르텔' 때부터 예고된 참사"
    (그래픽=고경민 기자)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처음 접하고 어떤 감정을 느꼈나.
    ='소라넷'(현재 폐쇄된 국내 최대규모 불법 음란물 유통사이트) 정도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을 해야 할 것 같다. 지난 2016년 '소라넷'이 없어졌지만 연이어 '웹하드 카르텔'이 터지지 않았나. 어떻게 하다 보니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해 (분노하는) 여론이 많이 모였지만 사실 화가 많이 났다.

    대부분 '세상에나 이런 범죄가 있었단 말이야?' 식으로, 태어나서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처음 발견한 것마냥 반응하지 않았나. 그런데 사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던 '민낯'이다. 여성이 굉장히 대상화된 방식으로, 피해자의 연령도 점차 낮아지고 일반 남성들 어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범죄로 번져갈 수 있음을 정말 몰랐나, 싶어 유난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거에 이미 비슷한 징후를 느낀 경험이 있었다는 건가.
    =20대 평범한 여성인 저도 고등학교 때 텀블러(Tumblr)에 '걸레X'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여성들이 나체로 합성, 박제돼 신상이 공개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적어도 6년 전 일이다. 저 역시 해당 커뮤니티에 저나 주변사람이 있는지 확인해보자는 생각으로 들어가본 적이 있다. 이런 식의 범죄는 20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왜 몰랐던 일처럼 행동하나 싶은 거다.

    다만, 그때는 여성들을 도구화한 '데이터 아카이빙'이 이 정도로 만연한 범죄인 줄은 몰랐다. 성범죄 위험이 있을 때 '안돼요, 싫어요'라 거부하란 이야기를 들으며 크지 않았나. '성범죄는 피해자가 조심하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이고, 성범죄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들은 따로 있다', '몸조심하지 않는 여자들이 피해자가 된다'는 프레임에 대해 나 역시 학창시절에는 큰 문제의식이 없었다.

    ◇"'와치맨' 너무 평범해 충격…누구나 피해자 될 수 있다고 느껴"

    '온성신'에서 활동 중인 '우미'가 텔레그램 'n번방' 운영자인 '갓갓' 문형욱의 공판을 방청하면서 직접 작성한 공판기록 일부.(사진=온성신 제공)

     

    자치언론인 '온성신'은 교수들이 가해자로 지목된 '학내 성폭력'을 계기로 출범했다. 우미는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등 큰 사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가 이런 일이 터지면 몇 달 동안 그런 이야기만 하고 있더라"라며 "'한번 같이 해볼래' 하는 질문을 수십 명에게 던졌고 3명 정도가 모였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2018년 성신여대에서는 사학과 교수였던 임모씨가 학생들을 성폭행,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임씨는 같은 해 파면됐고, 지난 2월 준유사강간·강제추행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해 12월에는 학생들에게 부적절한 신체접촉과 성적 언행을 일삼은 현대실용음악학과 교수 A씨가 해임되기도 했다.

    지난해 9월 창간호에서 학내 성폭력을 집중적으로 다뤘던 온성신은 지난 5월부터 '로리대장태범' 배모(19)군의 재판을 시작으로 보도영역을 n번방으로 넓혔다. 일명 '제2 n번방'의 운영자로 여중생 등을 협박해 성착취물을 제작, 배포한 배군은 지난달 초 소년법상 법정최고형인 징역 장기 10년·단기 5년을 선고받았다.

    -처음으로 방청한 n번방 재판은 어떤 재판이었나.
    =지난 4월 6일 '와치맨' 전모(38)씨의 재판이었다. 제가 수도권에 살고 있는데, 수원지법에서 재판이 있다고 하더라. 무척 고민하다 재판을 보러 갔는데 돕고 싶어하면서도 사건을 깊이 알기는 두려운, 사실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날 이 문제가 진짜 심각함을 절실히 느꼈고 '재판 보도를 해볼까' 생각했다. 가해자가 생각보다도 너무 평범했던 거다. 이렇게 평범한 남자가 평범한 여자를 쉽게 '물건'으로 만들 수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고, 너무 답답한 마음에 집에 가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n번방 재판 연속보도를 결정하게 된 이유는.
    =처음 n번방이 터졌을 때는 무력감에 젖어있다가 조주빈의 박사방을 보도한 출발점이 '추적단 불꽃(대학생 취재단)'이란 점을 알게 됐다. '그럼 나도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어렵게 이슈를 끌어올린 사람들이 있다면 나도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유튜브 영상을 먼저 기획하고 재판(방청)팀을 나중에 생각했는데 팀원 중 영상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재판기록을 먼저 하게 됐다.

    -n번방 관련 재판도 종류가 다양한데 방청 기준이 궁금하다.
    =대부분 '적어도 얘네는 주목해야 돼'라고 생각하는 '헤비 업로더'가 피고인인 경우 위주로 다닌다. 사실 (기사를) 올린 것보다 공판을 많이 보러 다니지만 법리다툼이 너무 복잡하거나 (보도 시) 줄기가 굉장히 흐려진다는 생각이 들면 보도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 변호인이 바뀌면서 달라지는 변론 전략이라든지, 재판장과 피고인 측의 분위기라든지, 이전 공판과의 차이점 등을 보는 것도 의미 있더라. 처음에는 방청하는 것에 '감시를 한다'는 의미를 아주 크게 두지는 않았다. 재판을 자세히 알고 싶어하거나 변호인을 선임하지 못한 피해자 중 재판이 궁금한 사람들을 위해 적어야겠다, 생각한 거다.

    재판을 많이 다닐수록 확실히 '보는 눈'이 있고 없고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다만, 개중에는 '증거조사 절차가 이렇게 될 경우 2차가해가 너무 우려된다'는 등의 말을 하는 판사들도 있는데, 그럼 그들이 이전엔 다른 판사들과 굉장히 다른 판결을 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법정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바뀌었다기보다는 n번방 재판에 앉아있는 판사들이 그 시선을 의식해 태도를 (잠시) 바꾸는 것뿐 아닐까. 별로 신뢰가 없다.

    ◇"디지털성범죄, 오프라인 범죄와 비교불가…정의부터 다시 해야"

    (일러스트=고경민 기자)

     

    -그럼 n번방 같은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하려면 어떤 방안이 필요할까.
    =결국은 사법부 차원에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정의를 다시 내리는 것부터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피고인들이 재판에 나와서 하는 변론을 보면 내용이 상당히 유사하다. 조주빈 같은 경우, 직접 강제추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범 가능성이 낮다는 논리를 펼친다. 계속 '오프라인 성범죄'에 비해 '디지털 성범죄'가 얼마나 직접적 피해를 안 미치는지를 줄다리기하고 무게를 잰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일단 피해자 입장에서는 사진이든 영상이든, 일부만 나왔든 얼굴과 전신이 다 나왔든, 벗고 있든 아니든, 자신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가 (온라인에) 올라갔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그때부터 발생하는 피해는 영구한 건데 자꾸 '실제 강간에 비해선 아닌 것 같다'며 온라인 범죄의 심각성을 모르는 상태로 재판이 전개되고, 그런 요지의 변론들이 실제로 먹히다 보니 출발부터 굉장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란 이유로 디지털 성범죄를 축소하다 보니, 판사들이 너무 공부를 안하는 게 아닌가 싶다. 어떤 재판부는 복사본·원본 여부를 따지는 이야기도 한다더라. 디지털 성범죄는 원본이든 복사본이든 피해규모에서 차이가 전혀 없다. 그밖에 초범이든 재범이든, 나이가 적든 많든, 그 어떤 이유도 디지털 성범죄의 크기를 잴 양형 사유는 되지 못한다고 본다.

    -방청연대는 가장 느슨한 형태의 이상적 연대이기도 하지만, 영구 지속은 어렵다는 한계도 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최대한 잘 마무리하고 싶다. 어느 순간 갑자기 '뿅' 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 과정에서 어떤 걸 알게 됐는지 유의미한 기록을 남기고 마무리할 생각이다. 너무나 평범한 사람인 제가 이렇게 재판을 다니는 것 자체가 최악이다. 어쩌면 방청연대 활동가들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피해자이기도 한 것 같다. 그래도 재판을 가면 제가 혼자인 날은 없다. 기자가 아닌 일반인 여성이 꼭 있는데 그럴 때 '혼자가 아니구나' 싶어 힘이 진짜 많이 된다.

    얼마 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한 김지은씨의 '김지은입니다'를 읽었다는 우미는 "안 전 지사의 경우도 '미투'를 지지한다고 한 날 범죄를 저지른 건데, 젠더의식이 실제로는 전무한 정치인들이 활동을 계속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n번방 관련 이야기를 누구 들으라고 해야 하나, 속터져하는 여자들만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하는 허탈감도 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온성신'이 인터뷰한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 현경의 말처럼 "연대하는 것 외에 다른 해답을 찾지 못한" 우미는 이 활동을 당분간 이어갈 생각이다.

    그는 "재판 방청을 시작할 때는 가해자에 집중했는데 요즘은 피해자에 대한 생각을 훨씬 많이 하게 된다"며 "(법정에서도) 잠재적 피해자의 마음으로 앉아있는데, 피해자들의 '안녕'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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