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경기 중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한국 감독의 수첩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신현종(53) 한국 여자 컴파운드 감독의 수첩에는 극도의 중압감을 준 경기 상황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었다.
신 감독은 이달 4일(현지시간) 터키 안탈리아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여자 단체 8강전을 지휘하다가 의식을 잃었다.
당시 한국과 프랑스는 0점을 각각 4차례, 5차례 기록하는 등 엄청난 강풍에 고전했다.
수첩에는 최보민(청원군청)이 0점 한 발, 석지현(현대모비스)이 7점 한 발, 서정희(하이트진로)가 10점, 8점을 두 발을 쏜 사실까지만 기록됐다.
발사 순서는 최보민, 석지현, 서정희였는데 왜 마지막에 있는 서정희가 두 발을 미리 쏘았을까.
의식이 흐려져 잘못 기재된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은 선수들의 경기 복기를 통해 금방 풀렸다.
신 감독은 선수들에게 사대에 나가 두 발씩을 쏘고 돌아오도록 지시했다.
한 발씩 돌아가면서 쏘는 것이 정상이지만 태풍 같은 거센 바람 때문에 길어질 수밖에 없는 조준시간을 줄여 제한시간 초과에 따른 0점을 피하려는 궁여지책이었다.
선수가 활을 두 차례 연속으로 들면 체력이 달려 정확도가 떨어지는 때가 잦다.
그래서 두 발을 연속으로 쏘는 전략은 평소에 거의 구사되지 않는다.
첫 궁사인 최보민은 거센 바람을 이기지 못해 0점을 쏘고 다음 발사를 주저했다.
석지현은 첫발을 7점에 꽂았으나 조준시간이 길어지자 힘이 떨어져 다시 시위를 놓지 못했다.
"나와! 바꿔!" "나와! 바꿔!"
신 감독은 이런 지시로 전략을 급히 수정, 최보민 대신 석지현, 석지현 대신 서정희를 투입했다.
서정희는 다행히 10점, 8점 두 발을 모두 쏘았다.
첫 궁사인 최보민이 다시 돌아온 자기 차례에 0점 실수를 털고 10점 과녁에 화살을 꽂았다.
"텐∼!"
마음을 졸이며 기다린 고득점에 평소보다 더 크고 우렁찬 신 감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신 감독은 그 순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의 수첩에는 최보민의 10점 기록을 쓰다가 만 흔적이 안타깝게 남아있다.
신 감독은 병원에서 잠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경기하러 가야 하니 병상에서 몸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터키 의료진은 뇌출혈 때문에 흥분하면 위험하다고 판단해 바로 약물을 주사해 신 감독을 수면하게 했다.
신 감독은 한국 컴파운드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는 지도자다.
그는 한국 컴파운드가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출전한 2009년 울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대표팀을 단체전 2위로 이끌었다.
그 선전 덕분에 국내에 컴파운드 실업팀이 생겼다.
신 감독은 올해 다시 여자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 세계양궁연맹 1차 월드컵에서 한국에 사상 첫 국제대회 개인, 단체전 금메달을 선사했다.
세계 양궁계는 컴파운드의 강자로 급부상한 한국에 깜짝 놀랐다.
신 감독이 이끄는 여자 대표팀은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세계 최강 미국을 제치고 예선을 1위로 통과했다.
그는 의식을 잃기 전 컴파운드 선수층이 얇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컴파운드가 전국체전에 진입하면 안정적인 선수생활을 보장하는 실업팀이 늘어 컴파운드도 리커브처럼 세계무대를 호령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현재 컴파운드는 아시안게임 종목이지만 전국체전의 정식종목이 아니다.
대한체육회는 다수 시도의 팀을 갖춰야 컴파운드가 전국체전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고 보고 양궁계는 전국체전 종목으로 채택되면 각 시도에서 팀이 창설될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신 감독은 "국내에서 리커브의 치열한 경쟁을 뚫지 못하는 우수 선수들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고 국내 취업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해외로 유출되는 우수 지도자들도 잡는 길이 전국체전 진입"이라는 지론을 밝히곤 했다.
한편 터키 의료진은 신 감독이 뇌출혈 수술을 받을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수술 후 완쾌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해 한국 선수단에 희망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