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차례로 관객과 만난 영화 '변호인' '또 하나의 약속' '제보자' '카트'. 이들 영화는 우리 시대의 아픔을 외면 않고 직시하려 한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남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모두 실화에 바탕을 뒀기에 지금 우리 삶을 반추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 역시 네 편의 영화를 한 울타리로 묶는 요소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망각을 지우는 기억 '변호인'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사진=위더스필름 제공)
올 첫 1,000만 관객을 모은 변호인(감독 양우석·제작 위더스필름)은 돈을 좇던 한 변호사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는 여정을 통해, 개인은 물론 사회의 미래를 결정지을 삶의 자세에 대한 깊이 있는 물음을 던진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 영화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변론을 맡았던 부림사건(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1년 공안당국이 부산 지역 독서모임의 학생 등 22명을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용공조작사건)을 소재로 다뤘다.
변호인을 제작한 위더스필름 최재원 대표는 11일 CBS노컷뉴스에 "이 영화를 통해 예전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며 "잊히고 잃어 버린 가치를 되찾는, 지금 우리 삶에 도움이 될 기억이 변호인을 만들게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왠지 모르게 잘못된 것 같고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변호인이 보편적인 상식에 대한 이야기로 공감과 위안이 됐으면 했다"는 것이다.
자칫 왜곡될 수도 있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는 만큼 제작 단계에서 고민이 컸던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 주인공 송우석(송강호)에 대한 캐스팅이었다"고 최 대표는 전했다.
그는 "신뢰도 높은, 가장 대중적인 배우가 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오마주로 비쳐지지 않고 누구나 공감하는 상식적인 이야기로 다가가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고 설명했다.
최 대표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배려가 아닌가 싶다. 배려 자체가 상식 아닌가"라며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대할 때 한 번만 남을 생각한다면 나보다 아픈 사람을 찾아보게 되고, 나를 돌아보게 될 듯싶다. 내가 소리치면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의 입장도 있다는 것. 누구보다도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 점을 잘 알았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변호인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 상업영화를 대하는 자세도 변했다는 그다. 최 대표는 "상업영화는 쉼표, 고급요리가 아닌 주막에서 파는 국밥 같다"며 "대중을 가르치려 하기 보다는, 웃고 울 수 있는 계기를 통해 위안을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로서 평소 쉽게 말하지 못하는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도 필요한데, 이 때도 대중이 쉽고 편하게 공감할 수 있는 언어를 고민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 "일한 만큼 권리를"…상식의 세상을 위한 '또 하나의 약속'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한 장면. (사진=㈜에이트볼픽쳐스 제공)
또 하나의 약속(제작 ㈜에이트볼픽쳐스)은 평범한 한 가족이 거대 기업의 부조리에 맞서면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2007년 스물셋 나이에 세상을 등진 고 황유미 씨의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영화는 2월 개봉 당시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 측이 상영관을 내 주지 않아 외압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또 하나의 약속을 연출한 김태윤 감독은 "한국 사회가 보편적인 상식에 맞춰 돌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영화라는 마음가짐으로 준비했고 세상에 내놨다"고 했다.
그는 "기획 당시 투자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상업영화로 풀어야 하나라는 고민이 컸지만, 보다 많은 분들이 보시고 공감해 주셨으면 하는 입장에서 결정을 봤다"며 "이러한 맥락에서 관객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딸을 잃은 한 아버지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한국 사회 약자인 을의 모습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이가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인 황상기 씨라고 했다. 감독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는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대다수인 곳"이다. "권력을 가진 소수에 의해 대다수 사람들이 피해의식을 갖게 된 탓"이란다.
그는 "GDP, GNP를 강조하는 한국 사회에는 왜 행복해 하는 사람이 없을까. 모든 이들이 스스로 피해자라고 생각하면서 힘들고 암울해 하는 것 같다"며 "그것이 한국 사회가 가진 모순일 텐데, 백혈병에 걸린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모습은 사회적 모순의 집합체로 다가온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김 감독은 "노동한 만큼의 대가와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에 월급을 많이 받든 적게 받든 모두가 분노하고 힘들어 하는 듯싶다"며 "영화계에서도 다양한 영화가 나왔으면 한다. 1,000만 영화 한두 편 나오는 것보다 200만~300만 명이 드는 영화 4, 5편이 나오는 게 더 건전하지 않겠나"라고 반문했다.
◈ "거짓은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다"…진실을 좇는 '제보자'
영화 '제보자'의 한 장면. (사진=영화사 수박 제공)
제보자(제작 영화사 수박)는 모두가 진짜라고 믿게 된 것이 사실은 거짓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진실을 좇는 사람들의 분투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 르포 형식의 작품이다.
복제 배아줄기세포를 세계 최초로 추출했다는 논문을 허위로 작성해 국제적 망신을 샀던 2005년 황우석 사태를 스크린으로 옮긴 이 영화는, 10월 개봉 당시 175만 관객을 모으며 우리 사회가 당시 사건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연출자 임순례 감독은 이 영화의 키워드로 '진실'을 꼽았다. 임 감독은 "진실을 제보하고 알리려는 사람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의욕을 지녔는지를 묻고 싶었다"며 "이 부분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부족하다. 어찌 보면 건강한 사회 체계가 무너진 건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 진실을 알려는 사람이 부족해서인 듯싶다"고 전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실을 알리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상식인 만큼, 극중 상황을 통해 진실을 알리는 것이 이토록 힘겹다는 점. 그리고 진실을 알리는 것이 본분인 사람들조차 압력을 받는다는 점을 그리는 데 주안점을 뒀다고 임 감독은 설명했다.
그는 "지난 정권과 이번 정권에서 언론이 심하게 왜곡돼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데, 종편이 생기면서 더욱 극심해졌다"며 "진실이 아닌 정보를 대중들이 믿게 되고 국론이 분열된 데는 이 점이 가장 큰 요인으로 다가온다"고 꼬집었다.
이어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상식과 원칙이 통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에서 합의된 원칙이 상식대로 가야 희망이 있을 텐데, 권력자의 논리대로 모든 것이 휘둘리니 좌절과 절망의 연속"이라며 "일반 대중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정치와 언론인 만큼 이 두 가지 요소가 먼저 바로 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임 감독은 "상업영화는 기본적으로 대중의 기호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기에 사회적인 메시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며 "제보자의 경우 다큐멘터리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관심 있는 메시지를 녹여낸 것뿐이다. 결국 평가는 관객의 몫"이라고 전했다.
◈ "나만의 문제 아니다"…공감과 연대의 기록 '카트'
영화 '카트'의 한 장면. (사진=명필름 제공)
2007년 이랜드 홈에버 사태를 모티브로 한 영화 카트(제작 명필름)는 노동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첫 상업영화로 이름을 올렸다.
카트는 사측의 부당해고에 맞서는 대형마트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싸움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고용불안에 내몰리게 된 마트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합류, 엄마가 농성장에 발이 묶인 탓에 막막해진 생계를 잇고자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든 자식들의 처지까지 비춘다.
이를 통해 영화는 노동 문제가 특정 계급의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의 지속가능한 삶과 직결된 것임을 말한다.
카트는 개봉 당시 외화 강세로 상영관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뜻 있는 관객과 극장 측의 도움으로 개봉 한 달째 장기상영을 이어가고 있다.
카트를 연출한 부지영 감독은 이 영화의 키워드로 '공감'과 '연대'를 꼽았다. 고용불안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소시민만의 공감과 연대가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부메랑을 맞게 될 상위 몇 %의 사람까지 상생을 고민해야만 하는 공감과 연대라는 것이 부 감독의 설명이다.
부 감독은 "카트 속 인물들은 노동운동을 하지만, 시작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며 "다시 말하면 지금 노동운동을 하시는 분들의 싸움 안에 우리 모두의 모습이 담긴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노동문제가 갈수록 변방에 위치해 가고 있는 현실을 꼬집었다. "노동이 먹고 사는 중요한 문제임에도 단순히 양적인 생활 수준이 높아졌다는 이유로, 특별하고 지엽적인 문제처럼 치부되고 있다"는 것이다.
부 감독은 "전 지구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우리를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나눠 경쟁시키고 약자인 을과 병이 갈수록 많아지는 사회인데도 노동문제가 마치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소외받고 있다"며 "영화는 현실을 트렌드하게 읽어내야 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할 경우 결국 대중에게 다가가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지금 시점에 카트를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