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자료사진)
최근 원세훈 국정원장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법원의 1심 판결을 두고 논란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현직 판사가 원세훈 사건 선고를 두고 '법치주의는 죽었다'고 내부전산망에 직격탄을 날렸다가 징계까지 받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원세훈 사건'은 양승태(대법원장)호(號) 법원이 갖고 있는 태생적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보수획일화된 세간의 평가보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급격하게 줄고 있는 법원-정치권력간 거리감이다.자칫하다가는 '사법-행정 신밀월시대'라는 평가가 나올 지도 모르겠다.
CBS는 두 번에 걸쳐 현 사법부의 문제점을 진단해본다. [편집자 주]◈ 대법원 정권과 맞춘 보수-기득권 코드
법원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최고 권위이자 상징이다. 한번 판사복을 입게 된 법관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가 '대법관'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법원이 대한민국 사법부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어느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대법원은 단순히 3심제도중 가장 높은 상급심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 한국사회의 정치·사회·경제·윤리·문화 분야의 새로운 법적 기준을 제시해주고 이를 통해 사회통합까지 수행해야하는 막중한 책무를 맡고 있다.
특히 소수자·약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넓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대법관 인선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장 3년 임기동안 대법관 인선은 이같은 가치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서울대 법대-50대 남성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기준만이 있기 때문이다.
양 대법원장 취임이후 고영한(59.서울대 법대),김창석(58.고려대 법대),김신(57.서울대 법대),김소영(50.서울대 법대),조희대(57.서울대 법대),권순일(55.서울대 법대) 대법관등 6명의 대법관이 지명됐다.
대법관 13명중 6명이 양 대법원장이 지명한 인사로 채워지면서 대법원은 이제 진정한 양승태 대법원의 색깔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지만 평가는 비판일색이다.
대법관 인선의 중요한 미덕인 다양성과 소수자 배려는 종적을 감춘지 오래다.
학력으로 보자면 13명 대법관 중 박보영 대법관(한양대 법대)과 김창석 대법관(고려대 법대)을 제외한 나머지 11명이 모두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출신 고교에서도 대전고(3명),광주제일고(2명) 등 이른바 '지역 명문고' 편중 현상을 보인다.
여성 대법관은 박보영·김소영 대법관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변호사·판사·검사를 법조 3륜이라고 한다지만 대법관 13명은 모두 판사출신이다. 양창수(학계) 대법관과 안대희(검사) 대법관의 뒤를 모두 정통 판사들이 메웠기 때문이다.
판사 출신이라고 무조건 '보수'라고 단언할 수 없다지만,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 성향을 분석해 보면 그 방향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지난달 25일 양 대법원장 체제에서 나온 전원합의체 판결 59건의 분석결과를 발표했다.
민변은 "전원합의체 판결 59건 중 반대의견은 32개, 보충의견과 별개의견은 30개에 불과해 전임 이용훈 대법원장 체제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고 밝혔다.
소수자들의 입장보다 기득권층의 논리에 더 익숙하다는 해석이 나올 수 있는 부분이다.
지역명문고와 서울대 법대, 법관 출신이란 공통점을 가진 대법관들이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끊이지 않고 있다.
◈ 보수 정권의 유혹, 현직 법원장까지 행정부로 월담대법원의 보수화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지적받고 있는 것이 바로 현직 고위직 판사들의 행정관료 진출이다.
판사의 행정관료화는 이명박 정부 시절 김황식 당시 대법관의 감사원장 임명이 물꼬를 텄다.
박근혜 정부 들어 황찬현 서울중앙지법원장이 감사원장으로 임명됐고, 뒤이어 최성준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방송통신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모두 현역 고위 법관들이 행정부의 요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문가들은 정권의 '판사 뽑아쓰기'가 3권분립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우려는 이제 본격화되기 시작하는 고위법관의 인사적체 현상과도 맞물려 있다.
올해 2월 단행된 법원 인사에서 법원장 순환보직제에 따라 7명의 법원장이 고등법원 재판부 재판장으로 복귀한 것이 좋은 예이다.
고위법관들이 마땅히 승진할 자리가 없어지고 변호사 시장도 찬바람이 부는 상황에서 '고위행정관료'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한상희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이런 현상에 대해 "(판사들이) 영전되기 위해 자기 의견을 조정해야한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라며 "사법부는 제도적으로 독립이 보장됐다고 하지만 대법관들이 다른 정부부처의 눈치를 보게될 것"으로 전망했다.
고위법관들이 정부 각료로 입각하게 될 경우, 관련 부처와 관련된 소송에서 판사들이 각료가 된 고위법관들을 의식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문제다.
새로운 전관예우가 탄생하게 되는 셈이다. 판사들의 자기검열과 전관예우는 필연적으로 사법부의 행정부 견제를 무디게 만들 수 밖에 없다.
◈ 상고법원 설치에 목맨 대법, 靑-與 지지 절실'상고법원 설치'라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최대 숙원도 법원의 정치권 눈치보기를 더욱 심하게 만들고 있다.
상고법원이란 간단하게 보자면 '현재 대법원 소부가 맡았던 사건들을 처리하는 재판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대법원은 접수된 모든 사건들을 심사한 뒤 법령 해석의 통일성이나 사회 전반의 이익과 관련이 있는 사건은 직접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맡고, 나머지 일반 사건은 상고법원이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대법원은 폭증하는 상고사건 수를 감안할때 이를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한 상고법원 도입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반발이 만만치 않다.
대한변호사협회 상고심개선연구위원인 이재화 변호사는 상고제도 개선 토론회에서 “대법관이 증원되면 대법원의 위상이 추락할 것이라는 권위주의적인 사고가 깔려있다”고 상고법원 도입을 비판했다.
이 변호사는 “최고법원으로서의 권위는 ‘대법관 숫자의 희소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통해 사회구성원이 수긍할 수 있는 판결을 할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라며 현재 13명인 대법관 수를 30~50명으로 늘이자고 주장했다.
상고법원이 대법원이 있는 서울에 설치되는 것과 관련해 지역법조계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상고법원 법관들의 인사권마저 쥐게 되면서 대법원장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해진다는 우려도 여전하다.
이러다 보니 상고법원 도입을 위한 키를 쥐고 있는 국회의 반응도 차가운 상황이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장은 지난달 '상고제도 개선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하는등 상고법원 도입을 위한 '광폭행보'에 나서고 있다.
최근 이례적으로 주요 언론사 간부들과 접촉을 갖는 등 언론과의 친밀감을 높이는데도 공을 들이고 있다.
무엇보다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청와대와 여권의 전폭적인 지지다.
대법원으로서는 정치권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