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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의사 김창기 "광석이의 괴로움 알지 못해 죄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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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하는 의사 김창기 "광석이의 괴로움 알지 못해 죄책감"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동물원'' 김창기

    김창기

     

    요즘 아이들은 동물원이라는 말을 듣고 과천을 떠올리겠지만, 30대 이상의 사람들이라면 으레 청춘의 송가를 불렀던 그룹 ''동물원''을 생각한다. 그 시절 젊은이들은 구구절절 말로 하지 않고, 동물원의 노래로 사랑을 고백하거나 이별의 아픔을 달랬다.

    1988년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라는 앨범을 들고 나타났던 동물원. 그중에서도 김창기는 동물원의 히트곡 제조기이자 의대생이라는 신분으로 더욱 화제를 모았던 인물이다. 서정적인 가사와 선율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던 그가 지금은 소아정신과 전문의로 활동하면서 아이들의 상처에 새 살을 돋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어쩌면 위로라는 단어야말로 김창기의 음악과 인생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그룹 ''동물원'' 출신의 소아정신과 전문의 김창기 박사의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김창기 (소아정신과 전문의)


    - 혜화동에서 성장기를 보내셨는데요. 혜화동 하면 떠오르는 것은?

    어머니께서 일을 하셨고, 저희 집은 언덕 꼭대기에 있었어요. 그래서 저녁때면 저랑 형이랑 여동생이랑 언덕에서 엄마 언제 오시나 기다렸어요. 그러면 이웃집에서 밥 짓는 냄새가 나고, 배가 고프고. 그럴 때 형이 노래 불러줬던 기억이 나요. 형은 노래를 좋아해서 고대 경제학과를 다니다가 도망쳐서 지금은 성악가를 하고 있어요. 독일 텍사스 크리스천 유니버시티의 교수로 있어요.

    -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부모님이 다 음악을 좋아하셨어요. 집에 5~60년대 팝송 LP가 다 있었고, 방 두 칸이라도 녹음기는 꼭 있어야 하는 로맨티스트들이셨어요. 어머니 같은 경우엔 고등학교 졸업할 때 이대 성악과를 가겠다고 했다가 무지 혼나고 영문과를 들어가셨죠. 대학 졸업하신 뒤엔 MBC 피디 1기로 들어가셨다가 나중엔 대사관에서 일하셨어요. 어머니는 소녀 같으세요. 언제나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엄마가 있잖니."라고 말씀하셨어요. 사실 일하시느라 같이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도 마치 줄리 앤드루스 같은 대사를 날리셨죠. 그리고 아버지는 직업군인이라 전방에 계셨고요.

    - 어린 시절에 왜 "나는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었나요?

    제가 종갓집 출신인데 왼손잡이에, 말을 더듬고, 외탁을 해서 엄마를 많이 닮고, 굉장히 산만했어요.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라고 하는데요. 집 형편은 어려운데 일주일에 운동화를 한 켤레씩 떨어뜨리고 오고, 자꾸만 다치고, 유리창 깨뜨리고. 그래서 많이 혼났죠.

    - 최초로 작곡을 한 기억이 혜화 초등학교 3학년 때라고요? 어린이 작곡대회에 나갔다고요?

    당시에 어린이 작곡대회를 나갔다가 은상을 탔어요. 사실 저는 피아노 배우는 걸 너무 싫어했는데, 어머니도 억지로 안 시키셨어요. 그래서 다행히 음악에 안 질렸던 것 같아요.

    - 이후 다시 음악을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중학교 때 형이 생일선물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줬어요. 그걸로 팝송을 들으면서 음악을 좋아하고, 폴 사이먼을 존경하기까지 했어요.

    - 중학교 시절을 호주에서 보내셨다고요?

    네. 3년 동안 호주 캔버라에서 보냈는데 정말 재밌었어요. 가족이 다 같이 모여산 것도 그때가 처음이라 너무 좋았고요. 축구도 많이 하고, 잘 먹고, 친구들이랑 노느라 정신없었어요. 대신 그땐 다 백인들만 있을 때라 좀 위축되기도 했어요.

    - 의대는 왜 가셨나요?

    사실은 건축가가 되고 싶었어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폴 사이먼 노래 중에 ''So long, Frank Lloyd Wright''라는 노래가 있는데요. 이 Frank Lloyd Wright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폴 사이먼이 송가를 썼나 싶어서 찾아봤더니 대단한 건축가더라고요. 자연과 건축물을 융화시키는 로맨틱하고 자연주의적인 건축가요. 그래서 나도 이런 사람처럼 돼보자 싶어서 이과에 갔어요. 그런데 성적이 좀 좋아서…….(웃음) 그리고 고 3 여름방학 때 ''인간의 굴레''를 읽었는데, 주인공 피터가 저랑 비슷하더라고요. 열등감이 많고, 뭘 잘 하지도 못하는데 의사가 돼서 봉사하는 모습이 참 좋아보였어요.

    - 그룹 ''동물원''은 왜 결성하셨나요?

    대학교 때부터 다 친구들이었어요. 김광석은 대학 1학년 때 친구의 친구로 만나서 거의 형제처럼 지냈어요. 서로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같이 놀았죠. 그러다가 임지훈 형이 음반을 낸다면서 저한테 노래를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노래를 드렸는데, 한동안 소식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87년에 공부하고 있는데, 갑자기 라디오에서 제가 만든 노래 ''사랑의 썰물''이 나오더라고요.

    이후에 산울림의 김창완 씨께서 ''또 만들어놓은 곡 있냐?''고 물으시기에 친구들끼리 데모 테이프 20개를 만들어서 팔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저희들에게 음반을 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이미 대학에서 한번 낙제했었기 때문에 또 낙제할까봐 안 하겠다고 했어요. 그래도 친구들이 같이 하자고 해서 딱 한 번만 하려고 했어요. 근데 해보니까 별로 공부에 방해되는 것도 아니고, 동아리 활동처럼 하는 거였고, 반응도 좋아서 계속 했죠.

    - ''동물원''이란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요?

    제 노래 중에 동물원이란 노래가 있어요. 어릴 때의 모습, 우리 안을 도는 원숭이 같이 답습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들이다, 회색주의자들이다, 라는 의미에서 동물원이라고 짓게 됐어요.

    - 좋아하는 뮤지션이 송창식 씨, 조동익 씨, 하덕규 씨라고 하셨는데요. 그분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말을 이렇게 쓰는구나, 우리나라 말을 음에 이렇게 싣는구나, 한국어의 억양을 이렇게 살리는구나, 가사의 시각화를 이렇게 시키는구나, 그냥 외침이나 감정의 표현만이 아니라 어떤 그림을 보여줬을 때 그것에 따르는 생각과 감정들을 여운처럼 할 수 있구나, 라는 걸 배웠어요.

    - 음악가와 의사의 길을 두고 갈등은 없었나요?

    저는 무대 체질도 아니고, 노래도 잘 못해서 그런 갈등은 없었어요. 음악을 폄하하는 건 아니고요. 음악으로 계속 먹고 살 걸 생각하면 복잡해질 것 같았어요. 그렇다고 제가 상업적인 노래를 안 만든 건 아니에요. 잊혀질만하면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노래를 만들었어요. 서로 주고받는 거지, 언제나 내 세계만 보여주려고 했다면 오래 못 갔을 것 같아요.

    - 내가 만든 곡이 인기가 있다고 처음 느낀 순간은?

    인턴 할 때 병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학생들이 술 마시고 취해서 제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그리고 얼마 전에 ''동물원''이라는 뮤지컬을 하는데, 잊고 있었던 노래들과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그제야 제가 대견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뜨기 위해 만든 곡 중의 하나가 ''거리에서''였다고요?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곡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어요. 사실 저는 마이너 발라드를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거기서 계산된 틀, 너무 절절한 감정 같은 것 때문에요. 저는 감정을 절제하는 걸 좋아해요.

    - 95년에 나온 6집 앨범의 ''널 사랑하겠어''가 개인적으로 특별한 노래라고요?

    굉장히 고마운 노래예요. 그 곡으로 집을 마련했으니까요.(웃음) 사람들 좋아할만한 노래를 만들자 싶어서 의도적으로 만든 곡이예요. 멜로디는 샤워하면서 만들었는데, 샤워 끝내고 나오니까 제 처가 딱 앞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당신 사랑한다고 해야지.(웃음)

    - 김광석 씨와의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광석이 별명이 ''미친 반 토막''이었어요. 키가 작은 녀석이 뭐든 너무 열심히 하고, 너무 잘 하고 싶어 했어요. 같이 사고도 많이 쳤고요. 광석이가 다혈질이거든요.

    언젠가 우리들이 핑클파마를 한 적이 있는데, 광석이가 도저히 자기 집에 돌아갈 용기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집에 갔는데, 저희 부모님께서 아무 말 없이 쯧쯧 혀만 차시더라고요. 그 다음 날 광석이네 집에 갔다가 혼쭐이 났어요. 여행가다가 기타 망가뜨렸다고 싸움질 한 적도 있고.

    광석이가 죽었을 땐 제가 레지던트를 하고 있을 땐데, 그때 서로 바빠서 같이 얘기할 틈이 없었어요. 그 친구가 괴로워하는 마음을 알지 못했어요. 죽기 얼마 전에 같이 술 한 잔 했는데, 그때 제 힘든 얘기를 해서 죄책감이 많아요. 형제 같은 친구의 괴로운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 마음을 도와주겠다고 이러고 있나 싶기도 해요.

    - 당시 충격이 엄청나셨죠?

    죄책감이 너무 커서 한동안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오랫동안 형제처럼 지내온 사람의 마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 생각만 했다는 죄책감이 너무 많았어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어야 했는데, 조금이라도 신경 썼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동물원을 그만 둔 이유도 김광석 씨와 관련이 있나요?

    그건 광석이의 죽음과는 관련 없어요. 정신과 전문의는 좀 숨어있어야 하고, 연예인 같은 이미지가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정신과 의사로서 성실하게 살기 위해 동물원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이후 2000년에 독집앨범을 발표하셨는데요. 앨범 이름을 ''하강의 미학''이라고 지은 이유는?

    가사를 만들다가 생각했어요. 자꾸 오르고 싶고,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비우려고 해도 비워지지 않고, 해봐도 잘 되지 않잖아요. 그래서 어릴 적 썰매 타고 내려가듯 신나게 내려가는 이미지를 떠올렸어요.

    - 의사와 음악가 활동과 병행하면서 비난을 받은 적도 있나요?

    전에는 많이 있었어요. ''너 가수라며? 노래해 봐."라는 사람들도 있었고.

    - 왜 정신과를 택하셨나요?

    의사를 해보니까 저랑 잘 안 맞더라고요. 그렇게 긴박하게 살고 싶지도 않고, 또 제가 좀 잘나고 싶었거든요.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정신과를 하면 인간의 이치를 알 수 있을 것 같고, 좀 더 멋있어 보일 것 같았어요. 정신과를 택하면서 소심하고 우울한 제 병도 고칠 수 있었어요. 물론 제일 좋은 치료제는 제 가족이었지만요. 그리고 부모님의 의도도 잘 이해하게 되고, 제 능력에 대해서도 자신 있어지고, 만족스럽게 되면서 편해졌던 것 같아요.

    - 인간 심리에 대한 연구가 음악에 어떤 영향을 줬나요?

    가사를 더 잘 쓸 수 있게 도와줬어요. 이런 생각과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고, 어떤 현상을 빚어낼 거라는 게 예측 가능하니까 그림을 더 잘 그려낼 수가 있죠. 저는 노래 만들 때 상황, 생각, 감정, 이렇게 세 가지를 네 컷에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이때 그림을 보여줄 것인지, 생각을 보여줄 것인지, 감성을 보여줄 것인지, 그리고 흐름은 잘 이어질 수 있을지, 한 부분을 봤을 때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해서 빠질 수 있는지. 그런 걸 생각하면서 노래를 만들어요.

    - 주로 언제 곡을 만드시나요?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걸 어떻게 스토리화하고, 입체화시킬 것인지를 생각하고 다니죠. 그러다가 이제 좀 정리해봐야겠다 싶으면 입에 붙을 수 있는 흔한 멜로디로 만들어요.

    - "30대나 중년층을 대상으로 음악을 만들 수가 없어서 이제 더 이상 음악을 못할 것 같다"고 고백한 적이 있으신데요?

    방송을 탈 만한 노래에 대해 자꾸 생각하는 것도 재미가 시들해지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도 들어줄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자조적인 얘기를 한 거죠.

    - 정신과 분야 중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사실은 정신분석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전문의가 된 후 유학을 가려고 돈을 벌려고 하는데 바로 IMF가 터지더라고요. 그때 마침 시카고 일리노이 대학에서 계시던 교수님께서 국내에 오셔서 제가 첫 제자가 됐어요. 인간의 발달이라도 잘 배우자라는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까 참 재밌더라고요.

    - 아들 남현이가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가 있다고요?

    네.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는 크게 세 가지 증상이 있어요. 충동성, 집중을 잘 못 하는 것, 행동이 많은 것. 요즘 티비에서 보이는 모습은 그런 증상들에 의한 부작용이 나타나는 거예요. 뇌에서 가장 마지막 발달된 부분이 미숙하게 타고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엄마들이 잘못 키워서 그런 건 아니라 타고나는 기질적인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기질 때문에 자꾸 혼이 나면 아이들은 화가 나고 반항적이 되죠.

    이런 아이들은 발달이 좀 빨라요. 10개월 때부터 걷기 시작하면서 앞으로 달려가거나, 잘 삐치고 화를 잘 내거나, 숫자를 거꾸로 읽는다거나, 배우는 데 어려움을 보이는 아이들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일 경우가 많은데요. 이런 아이들은 혼낼 게 너무 많으니까 혼낼 걸 줄이기 위해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서너 가지 행동에 대해서만 혼내고, 나머지는 눈 감아 줘야 해요. 그리고 부모들이 말로 해결하려다가 안 되면 결국 아이를 때리기도 하는데, 이렇게 감정적으로 흐르면 안 돼요. 그러기 위해선 일단 말로 하다가, 안 들으면 벌서라고 하고, 벌을 제대로 안 서면 매를 드는 거예요. 이렇게 말-벌-매로 2~3분 내로 상황을 종료시켜야지, 부모가 화가 나서 혼내게 되면 애들은 자기가 잘못한 건 기억 못 하고 혼난 것만 기억해요. 그렇다고 매를 들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잘 이야기하고, 화해하고, 위로해주는 과정이 있어야 해요.''내가 여기서 풀어주면 저 애가 날 만만하게 보겠지''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아이들과의 힘겨루기가 아니니까요.

    - 아이들의 교육심리에 관한 책도 발간하셨죠?

    예전에 ''당신의 아이에게도 리듬이 있다''는 책을 냈는데요. 그땐 출판사에서 자꾸 교육서를 내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교육서로 만들 경우, 자칫 그 말을 안 들으면 애를 잘못 키울 것 같은 엄마의 불안감만 조성할 수가 있잖아요. 육아는 사실 단순한 일이고, 태고 때부터 해온 일이고, 조금 상식만 발휘하면 문제가 없는데 자꾸 그런 쪽으로 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이번엔 ''나의 아이의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책을 냈어요. 소아정신과 전문의라는 사람도 몇 가지 규칙을 지키면서 이성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아이를 키울 땐 우왕좌왕하고 좌충우돌하게 된다,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상식을 발휘하면서 아이 키우는 걸 즐기자는 의도로 책을 냈어요.

    - 정신과 의사로서 엄마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좋은 엄마의 조건은 일관적이고, 따뜻하고, 아이들이 보내는 신호를 잘 볼 수 있도록 민감해야 해요. 좋은 의도를 갖고 있어도 갈등은 생기게 돼 있어요. 그럴 때 관계 개선을 잘 해줘야 해요. 화해를 잘 해줘야죠. 그러기 위해선 엄마들 마음이 편해야 하고, 엄마가 너그러워야 화해가 가능하죠.

    좋은 엄마를 만들기 위해선 아빠의 역할도 필요해요. 예전엔 대가족 문화나 사회가 있어서 엄마의 독설을 걸러줄 장치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파트 문만 닫으면 끝이잖아요. 엄마한테 한 번 잘못 걸리면 애들은 죽죠. 그러니까 아빠가 엄마 화난 걸 풀어주고, 엄마를 기분 좋게 해줘야 해요. 그래야 그 화가 애들한테 가지 않아요.

    좋은 아빠는 애들한테 잘해주는 게 아니라 엄마한테 잘 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좋은 아빠는 엄마가 만들어주는 거고요. 엄마가 아빠를 무시하면 애들이 아빠를 존경하겠어요? 존경할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아이들이 갈팡질팡하고, 스스로 발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거예요. 아빠가 좀 부족하더라도 엄마가 아빠를 자꾸 훌륭한 분으로 만들어줘야만 아이들이 존경하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자기를 발전시키게 되는 거죠. 공부는 그 다음이에요.

    - 앞으로의 계획은?

    병원도 잘 됐으면 좋겠고, 가족이랑 친구들과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이 건전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고요. 그리고 내년이나 내후년 사이에 1년 정도 연수를 갈 생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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