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최저임금 1만원…이제는 뜯어 고칩시다[노동:판]
'오래된 미래' 최저임금 1만 원 시대가 당장 눈앞에 다가왔다. 노동계에서 10여 년 전 시작했던 최저임금 1만 원의 약속이 현실로 다가온 지금, 최저임금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요구되고 있다.
2025년도 최저임금을 심의해온 최저임금위원회(최임위)는 지난 12일 새벽 제 11차 전원회의에서 내년에 적용할 최저임금을 올해보다 1.7%(170원) 오른 시급 1만 30원으로 정했다. 이의제기 절차 등을 거치고 나면 정부가 다음 달 5일 확정 고시할 예정이다.
13년 만에 지켜진 약속 '최저임금 1만 원', 마냥 반길 수는 없는 이유
노동계에서 '최저임금 1만 원'을 구호로 외치기 시작했던 때는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대통령' 기치를 걸고 나섰던 청소노동자 출신 진보신당 김순자 후보가 '최저임금 1만 원'을 공약으로 처음 선보였다. 당시 최저임금은 고작 4580원.
이듬해부터 노동계·시민사회에서도 '최저임금 1만 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알바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모여 '최저임금 1만원위원회'를 출범시키며 최저임금 인상을 촉구했고, 2015년쯤부터는 양대노총의 주요 대(對)정부 요구안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최저임금 1만 원을 고민하기 시작했던 때는 2017년 19대 대통령 선거부터다. 당시 보수 성향인 자유한국당 홍준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까지 포함한 주요 후보 모두 최저임금 1만 원을 임기 내 달성하겠다고 공약에 담았다. 다만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당시 후보와 바른정당 유승민,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2020년까지 3년 안에 달성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한 이후 처음으로 결정한 2018년 최저임금은 16.4%, 2019년 10.9% 인상돼 2년 연속 두 자릿 수 인상률을 기록했다. 2017년 최저임금 6470원에서 3년 안에 최저임금 1만 원을 달성하려면 연평균 16% 이상씩 증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2018년 국회가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각종 수당을 포함시키도록 법을 개정해 노동자들이 손에 쥘 수 있는 실질적인 최저임금은 오히려 대거 삭감됐다. 하지만 명목상 최저임금이 급격히 오르자 경영계와 보수진영은 거세게 반발했다. 정부가 일자리 안정자금 등 고용주의 임금 지불을 돕는 대책을 내놓았지만, 고용 시장이 위축되자 최저임금 인상은 만악의 근원으로 비난받았다.
결국 2020년 2.9% 인상에 그치며 정부가 최저임금 1만 원 공약 폐기를 선언했고, 2021년에는 1.5%로 역대 최저 인상률까지 기록했다. 문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22년 인상률은 5.05%, 결국 문재인 정부의 연평균 인상률은 박근혜 정부와 큰 차이가 없는 수준에 머물렀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 처음 정했던 지난해 최저임금은 5% 인상됐지만, 올해 적용된 최저임금은 2.5% 인상에 그쳤다.
특히 2022년 -0.2%, 지난해 -1.1%로 물가를 반영한 실질임금이 2년 연속 감소하면서 최저임금은 문재인 정부 초기에 반짝 급등했을 뿐, 이후로는 과거보다도 더 증가세가 정체됐던 셈이다.
당장 내년 최저임금도 1만 원을 넘었다지만, 이번에 적용된 1.7% 인상률은 2021년 최저 기록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기록이다. 노동계는 최저임금 1만 원을 넘었다는 명분을 챙긴 대신 경영계는 낮은 인상률이라는 실리를 챙긴 꼴이다.
무엇보다도 지난해 우리나라 물가가 3.6% 오른 데 이어, 정부는 올해는 2.6%, 내년에는 2.1% 오를 것으로 예상한 점을 고려하면 실질임금이 또 후퇴할 가능성이 높다.
최임위는 '정부 입맛' 공익위원 놀음? 제도개편 논의 속도낼 듯
최임위는 노동계와 경영계, 공익위원이 모인 사회적 대화기구다. 즉 공식적으로는 정부의 의사결정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3자가 모여 최저임금을 논의, 결정하는 기구다. 이 점을 고려하면, 애초 정부가 최저임금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치를 제시하고 국민을 상대로 약속까지 하는 일 자체가 어찌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럼에도 최임위가 정권과 정책방향이 바뀔 때마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최임위 구성 자체에 원인이 있다.
최임위는 근로자위원과 사용자위원, 공익위원이 각 9명씩 동수(同數)로 구성되는데, 노사 위원들이 양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공익위원이 캐스팅 보트를 쥔다. 해마다 근로자위원은 최초요구안으로 과감한 인상안을 던지고, 사용자위원은 삭감 내지 동결안을 제시한 이후 10원 단위로 '찔끔 인상'하며 상대를 자극하면 결국 공익위원의 '중재안'을 중심으로 결정되는 일이 반복된다.
이 공익위원들을 정부가 위촉한다. 비록 공익위원들이 양심에 따라 정부 목소리에 개의치 않고 활동한다지만, 애초 위원들의 성향부터 '정부 입맛'에 치우쳤다는 비판도 늘 나오는 얘기다.
당장 현 최임위 공익위원이 위촉된 직후 이인재 위원장이나 공익위원 간사인 숙명여대 권순원 교수 등이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에 깊숙히 개입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올해도 공익위원이 심의촉진구간을 제시하자 민주노총 측 근로자위원들이 "너무 낮다"며 집단 퇴장하는 파행을 겪었다. 업종별 차등적용 여부를 표결하려 하자 일부 근로자위원들이 물리력 행사까지 벌였다. 이에 항의한 경영계 위원들이 회의를 한차례 보이콧했고, 결국 최임위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내년도 최저임금의 금액수준을 고작 두 차례만 만나 결정했다.
이에 대해 이인재 최임위원장은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 직후 "현 최저임금 결정 시스템은 합리적·생산적 논의가 진전되는 데 한계가 있다"며 "(최임위) 개편에 대한 심층 논의와 후속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논의를 촉구했다.
최임위 제도를 개선하자는 얘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근래 들어 2004년과 2015년, 2018년에도 최임위 내부에서 제도개선 논의를 벌였지만, 별다른 결론을 내지 못했다.
2019년에는 정부가 직접 나서 '결정구조 이원화'를 핵심으로 한 개편안을 추진했지만, 노동계 반발 속에 국회에서도 논의에 속도를 내지 못해 결국 폐기됐다.
당시 정부는 최저임금 심의구간을 설정하는 '구간설정위원회'와 이 구간 안에서 최종 최저임금을 정하는 '결정위원회'로 이원화하되, 공익위원 추천권을 국회나 노사와 공유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노동계는 인상구간을 설정하는 단계에서 정부가 정한 전문가들이 최저임금을 보수적으로 정하도록 제한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우려했다.
대다수 선진국들은 우리나라처럼 사회적 대화를 통해 최저임금을 심의, 결정하거나, 이를 정부가 최종 결정하는 형태를 취한다. 독일, 러시아, 스페인, 아일랜드, 영국, 일본, 터키 등이 이러한 방식을 따른다. 이 경우 최저임금 심의 자체는 갈등이 불거지지만, 사회적 대화를 통해 정부 및 이익단체들이 소통하면서 정책을 형성·집행한 덕분에 더 큰 갈등을 예방할 수 있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우리나라처럼 사회적 대화를 통해 최저임금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최저임금위원회에 따르면 그리스나 네덜란드, 프랑스, 뉴질랜드 등은 정부·주정부에서 최저임금을 결정한다. 미국도 주마다 다르지만 국가 최저임금은 연방의회에서, 지역별 최저임금은 주 의회나 지방정부가 정한다. 이 경우 정권이 최저임금 결정 후 후폭풍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진다는 장점이 있다.
2019년 개편안과 유사하게, 정부가 초안을 마련하면 의회나 노사정이 모여 심의하는 나라들도 있다. 루마니아, 브라질, 캐나다 온타리오주(州)가 대표적이다. 또 호주는 전문가기구에서 정한다. 이 경우 최저임금에 대한 노사 간의 대립이 완화되는 효과를 노릴 수 있다..
다만 적어도 현행 최임위 구조에는 한계가 있다는 데 노·사·공익 모두 공감한만큼, 제도 개편 논의도 힘이 실릴 전망이다. 특히 단순히 최임위 과정의 노사 갈등을 완화하는 수준을 넘어, 안정적인 최저임금 인상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절실하다.
더 나아가 단순히 최저임금의 범위와 금액만 정하는 현재의 '사회적 대화' 수준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예컨데 영세 소상공인·자영업자·중소기업 임금 지불을 정부가 지원하고, 임금 인상에도 미취업 노동자의 고용을 확대하고, 최저임금 밖 노동자들의 수입을 최저임금과 연동해 보장하는 입체적인 임금 정책 패키지를 함께 논의해볼 수도 있다.
다시 불 붙은 '업종별 차등적용' vs 최저임금 개념 바꿀 '특고·플랫폼 종사자' 적용 논의
최저임금 1만 원 돌파가 확실시된 현재, 과연 최저임금의 구체적인 금액 수준이 지금과 같이 임금 논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을 지도 의문이다.
당장 이번 최임위는 총 11차례의 회의 중 7차 회의까지 최저임금의 적용범위를 놓고 노사가 팽팽히 맞섰다. 8차 회의는 경영계 보이콧으로 공전됐고, 11차 회의는 10차 회의가 자정을 넘겨 차수 변경했던 점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는 최임위원들이 9번 만난 자리 중 7번은 최저임금 적용범위를 고민했다는 얘기다.
특히 그동안 해마다 경영계가 업종 등 차등적용을 거론했다 폐기되는 일이 반복됐는데, 올해는 노동계가 '도급제 최저임금'을 들고 나오며 반격에 성공한 모양새다. 다만 결과적으로는 노사 양측 다 소기의 성과를 거둔 듯 하다.
우선 경영계는 최임위 논의 테이블에 업종별 차등적용 대상 후보로 한식·외국식·기타 간이 음식점업과 택시 운송업, 체인화 편의점을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경영계가 주장했던 차등적용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로 여겨졌다. 예컨데 연령별 차등적용은 해당 연령의 극심한 반발이 예상되는 정치적 부담이, 지역별 차등적용은 지역별로 나뉜 역사가 싶은 미국, 일본 등과 달리 단일한 생활권인 우리나라의 특성상 지역 슬럼화만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업종별 차등적용 역시 저(低)임금 업종이라는 낙인효과로 업황 악화만 심해질 것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이미 최임위도 2017년 12월 최저임금 제도개선TF까지 꾸린 결과, 업종별 차등적용에 대해 ①최저임금의 취지상 타당성을 찾기 어렵고 ②1988년 최저임금제 시행 첫해를 제외하면 단일 최저임금을 유지했고 ③업종 간 차등 적용이 '저임금 업종'이라는 낙인 효과를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④최저임금 수준을 구분하려 해도 이를 뒷받침할 합리적인 기준·통계가 없다며 사실상 도입 불가 판정을 내렸다.
지역별 차등적용에 대해서도 ①우리나라는 1일 생활권이고, ②지역 낙인효과가 우려되며 ③지역별 노동력 수급의 왜곡과 ④국민통합 및 지역균형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며 바람직하지 않다고 정리했다.
하지만 올해 심의과정을 통해 그동안 '노동계 자극용, 공익위원 압박용 카드'로 평가절하됐던 업종별 차등적용이 다시 진지하게 논의되면서, 꺼져가던 논란의 불씨가 다시 살아났다.
반면 노동계는 최임위가 도급제 최저임금을 정할 권한이 있다는 정부의 확답을 받아냈다. 이어 도급제 최저임금의 적용 대상인 근로자 및 관련된 구체적 유형, 특성, 규모 등의 실태·자료를 노동계가 준비하면 최임위에서 추후 논의하기로 정리됐다.
또 애초 노동계가 '도급제 최저임금' 논의로 노렸던, 이와 비슷하게 일하는 특수고용노동자나 플랫폼 종사자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하려던 목적도 어느 정도 진전됐다. 최임위는 특고·플랫폼 종사자 전반에 최저임금을 적용하는 과제는 국회나 사회적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정할 일이라고 가르마를 탔다.
이에 따라 당장 올해 하반기부터 국회나 경사노위에서부터 기존 최저임금 논의를 넘어 특고·플랫폼 종사자 등 모든 일하는 사람의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임금 보장 체계에 대한 논의가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2024.07.13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