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중남부 지역을 강타한 초대형 태풍 하이옌이 11일(현지시간) 오전 베트남으로 빠져나가면서 1만2천여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사망자를 낸 이번 태풍의 참상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해안 도시 타클로반을 비롯한 피해 지역에서는 곳곳에 시신이 나뒹구는 등 생지옥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이 기록적인 재해에 국제사회도 일제히 긴급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도로와 공항 등 인프라 시설이 거의 마비된 상태여서 본격적 지원이 이뤄질 때까지 적지 않은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 대피소도 속수무책…주민들 '몰살' 핵심 피해 지역인 타클로반에 구조대와 취재진의 발길이 닿으면서 피해 참상도 드러나고 있다.
해안 도로를 가득 덮은 뿌리째 뽑힌 야자나무들, 물 위로 떠밀려 올라온 선박, 폭탄을 맞은 듯 산산이 부서진 건물들은 최대 순간 풍속이 무려 379㎞에 달했던 하이옌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CNN은 전했다.
AP통신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타클로반은 몇개의 건물만 남아 거대한 쓰레기장처럼 보였다고 묘사했다.
시신 수습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땅 위는 물론 심지어 높은 나뭇가지에까지 시신들이 걸려 있었다고 AP는 보도했다.
이번 태풍으로 인명 피해가 특히 컸던 것은 많은 이들이 모인 대피소조차 태풍의 위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렸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필리핀 정부는 하이옌 상륙 전까지 80만명을 대피시켰다.
그러나 많은 대피소가 완전히 부서지면서 안에 있던 사람들이 대거 익사하거나 물에 휩쓸려갔다고 현지 관리들은 전했다.
◈ "내일 아닌 오늘 도와주세요" 피해 주민들은 식수와 식량은 물론 쉴 곳도 없어 외부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많은 이들이 먹을 것을 찾아 폐허가 된 가게를 뒤지거나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잔햇더미를 파헤치는 안타까운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됐다고 CNN, BBC 등 외신은 전했다.
이번 태풍 피해로 무려 1만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필리핀 정부가 확인한 사망자는 아직 255명에 지나지 않는다.
폐쇄된 공항에서 머물던 현지 주민 마지나 페르난데스(여)씨는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을 만나 갈라진 목소리로 "내일이 아닌 지금 당장 국제사회의 도움이 이곳에 닿을 수 있게 해 달라. 이곳은 지옥보다 더 심하다"고 호소했다.
타클로반의 세인트 폴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몰려들었지만 전기가 끊어지고 각종 의료 물자도 바닥나 간단한 응급조치 외에는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곳의 한 의사는 CNN에 "(의료 물자)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이대로 견뎌낼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필리핀 정부와 국제사회가 식량과 의약품, 텐트 등 긴급 물품 지원에 나섰지만 태풍에 날려온 잔햇더미가 도로 곳곳에 쌓여 차량 접근도 쉽지 않다.
유엔은 AP통신에 "구호품을 보내고 있지만 피해가 심한 지역에 접근하는 게 쉽지 않다"고 밝혔다.
◈ 치안 부재에 주민들 자경단 조직일부 주민들의 약탈이 '생존' 수준을 넘어서면서 치안 부재 상황에 따른 불안감 또한 커지고 있다.
CNN에 따르면 약탈 행위는 식료품 같은 생필품에서 시작됐지만 이제는 냉장고 같은 전자제품을 비롯한 다른 물건으로까지 확대되는 분위기다.
이에 일부 주민은 총기 등 무기를 들고 자경단을 조직, 불침번까지 서면서 재산과 가족 보호에 나섰다.
자경단을 조직한 사업가 리처드 영은 "(그들이) 내 아이와 가족을 건들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없지만 만에 하나 우리가 위협받는다면 나는 (총을) 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 정부는 이에 따라 타클로반 일대에 국가 비상사태 또는 계엄령을 발령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 같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한 20대 여성이 타클로반 공항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딸을 낳아 주위 사람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선사했다고 AP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