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범 감독 (노컷뉴스 이명진 기자)
영화 '우는 남자'에서 배우 장동건이 연기한 킬러 곤은 몸에 'Asian Crack Whore'라는 문신을 새기고 있다. 마약에 중독된 동양 여자를 비하하는 이 문신은 어릴 적 곤이 겪었던 씻을 수 없는 아픔이 그의 가슴에서 커다란 증오로 자라났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람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다루던 곤은 어느 날 임무 수행 중 벌어진 예기치 못한 일로 자신이 품어 온 증오의 정체를 의심하게 된다.
우는 남자는 딜레마에 빠진 한 남자의 속죄라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봤을 법한 다소 신화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정범 감독에게 모티프가 된 텍스트의 존재를 묻자 "평소 무언가 결핍된 인간에 대한 고민이 많다"고 답했다.
"제 전작인 '열혈남아'(2006), '아저씨'(2010)의 기본틀도 내적 결핍을 지닌 주인공이잖아요. 개인적으로 완벽하지 못한 캐릭터의 내적 갈등, 딜레마에 관한 이야기를 선호하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를 죽여야 하는 한 인간의 입장을 그리고 싶었죠."
최근 서울 삼청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이 감독은 우는 남자의 결말을 두고 해피 엔딩이라고 했다. 생사를 떠나 주인공이 극중 인물, 혹은 스크린 밖 관객들에게 특별한 감흥을 전달할 수 있다면 그 영화는 행복한 결말을 지닌 성장 영화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작품은 피튀는 액션신이 주를 이루고는 있지만,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가 자신의 연출작들을 '성장 영화'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 반듯한 이미지의 장동건에게 극 초반 우스꽝스런 장난에다, 상대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하는 욕까지 하게 만들었다. "곤이라는 캐릭터를 구상할 때 중요하게 여긴 것이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는 절대로 잘 자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뒤틀릴 테니 말이다. 심리적인 치료가 필요했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곤은 몸만 어른이 된 경우다. 중후한 킬러가 아니라, 양아치 같은 녀석을 속죄시키는 드라마를 상정했다. 동건 씨와도 시나리오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곤의 캐릭터를 더 재밌고 괴팍한 느낌으로 만들자고 했었다."
- 극중 클래식과 재즈 풍의 음악을 중요하게 사용하더라. "오프닝 시퀀스에 흐르는 샤데이의 '스무스 오퍼레이터(Smooth Operator)'는 바람둥이라는 뜻인데, 우리 영화에서는 킬러 곤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사데이를 15년 전부터 좋아했고 곤의 이미지를 구상할 때 떠오른 노래였다. 중간에 클래식 음악이 흐를 때는 금융권의 고상한 척 하는 사람이 죽고는 한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생활 자체가 거짓인 존재인데, 클래식 음악은 고상을 떠는 그들의 극악무도한 가면을 상징한다."
- 킬러 곤이 한국에 와서 아지트로 활용하는 곳이 폐업한 기원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곤이 한국에 와서 머무는 공간이 전작 아저씨에서의 전당포만큼이나 괴리된 공간이었으면 했다. 전당포는 이미 써먹었으니,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기원을 떠올렸다. 세상과 담을 쌓고 바둑에 집중하는 분들이 있는 곳, 그곳이 버려지고 낡은 곳이라면 곤이라는 캐릭터가 혼자 있기에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곤이 소음기를 단 총을 테스트할 때 바둑판에다 쏘는 장면도 인상적일 것 같았다."
- 장동건에게 실제 돼지를 잡으러 가자고 했다던데. "킬러에 관한 영화를 찍으니 살아 있는, 체온을 지닌 것의 목숨을 빼앗을 때 느낌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혼자 가기에는 무서워서 동건 씨에게 같이 가자고 했었다. 그때 동건 씨 표정이 아직도 선하다. 지금 생각해도 안 간 게 다행이다. 그 끔직한 정서적 충격을 감당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만큼 절박했던 듯하다. 분명히 아저씨와 비교될 거니 더 좋은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절박함."
- 우는 남자의 마지막 시퀀스는 다분히 의도적인 배치로 다가오더라. "이 영화의 정서나 감정이 모두 녹아 있는 시퀀스를 그리고 싶었다. 곤이라는 캐릭터가 결국에는 마음은 크지 못한 아이였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이 아이 보세요. 아이 같죠'라는. 나쁜 킬러이지만 결국에는 그도 사람이라는 연민의 감정을 관객들이 가졌으면 했다."
- 아저씨에서의 불안하고 긴박한 카메라 움직임과 달리, 우는 남자는 정공법을 택하고 있다. "아저씨는 특수부대 출신인 한 남자의 비밀이 아이를 구하는 과정에서 벗겨진다. 그 안에서 불안감과 긴박감을 주기 위해 핸드 헬드(사람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는 촬영법)를 주로 활용했다. 반면 우는 남자는 일정 부분 사람의 내면을 산책해야 하는 드라마다. 그래서 멋지거나 근사하게 포장된 액션을 버리고자 했다. 곤의 절박감, 내면의 심상이 드러나야 했기에 정직하게 찍으려 했다. 카메라를 흔드는 것은 연출자가 개입을 하는 것이다. 우는 남자의 촬영법은 판단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려 한 결과물이다."
이정범 감독 (노컷뉴스 이명진 기자)
- 아저씨 이후 특별한 목마름이 있었나. "드라마에 대한 갈증이 컸다. 아저씨 때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는 남자를 열혈남아와 아저씨의 중간에 위치한 영화로 설정한 이유다. 열혈남아에서 주연을 맡았던 설경구 선배님을 최근 찾아뵈었는데, '또 아저씨야?'라고 묻더라. 두 영화의 중간에 있다고 하니까 선배님이 '나는 좋다'고 하시더라."
- 한 킬러의 속죄를 다룬 영화인 만큼 속죄의식에 대한 탐구도 있었겠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다. 죄와 벌은 네 차례 읽었는데 그 안의 죄의식, 속죄에 몰입했었다. 생각해 보면 전작들이 모두 죄의식과 연결 되는데 제 친구에게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슬픔과 허무의 감정은 이제는 이겨냈다고 생각하는데 한때는 처절했다. 영화 공부를 하기 전부터, 군대에 다녀와서 영화를 찍으면서까지 어려움이 컸다. 그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캐릭터에 녹아든 것 같다."
- 우는 남자까지 세 편의 연출작 모두 비정한 물질만능 세상을 사는 인물들의 아픔에 천착한다. "당연하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입고 먹고 자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것으로 삶이 좌지우지 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면서 사는 것 같다. 학교 은사님 중에 '씨받이' '길소뜸' 등의 시나리오를 쓰신 송길한 선생님이 계신데, 항상 사람이 먼저라고 하셨다. 아무리 잘 썼더라도 그 안에 사람이 없으면 좋은 시나리오가 아니라고. 액션을 찍든 호러를 찍든 사람이라면 사람에 대한 고민과 의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버리는 순간 망가지는 거라 생각한다."
- 액션 느와르 장르로 주제를 나타내는 데 특장점이 있나. "최대한 키워지고 극화된 감정을 보여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경우 상대에게 화가 났을 때 따귀를 때리는 게 전부일 테지만, 액션이나 느와르는 그 이상의 정점에 있는 행위를 표현할 수 있다. 곤의 직업을 킬러로 설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죽음이라는 가장 두렵고 피하고 싶은 일을 행하는 인물이니 그 내면의 갈등을 최대화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 면에서 피끓는 액션 영화는 내적 갈등을 표면화하는 데 적합한 장르다."
- 액션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클 듯한데. "아저씨를 통해 '액션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칭찬을 들은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 아저씨는 액션이 깔린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액션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아니었기에 그 칭찬이 더욱 고마웠다. 하지만 우는 남자도 액션에만 관심이 모아진다면 서운할 것 같다. 액션은 서브이고 수단이다. 그 안의 드라마가 관객들에게 가닿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공교롭게도 4년에 한 편꼴로 작품을 했다. "그래서 월드컵 감독이라 불린다. (웃음) 우연이다. 열혈남아 이후 로맨틱 코미디를 준비했었는데 2년이 소진됐다. 아저씨 이후에는 1년여 동안 아저씨 들고 여기저기 영화제를 다녔고, 작은 영화 한 편 각색하는데 3, 4개월이 지났다. 나머지는 우는 남자를 위해 금융권, 특수무술 등을 취재했다. 어떻게 하다보니 4년에 한 편씩 찍게 됐다. 다음 작품은 2년 안에 내놓고 싶다."
- 다음 작품도 액션 느와르 장르인가. "액션 느와르에는 꾸준히 관심을 갖게 된다. 기본적으로 액션 느와르를 바탕에 깐 청춘 성장물을 해보고 싶다."{RELNEWS:right}
- 이정범 감독에게 영화란. "시나리오 쓸 때 몸 안에 돌이 생기는데 그것을 응급실에 가서 빼내고는 한다. 그만큼 고통스럽지만 전지적 작가가 되는 데 따른 창작의 쾌감이 크다. 누군가 제 이야기를 읽고 '슬프다' '재밌다'고 해 주면 엄청난 희열을 느낀다. 영화를 찍으면서 저도 힐링이 된다고 해야 할까. 자기 힐링의 과정인 것 같다.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사교적인 사람이 못 돼 외롭고 세상에 혼자가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제 영화에 공감해 주는 관객들이 있으면 외로움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된다."
- 죽기 전에 만들어내고 싶은 영화 같은 것이 있다면. "특별히 그런 것은 없다. 다만 딸이 일곱 살인데, 그 아이가 커서 성인이 돼 아빠 영화를 봤을 때 부끄럽지 않았으면 한다. '아빠 이런 건 왜 찍었냐'라는 말은 정말 듣고 싶지 않다. (웃음) 지금까지 세 작품을 했지만, 딸이 '잔인하다'고는 말할 수 있을 지언정 그 아이 앞에 부끄러운 영화는 찍지 않았다고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