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명진 기자
강행군이었다. 24일 오후 서울 삼청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정우성(40)은 이날에만 20여 언론 매체를 시작으로 일주일 동안 50여 곳과 인터뷰가 잡혀 있었다.
영화 '호우시절'(2009년) 이후 4년 만에 한국 영화로 복귀하는 데다, 배우 생활 20년 만에 첫 악역에 도전한 만큼 대중의 관심이 그에게로 쏠리는 까닭이리라.
정우성은 이날 오전에만 이미 6개 매체와 인터뷰를 마쳤다. 지칠 법도 하건만 "나는 원래 재밌는 사람"이라는 말을 대여섯 차례 반복하며 인터뷰 내내 특유의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친구들이 제 옆을 떠나지 않는 것도 재밌기 때문이죠. 대중들은 잘 모르겠지만 영화 촬영 현장에서는 분위기 메이커로 정평이 나 있어요. (웃음) 일주일 내내 인터뷰가 예정돼 있다고 '오늘은 힘 좀 아껴야지'라는 생각은 성격상 못해요. 마음이 불편하거든요."
그는 다음달 3일 개봉하는 영화 '감시자들'에서 목적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냉혹한 범죄 설계자 제임스 역을 맡아 극에 독특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래도 정우성이 악역으로 출연한다는데 뭔가 더 멋지게, 분량도 늘려야 하지 않겠어?'라는 말이 제작기간 나왔을 터다. 정우성은 "원래 의도대로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여겼기에 사양했다"고 했다.
"극중 제임스의 성장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는 것은 대사 등으로 추론할 수 있어요. 주변에서 '제임스의 배경 이야기를 집어넣어 역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했죠. 그랬다면 오히려 기존 영화에서 쉽게 보던 전형적인 악인이 됐겠죠. 관객들에게 색다른 느낌을 줄 수 없게 되는 거죠. 제가 희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원래 이야기를 부풀리거나 하지 않았을 뿐이죠."
-감시자들은 어떤 영화인가.
"쿨하다. 관객의 감정을 억지로 끄집어내거나 짜내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극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쓸데없는 설정을 집어넣지도 않았다. 너무 큰 기대는 갖지 말고 재밌게 보시길. 기대는 모든 영화의 적이다."
-첫 악역에 도전했는데.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제임스의 존재감에 끌렸다. 제임스를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따라 정말 다른 영화가 되겠구나 싶었다. 제작사에서 시나리오 모니터링을 부탁해서 읽었는데 '누가 이 역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더라. 남이 하는 것 보면서 속상해 하거나 배 아파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출연을 결심했다."
사진=이명진 기자
-제임스라는 인물은.
"절제가 몸에 밴 사람. 범죄를 치밀하게 설계해야 하니 쓸데 없는 생각은 모두 걷어내는 것이다. 악인이 멋지게 보이면 안된다는 생각이 컸다. 긴장감을 만드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제임스의 표정도 옷 입는 것도 절제된 면을 강조한 이유다."
-극중 대사보다는 눈빛이나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데 주력한 듯하다.
"엄청난 칭찬으로 들린다. 말을 안하고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은 배우로서 큰 복이다. 미국 배우 스티브 맥퀸(1930-1980)은 극중 본인의 대사를 일부러 없앴다고 하더라. 내 안에도 이런 저런 감성이 있지만 말로 풀어내려 애쓰지 않는 것은 사회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뒤 홀로 개척해 가면서 외로움이 몸에 밴 탓일 것이다. 데뷔 초반에는 가만히 있으면 '너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실제로는 장난기가 많다. 어릴 때도 터프한 청년은 아니었다. 원래 좀 수다스럽다. (웃음)"
-한 테이크로 길게 찍은 수십 명과의 격투신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11번을 찍었는데 고생스럽지는 않았다. 촬영 전 서너 번 연습을 하고 맞춰 본 덕이다. 문제는 촬영이 끝나고 생겼다. 촬영 때는 긴장해서 몰랐는데 이틀 뒤 운동을 하는데 어깨가 아프더라. 16명과 계속 밀고 당기고 넘기고 하면서 몸에 무리가 간 것이다. 일주일 동안 고생했다."
-유내해 감독의 '천공의 눈'(2007년)을 원작으로 했는데 봤는지.
"출연을 결정한 뒤 봤다. 감시자들이 훨씬 모던하고 정서적으로도 친근하다고 생각한다. 극중 하윤주(한효주)가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도 커졌고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제임스에 대한 부연 설명도 잘라내 신비감을 끌어올린 점도 특징이다."
-많은 작품을 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20대 때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어서인지 특정 역할만 들어온데다, 메니지먼트사에서 조율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놓친 작품들도 있더라. 어릴 적에는 1년에 한두 작품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한 편 끝내고 다음 작품을 고른 뒤 준비하는 것이 영화를 하는 방식이라고 여긴 것이다. 역에서 빠져 나오는 시간도 꽤 걸렸다. 요새는 감정을 제어하고 끄집어내는 노하우가 생겨 역할에서 빠져나오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이번 제임스 역은 빠져나올까 생각했는데 주변 반응이 너무 좋아 미루고 있다. 1000만은 너무 경솔해 보이고 900만 관객이 넘으면 빠져나올 생각이다. (웃음)"
-배우로서 전환점이 됐던 작품을 꼽는다면.
"'비트'(1997년)다. 어쩔 수가 없다. '비트에서 형 보고 담배 피우게 됐어요' '형 따라서 오토바이 타다가 다쳤어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영화와 배우가 사회에 미치는 파장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됐다. 사실 비트를 끝내고 이듬해 '태양은 없다'를 할 때도 내가 좋아서 배우 한다는 생각이 컸다. 그러다 경남 밀양에 있는 한 학교에서 '똥개'(2003년)를 찍다가 쉬는 시간에 담배를 피우는데 주변에 몰려 있던 학생들이 '담배 피우는 것도 멋져요"라고 말하는데 담배 든 손이 부끄러워지더라. 그 일로 말과 행동에 더 신경쓰게 됐다."
-배우로서의 사회적 책임감이 작품 선택에도 영향을 미치나.
"워낙 선을 추구했고 영화를 통해서도 영웅의 이미지를 갖고 싶었기에 현실의 친구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악한 연기는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건달 연기도 그래서 일부러 멀리 했다. 제임스는 비현실적인 인물이어서 선택했다. 이 영화 보고 '형 때문에 은행 털었어요'라고 말할 관객을 없을 테니 말이다. (웃음)"
-영화 연출에도 큰 관심을 두고 있는데.
"영화 전체를 둘러보고 결정해야 하는 책임감이 감독의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1999년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면서 편집을 처음 접했는데 정말 재밌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감독들이 편집실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들 하는 이유를 그때 어설프게 알았다. 배우 출신 감독들의 작품이 여럿 나오면서 이제는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됐다. 장편 영화 언제 나오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데, 내 연출 색깔을 제대로 선보일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어느덧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이제 시작이라는 느낌이다. 20대 때는 막했고 30대에는 뭔가 안다고 착각했다. 40대가 되니까 이제 뭔가 좀 알겠다. 더 큰 것을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 일 욕심도 많아졌는데 부지런히 작품을 하고 싶다.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배우라는 직업의 특성상 항상 삶을 고민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요새는 스스로를 더 깊이 관찰하고 질문도 많이 던지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나라는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 듯하다."
-결혼 계획도 대중의 큰 관심사다.
"많은 여성 팬들이 결혼하지 말라고 해 고민이 크다. 그분들이 순서를 정해 돌아가면서 밥해 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웃음) 언젠가 좋은 인연이 생기면 잘 가꿔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배우로서, 한 사람으로서 꼭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얼마 전 꿈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존경받는 선배가 되고 싶다'고 답했다. 현장에서 후배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함께 배우는,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선배가 됐으면 한다. 같은 공간에 있는 이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데, 각자 다르겠지만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 배려라고 느낀다면 고마운 일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 예절과 같은 가치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