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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1987년 뜨거웠던 '명동성당'의 기억 최초 공개



사건/사고

    [단독] 1987년 뜨거웠던 '명동성당'의 기억 최초 공개

    최루탄 연기 속 명동성당, "학생에서 전 국민의 저항으로"

    1987년 명동성당 농성이 시작된 6월 10일 당시 일지 내용.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사용하는 용지에 시내 시위대의 성당 진입 시점을 기록했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87년 6‧10 민주항쟁을 '전국구 투쟁'으로 확대한 '명동성당 농성투쟁 상황일지'가 32년 만에 공개됐다. 6‧10 민주항쟁 발발 초반 명동성당에서의 실시간 투쟁 상황, 부상자와 지원품 현황 등을 기록한 자료가 세상의 빛을 본 것이다. 일지는 농성단이 명동성당에 머문 5박 6일 동안의 저항의 역사를 생중계하듯 그대로 보여준다.

    ◇ "'박종철은 부활한다'는 구호 속에 내무부 차관 들킨 뒤 쫓겨나"

    이번에 32년 만에 세상에 나온 일지는 당시 보좌신부의 방에서 예비 신부 등이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 것으로, '최후의 보루'에서 계속된 저항의 역사를 보여준다.

    당시는 전두환 군사정권에 반해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 나섰던 대학생 등이 경찰에 의해 을지로‧퇴계로 일대에서 밀리고 밀리다 결국 명동성당에까지 들어온 상황이었다.

    일지에 따르면, 6월 10일 오후 5시쯤 성당 안으로 처음 진입한 시내 시위대가 오후 9시 30분쯤 횃불을 들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경찰과 투석전을 치렀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광주로, 결국 전국으로 퍼져나간 6‧10 민주항쟁의 서막이었다.

    이튿날 농성대는 경찰이 해산 협상 도중 성당을 향해 다량의 최루탄을 발사하자 오후 4시 40분쯤 무기한 농성을 결정한 것으로 일지는 전했다.

    당시에 명동성당 구내 공중전화 3대가 불통 상태에 이르는 등 긴박한 모습도 기록됐다.

    특히 12일 서울 중구 일대를 중심으로 벌어진 대규모 시위에선 시민과 총학생회, 외신 기자들이 '을지로‧퇴계로 학생 3000여 명, 시민 2000여 명 운집' '미도파 앞 50~60명 연행' '시민들 항의 거셈' 등 정보를 전해주는 등 바깥 상황과 활발하게 소통한 성당 분위기도 담겼다.

    또 이날 방송에 '학생들이 명동성당을 해방구로 설정해 점거, 난동을 부리고 체제 전복을 위한 모임을 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문화공보부 장관이 이를 "좌경 운동권 학생의 집회"로 규정하자 일지에는 "'학생' 만을 강조해 시민 참여 상황에 대한 언급이 없었음"이란 평가도 적혔다.

    주일인 14일 미사 후 성당 마당에서 열린 3000여 명의 집회에서 '살인정권 지원하는 군부독재 타도하라', '행동하는 국민 속에 박종철은 부활한다' 등 구호가 나오자 오후 6시 15분쯤 상황을 파악하려 왔다가 발각된 내무부 차관이 '비폭력' 방식으로 쫓겨났다는 언급도 담겼다.

    ◇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항생제 전달, 일반인들 담뱃값 던져주기도

    일지에는 농성 중 다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녹아 있다.

    12일 오전 3시 30분에는 최루탄으로 인해 피부에 생긴 수포로 농성대원이 고통을 겪는 가운데 병원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자 '속수무책'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성당 구내까지 쳐들어온 '최루탄'의 흔적도 기록 곳곳에서 발견된다.

    11일 오후 7시 10분쯤 '구내에 최루탄 7발 발사됨'에 이어 7분 뒤 '경찰 최루탄 약 130여 발 난사'를 비롯해 같은 날 8시 3분 '약 140여 발의 최루탄이 날아왔다'는 기록이 계속됐다.

    학생사회에서 성당 내 상황을 문의해오고 바깥 상황을 일러준 기록도 시간대별로 꼼꼼하게 적혀 있다.

    12일 오전 7시 15분쯤 동국대 써클 연합 측은 성당에 '명동 사태 엄단 방침, 강제진압 불사' 등 언론 보도 내용을 전해주는가 하면 연행된 학생들의 현황을 알려줬다. 또, 지원 물품을 옮기는 방법으로 '신부님이 동국대로 직접 와주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같은 날 오전 11시쯤 한양대 총학생회는 명동성당 측에 "일반인을 통해 항생제 등 의약품을 전달 시도하고자 한다"며 "지원 시위를 하려 하는데, 요구사항은 없는가" 묻기도 했다.

    연기와 돌덩이가 난무하는 농성 중 일상의 모습도 엿보인다.

    12일 8시 55분쯤 성당 안내실에선 '전경이 담배 8갑을 던져주고 시민이 5갑을 던져줬다'는 기록이, 이튿날 오전 10시 30분쯤엔 '결혼미사를 위해 바리케이트의 절반가량을 철거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측은 5일 동안 치러진 명동성당 농성의 일지가 "6‧10 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확대돼 직선제를 성취해낼 수 있었던 동력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명동성당에 시민들의 후원 문의가 빗발쳤던 6월 12일 당시 기록.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서울 중심부의 성당에 500~600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몰려들고 여기에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는 모습이 보도되면서 주변의 회사원들, 남대문시장의 상인들 등 시민의 지지와 지원이 이어졌다"며 "'학생들의 시위'가 '시민항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당시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장으로서 농성을 이끌어가며 일지 작성을 제안했던 기춘(60)씨는 "이처럼 큰일에 기록이 필요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10일 대회가 그렇게 장기전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며 "이미 대중의 분노가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씨는 "몰래 담을 넘어오던 위생용품들, 남대문시장 상인들이 가져다줬던 옷가지 등 모두 잊을 수가 없다"며 "성당 안의 사람들만 농성하는 게 아니라 전 국민이 격려하고 같이 아파하는 투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해당 일지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오픈아카이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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