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노컷뉴스 이명진 기자)
영화 '소원' 개봉을 앞두고 만난 이준익 감독(54)이 선물 받은 책을 한권 들고 있기에 "평소 어떤 책을 즐겨 읽냐"고 물었다.
이 감독은 특유의 빠르고 명쾌한 말투로 "안 봐"라고 답했다. 이유를 물으니 "책에서 배우는 거 보다 사람에게 배우는 게 더 오래가기 때문"이란다.
"사람이 변하거나 변질하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사람도 머물러 있지 않고 변하기에 배울게 많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걸 두려워하는데 그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사실 소원이 바로 그런 영화다. 짐승 같은 어른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은 9살 소녀 소원은 부모의 애끓는 마음, 딸을 지키지 못해 애간장이 녹는 부모는 딸의 순수한 마음과 이웃의 따뜻한 배려에 범죄자에게 갈가리 찢긴 상처를 치유 받는다.
이 감독은 "이 영화에서 아동성폭행은 소재지 주제가 아니다"라며 "소재의 선정성에 가려진 주제를 봐 달라"고 호소했다.
- 이준익 주변의 좋은 사람은 누구냐?"타이거픽쳐스의 조철현 대표(영화 ‘달마야 놀자’ ‘구르믈 버섯난 달처럼’등을 제작했다). 30년째 붙어있고, 배우 정진영. 그리고 이번에 가장 큰 만남은 설경구가 아닌가. 설경구에게 배운 게 책 10권 읽은 것보다 더 많다."
- 설경구의 어떤 점이 감동적이었나?"배우로서 이 작품에 임하는 태도가 감동이야. 매일 아침 그 작은 여관방에서 줄넘기 하는 것도 그랬고, 현장에 오면 눈이 달라. 내 눈을 똑바로 안 봐, 품은 감정이 날아 갈까봐. 매신마다 그 인물의 감정을 만들어오는 배우와 그것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 위해 현장에서 보여주는 노력, 그걸 보면서 감독인 내가 한눈을 팔수가 없어.
- 조두순사건이 발생한지 겨우 5년 지났던데, 너무 빨리 영화로 만든다는 부담은 없었나?"그런 부담보다는 우리영화로 2차, 3차 피해가 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썼다. 하루에 12세 이하 아동성폭행이 신고된 것만 3건이란다. 그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숨기고 살고 있는데, 그걸 자극하는 단어나 장면, 대사나 화면은 절대 안된다는 게 이 영화를 찍는 기준이었다. 시사 이전에는 홍보도 자제했는데, 소재의 선정성이 확산되는 걸 경계했다.
-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으로 시선을 돌린 게 참 좋았다."사실 1차 피해도 피해지만 2차 피해는 영혼에 상처를 남긴다. 8살 꼬마가 그 폭행을 당하면서 성폭행이라고 인지하나? 주위 사람들이 애를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피해자의 삶은 전혀 다른 문제다. 가해자를 설령 사형시켜도 피해자의 삶은 여전히 남아있다.
소원 포스터
- 소원 가족을 둘러싼 이웃의 시선이 따뜻해서 좋았으나 비현실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범인 빼고 다 착하다고 하는데 내가 살면서 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사람들이 수군대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결국 빠졌다. 생각해보면 남의 끔찍한 상처를 우리가 아무리 대변해도 그건 가짜일 수 있다. 그럼 어떤 마음으로 이 영화를 찍어야 하나? 이런 가치관의 세상이 현실화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찍자, 그러다보니 다 착해졌다."
- 피해자인 소원의 생각과 입장이 잘 표현된 게 놀라웠다. 우리가 그동안 놓친 부분이다."그건 모두 김지혜 작가의 공이다. 내가 시나리오 7고 상태에서 연출제의를 받았는데, 김해숙이 연기한 '해바라기센터' 상담사에게 소원이 하는 고백신이 백미야. '아저씨가 비맞을까봐 우산을 씌워졌는데 아무도 칭찬은 안 해주고,(중략) 나 때문에 엄마아빠가 돈 많이 써서 속상하고' 등등 눈물이 줄줄 나. 아이를 대상화하지 않고, '가장 상처받은 자가 가장 밝게 웃는다'고 아이의 내면을 보여준 게 정말 훌륭했다."
- 소원을 연기한 이레는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맑아지더라."데뷔작 '키드캅'이후 20년 만에 아역배우와 작업했는데, 설경구의 표현을 빌면 이준익 최고 선택은 이레다. 연기경험이 전무한, 학원에 막 접수한 애를 캐스팅했다. 고향이 전라도 광주인데 촬영지인 경상도 창원에서 사투리 연기를 하는데 기기 막혀. 연말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로 가야한다."
- 딸의 출연을 망설였던 이레 부모가 시사회 이후 웃었고 성폭행 피해자 관련 단체들 반응도 좋다는 후문이다.
"고맙다고, 피해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어두운 터널에서 살고 있는지 알아줘서 고맙다고 하더라. 얼마나 다행인지. 시사 끝나고 정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우리는 영화 보는 내내 운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찍으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한 아픔과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애초 작가가 지은 이 영화의 제목은 ‘작은손’이었다. 하지만 이 감독이 각색하면서 소녀의 이름을 소원으로 바꿨고 제목 또한 바꿨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했던가. 이 감독은 “우리의 소원은, 소원이를 (사건 이전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사회 구성원의 소원도 이와 같아진다면 적어도 1차 피해로 고통 받은 피해자들이 이웃의 불편한 시선으로 목숨을 끊는다든지 하는 2차 피해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살기 좋은 사회가 될지 이 영화는 꿈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