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를 적신 뜨거운 눈물' 소치올림픽에 나선 태극전사들은 기쁨과 슬픔, 감격과 아쉬움의 눈물로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신다운과 김연아, 김해진, 박승희(왼쪽부터)와 쇼트트랙 여자 대표팀이 계주 우승 뒤 얼싸안고 우는 모습.(소치=임종률 기자, 대한체육회, 방송화면 캡처)
"웰컴 투 러시아!" 환영 인사를 들으며 소치 공항에 내린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올림픽이 막을 내렸습니다. 대회 개막 전 첫 편지에서 변기의 물까지 펄펄 끓는 '숙소와 전쟁'을 담을 때만 해도 도대체 대회가 언제 끝나나 막막했는데 말입니다. 소치의 시간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파인 얼음판과 넘어지는 상대 선수의 몸이 그렇게도 야속했던 쇼트트랙, 그럼에도 야무지고 끈끈했던 태극 낭자들, 또 다른 얼음판에서 강철로 된 무지개 같았던 네덜란드, 그 오렌지 군단보다 더 빛났던 빙속 여제, 선후배의 뜨거운 우정으로 지켰던 남자의 자존심, 그리고 은반 위를 수놓았던 피겨 여왕의 마지막 연기...
그뿐인가요? 열심히 밀고 쓸었던 '컬스 데이'의 외침, 새 역사를 써갔던 스키와 썰매의 위대한 도전, 그래서 얼음판을 미끄러지듯, 눈 덮힌 레인을 활강하듯, 썰매가 질주하듯, 소치의 시간이 그렇게 빨리 흘렀나 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선수들의 눈물입니다. 그토록 그리던 꿈의 무대에서 4년 동안 준비했던 모든 것을 쏟아부은 뒤 흐르는 눈물, 보는 사람까지 울컥하게 만드는 그들의 눈물은 성적을 떠나 가장 값진 결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마다 의미는 다를 수 있습니다. 감격과 환희, 슬픔과 아쉬움, 후련함과 뿌듯함, 미련과 다짐까지... 하지만 그 뜨거움과 감정의 충일함만은 같을 겁니다.
사람은 거짓 웃음을 지을 수 있습니다. 물론 눈물도 거짓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악어의 눈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치올림픽 무대에서 그들이 보인 눈물은 순도 100%일 겁니다.
'울지마, 승희야' 소치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500m 결승에서 상대 선수의 밀려 아쉽게 금메달을 놓친 박승희. 왼쪽 사진은 펑펑 우는 박승희를 달래주고 있는 최광복 대표팀 감독의 모습.(소치=임종률 기자)
제가 가장 먼저 본 눈물은 박승희(22, 화성시청)의 것이었습니다. 쇼트트랙 여자 500m 결승이 끝난 뒤였습니다. 금메달이 유력했지만 뒤에서 다른 선수들의 몸싸움의 여파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레이스를 펼치려다 다시 넘어지는 모습은 안타까움과 감동을 동시에 안겼습니다.
동메달 시상식 뒤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 들어선 박승희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흥건했습니다. 또 취재진을 보자마자 다시 눈물이 콸콸 쏟아졌습니다. 먼저 인터뷰를 하던 최광복 대표팀 감독이 안아 다독거린 뒤에야 비로소 진정할 정도였습니다. 박승희는 "동메달도 정말 감사하다"고 했지만 "금메달을 딸 기회를 놓친 게 너무 아쉽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박승희는 아쉬움의 눈물을 기어이 감격의 눈물로 바꿨습니다. 심석희(17, 세화여고), 김아랑(19, 전주제일고), 조해리(28, 고양시청), 공상정(18, 유봉여고) 등 언니, 동생들과 함께 계주 3000m에서 숙적 중국을 꺾고 정상에 오른 뒤 다함께 눈물바다를 이뤘습니다. 얼마든지 흘려도 아깝지 않을 눈물. 여기에 박승희는 1000m까지 2관왕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쇼트트랙 남자 1500m 준결승에서 넘어지며 결승행이 좌절된 충격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는 신다운.(소치=임종률 기자)
쓰라린 눈물도 있었습니다. 쇼트트랙 남자 1500m 준결승에서 불의의 실수로 결승행이 좌절된 신다운(21, 서울시청)의 눈물이었습니다. 대표팀에서 가장 컨디션이 좋았던 신다운은 준결승에서 1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코너를 돌다 파인 얼음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뒤에 오던 이한빈(26, 성남시청)까지 함께 넘어져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충격의 탈락에 신다운은 경기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믹스트존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날 밤 신다운은 최광복 감독을 부둥켜 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볼 수 없었고, 전해만 들었지만 아픔을 여실하게 느낄 수 있던 눈물이었습니다. 신다운은 끝내 이번 대회 메달을 따지 못하면서 눈물의 의미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대회를 위한 값진 교훈을 얻었습니다.
'언아 언니, 미안해요' 피겨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을 마친 뒤 올림픽 출전 기회를 준 김연아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의 실수에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김해진.(소치=임종률 기자)
미안함의 눈물도 있었습니다. 피겨 여자 싱글에 나선 김해진(17, 과천고)은 프리스케이팅을 마친 뒤 굵은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연기 도중 펜스에 부딪혀 넘어지는 실수도 아팠지만 좋은 기회를 준 언니 김연아(24)에 대한 미안함이 앞섰습니다.
김해진과 동갑내기 박소연(신목고)은 김연아 덕분에 꿈의 올림픽 무대를 밟을 수 있었습니다. 김연아가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올림픽 출전권 3장을 얻어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어릴 때부터 선배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김연아였던 만큼 김해진은 언니를 위해 좋은 성적을 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뜻을 이루지 못해 저절로 터져나왔던 눈물. 김해진은 실수가 아쉬웠던 것보다 우선 미안했던 겁니다. 하지만 김해진은 언니의 마지막 무대를 똑똑히 두 눈에 담으며 4년 뒤 평창을 기약했습니다.
'남몰래 흘려야 했던 여왕의 눈물' 피겨 여자 싱글 경기를 마친 뒤 중계 카메라가 없는 무대 뒤쪽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김연아.(사진=NBC 화면 캡처)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이 아렸던 눈물은 김연아의 것이었습니다. 김연아는 피겨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경기를 마치고 중계 카메라가 없는 무대 뒤쪽에서 눈물을 흘린 것이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올림픽 중계권의 강자 미국 NBC만이 담아낸 장면이었습니다.
최고의 연기를 펼치고도 석연찮은 판정에 은메달을 목에 걸어야 했던 상황. 개최국 러시아의 홈 이점을 업은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에게 금메달을 내줘야 했던 여왕. 이런 사연들과 맞물려 김연아가 흘린 눈물은 더욱 진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볼 수가 없었기에, 남몰래 흘려야 했기에 가슴에 더욱 큰 울림을 주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김연아는 외부적 요인 때문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눈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판정과 점수에 대한 억울함과 속상함이 아닌, 그저 열심히 과정을 밟아온, 또 혹독하게 훈련해왔던 시간을 연기로 여과없이 펼쳐낸 자신이 대견해서 흘린 눈물이었다고 했습니다. 성적에 대한 세속적 판단을 넘어선 한 인간의 성숙함이 묻어나오는 눈물이 아니었을까요?
이밖에도 숱한 눈물들이 소치를 적셨을 겁니다. 올림픽 2연패를 이룬 빙속 여제 이상화(25, 서울시청)의 당당한 눈물, 병상의 동생 노진규(22, 한체대)를 위한 메달 선물을 마련하지 못한 노선영(25, 강원시청)이 흘린 누나의 눈물, 아쉽게 4강 진출이 무산됐던 여자 컬링 대표팀의 합쳐진 눈물... 이밖에도 제가 보지 못하고, 겪지 못했던 수많은 눈물들이 있을 겁니다.
어떤 눈물이라서 뜨겁지 않고 아프지 않고 짜지 않겠습니까? 4년 동안 그토록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던 태극 전사들, 이제 몸에 더 이상 나올 수분이 없을 줄 알았지만 그래도 북받쳐오는 감정이 밖으로 밀어내는 눈물들. 인간 한계에 도전했던 그 노력의 결정체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 눈물의 의미를 가슴에 깊이 담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마오짱, 울지마' 소치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환상 연기를 펼친 뒤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일본 아사다 마오.(사진=방송 캡처)
p.s-국내 선수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피겨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의 부진을 프리스케이팅에서 만회한 뒤 흘린 일본 아사다 마오(24)의 서러운 눈물, 생애 최고의 경기를 펼친 뒤 나온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의 감격과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조국의 과분한 선물처럼 안겨진 금메달에 대한 어리둥절함이 섞인 눈물.
조국을 바꾸는 우여곡절 끝에 8년 만의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던 안현수, 아니 빅토르 안이 얼음판에 남긴 키스와 눈물까지...88개국 2873명 선수들 모두 박수를 보냅니다. 뜨겁거나(Hot) 그렇지 않거나(Cool) 모두 그대들이 흘린 소중한 눈물(Yours)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