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주소 체계인 '도로명 주소' 전면 시행이 불과 40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일대 혼란을 예고하고 있다.2014년 1월 1일부터 기존 지번 주소는 폐지되고 '도로 이름'과 '건물 번호'로 구성된 도로명 주소만이 법적으로 유일한 주소로 인정된다.
하지만 아직 대다수 시민들은 자기 집의 도로명 주소는 물론, 내년부터 도로명 주소가 전면 시행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주소 찾기가 핵심인 택배·배달 직원들도 도로명 주소를 숙지하지 못해 어려움을 호소하는 실정이다.
서울 마포구에서 만난 직장인 진모(29·여)씨는 도로명 주소에 대해 소위 '듣보잡'이라는 반응이다. '도로명 주소 공익 광고도 보지 못했냐'는 질문에 진씨는 "일이 바빠 평소에 TV를 잘 안봐서 모르겠다"고 말했다.
여의도에서 만난 최모(59)씨는 "개그맨 신동엽의 광고 덕분에 내년부터 시행된다는 거는 알고 있었다"면서도 현재 집 주소의 도로명 주소는 알지 못했다. 최씨는 "알긴 아는데 길고 복잡해서 숙지가 안된다"며 "옛날 주소가 머리에 박혀서 자꾸 헷갈린다"고 말했다.
40일 뒤면 전면 시행될 도로명 주소로 취재진이 직접 음식을 주문해봤다. 자주 치킨을 시켜먹던 가게로 전화를 걸어 도로명 주소를 댔다. 직원은 "네?"라고 몇 차례 반문하더니 "그 곳으로는 배달 안된다"며 당황한 듯 전화를 급히 끊었다. 또다른 중국음식점에 전화를 걸었다. '영등포구 32 선유로길 10길'로 배달해달라고 하자 "신주소는 아직 등록이 안돼서 구주소로만 가능하다. 죄송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 "선진국 대부분 사용…국제 표준에 부합" 취지로 도입
우리나라의 현행 주소체계는 지번(地番), 즉 토지 필지별 일련번호를 주소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100여년 전 처음 시행될 당시, 이 주소는 일련번호로 순차적으로 부여됐기 때문에 1번지 옆에는 2번지가 있고 그 방향으로 다음에는 3번지가 위치한다는 식의 예측이 가능했다. 또 필지와 건물이 대략 일대일로 대응되기 때문에 지번을 그대로 건물주소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경제발전 과정에서 급속한 토지개발이 이뤄지면서 지번 순차성이 훼손됐다. 필지와 건물이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졌다. 하나의 지번에 실제 건물은 여러 개가 있게 된 것. 반대로 여러 필지에 걸친 큰 건물이 생기면 지번 주소가 갑자기 건너뛰기도 했다.
이같은 불편과 비효율성 등을 이유로 정부는 이미 17년 전부터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고 있어 국제 표준에도 부합하다"며 도입을 추진해왔다. 지번 주소가 일제에 의해 도입됐다는 점에서 '일제 잔재 청산'도 명분으로 제시됐다. 그동안 이 사업에 투자된 돈만 4000억원. 앞으로도 홍보, 유지관리, 관련사업 확대 등을 위해 상당한 예산이 추가 투입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야동길·구라길"…기존 주소보다 길고 복잡 하지만 그 실효성은 의문이다. 전문가들은 시행에 앞서 도로명 주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골목길 하나하나까지 길 이름을 짓다보니 억지스러운 이름도 많고, 기존 지번 주소보다 훨씬 길고 복잡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최인욱 좋은예산센터 사무국장은 "한꺼번에 수많은 길 이름을 새로 붙여야 해 마구잡이로 이름을 붙였다"고 비판했다. 최 사무국장은 "지역 특성과 전혀 상관없는 '화수목금토'를 따 화성길·수성길·목성길 등의 이름이 나오거나, 황천길·할렘가 같은 부적절한 도로명이 제시돼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며 "문제의 이름들은 주민들의 항의로 수정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야동길, 구라 1·2·3길'처럼 어감이 좋지 않은 길들이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또 지번 주소는 '서초구 서초동 1540-5'인 반면, 도로명 주소는 '서초구 반포대로 23길 6(서초동)' 식으로 길고 복잡하다. 서울 시민들은 이름만 대면 모두 알만한 '삼성동 아이파크 102동'도 '강남구 영동대로 640 102동'으로 표기된다. 이같은 어려움으로 도로명 주소 끝에 괄호를 달아 아파트를 쓰도록 했지만, 결국 기존 주소보다 훨씬 길고 복잡해지는 결과만 낳게 됐다.
특히 이런 과정에서 유서 깊은 마을 이름 등이 실종되기도 했다. 역사가 깃든 안국동·체부동·서린동 같은 고유 지명이 내년부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황평우 문화유산정책소장은 "지명 자체가 문화이고 역사인데 도로 중심으로 바꿔버린다면 역사와 문화가 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민족만 갖고 있는 문화 다양성, 문학성, 정체성인데 이런 것들을 굳이 버리고 혈세를 낭비하면서 혼란을 줘야 하느냐"는 얘기다.
■ "1년 반 고지·홍보" vs "당장 시행은 무리" 국민들은 아직 준비가 안돼있지만, 정부는 물리적 시행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입장이다. 전문가나 시민단체 등에 따르면 "일단 정부가 강제적으로 시행을 하면 다소 시행착오는 있더라도 국민들은 따라오게 돼 있다"는 게 정부 논리라는 것.
안전행정부 관계자는 "2011년 7월 29일에 전국적으로 대국민 고지 등을 시행해 법적 주소로의 고시 절차도 밟았고, 가구별 세대별로 예비 고지나 안내 등을 통해 1년 반 동안 홍보를 해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최인욱 사무국장은 "최소한 당장 시행은 연기하고, 철저한 재점검과 준비를 거쳐 원활한 방안과 시기를 결정하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도 "도로명 주소 체계가 한국적 특성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만큼 병용, 혼용을 모색해야 한다"며 유연한 정책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