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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 차 쌍둥이' 유재학의 핀잔과 양동근의 엄살

스포츠일반

    '18살 차 쌍둥이' 유재학의 핀잔과 양동근의 엄살

    [임종률의 스포츠레터]

    '감독님 말대로 했잖아요' KBL 최초로 통산 500승을 거둔 유재학 모비스 감독(오른쪽)의 대기록은 현 주장 양동근이 없었다면 이뤄질 수 없었을지 모른다. 현역 생활을 조기에 접은 유 감독에게 양동근은 아쉬움을 씻어주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자료사진=KBL)

     

    밸런타인 데이였던 지난 14일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다름아닌 프로농구 울산 모비스 관계자의 발신이었습니다. 15일 경기에 취재를 오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2014-2015 KCC 프로농구' 울산 모비스-서울 SK의 시즌 최종전. 이날 경기는 1, 2위의 맞대결로 정규리그 우승의 향방이 결정될 수 있는 일전이었습니다. 이것보다 유재학 모비스 감독(52)의 역대 최초 개인 통산 500승이 걸린 역사적인 경기이기도 했습니다.

    당초 이날은 휴식일로 취재 계획이 없었습니다. 14일 근무를 한 까닭에 주말 하루는 쉬어도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초등학교에 입학할 아이의 유치원 졸업식 옷을 장만할 요량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로농구(KBL) 역사에 남을 경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계획을 바꿨습니다. 아내의 원망을 뒤로 한 채 서둘러 울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탄 KTX 칸은 유아 전용으로 아이들이 한가득이었습니다. 앳된 비명과 울음이 난무하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제 아이를 떠올리는 가운데 열차는 하릴없이 결전지로 향했습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부푼 기대를 안고 도착한 울산 동천체육관.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심드렁했습니다.

    유재학 감독은 경기 전 개인 통산 500승과 관련한 저의 첫 질문에 대번에 핀잔을 줬습니다. 선두권 경쟁과 개인 대기록 중 어떤 것이 더 신경이 쓰이냐는 물음에 유 감독은 오랜만에 울산을 찾은 저에게 "질문의 수준이 저렇다"는 농반진반으로 저를 무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500승은 감독을 오래하면 누구나 이룰 수 있다"는 것. 또 "그것보다 정규리그 우승이 걸린 오늘 경기 승리가 더 중요하다"는 답변이었습니다. 대우 제우스(현 전자랜드) 시절부터 17년째 사령탑을 맡아온 현역 최장수 감독인 만큼 개인 기록에는 달관한 모양새였습니다.

    '감독님의 500승을 위해서' 모비스 가드 양동근이 15일 SK와 홈 경기에서 질풍같은 드리블로 상대 코트를 휘젓는 모습.(자료사진=KBL)

     

    공교롭게도 이런 반응은 모비스 주장 양동근(34 · 181cm)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경기 전 몸을 풀던 양동근은 10년 이상 함께 한 유 감독의 대기록이 걸린 경기에 대해 "500승이 걸려 있는지 몰랐다"면서 "주위에서 얘기를 해서 얼마 전에야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어 "그것보다 정규리그 우승이 걸려 있어 이기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어쩜 이렇게도 사제가 똑같을까요? 지난 2004-05시즌 모비스 사령탑에 오른 유 감독은 당시 입단했던 양동근을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 10년 넘게 한솥밥을 먹으면서 강산이 변하도록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그 세월, 둘은 4번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이루며 찰떡 호흡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동화된 것일까요? 닮아도 너무 닮았습니다. 개인 기록보다는 팀의 안녕을 염려하는 그 자세 말입니다.

    물론 대기록이 신경쓰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양동근은 유 감독의 대기록 달성 여부에 대해 "이뤄드리고는 싶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면서 함께 농구화 끈을 조여매던 상대 에이스 김선형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더니 이날 양 팀 최다인 22점(6리바운드 5도움)을 몰아치며 70-60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유 감독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하는 활약이었습니다. 승부처였던 2쿼터만 7점에 도움 3개를 기록하며 흐름을 모비스 쪽으로 가져왔습니다.

    사실 양동근은 경기 전 "시즌을 치르면서 정말 한 해, 한 해가 힘들다"면서 "이제 은퇴할 때가 왔다"고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30대 중반, 베테랑이 된 양동근은 "체력적으로 정말 한계가 오고 있다"면서 옆에 앉아 있던 27살 한창 나이인 김선형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정작 경기가 펼쳐지자 양동근은 27살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공격에 수비에 리바운드, 3점포와 레이업슛까지 게다가 스핀 무브도 가리지 않았습니다.(경기 후 스핀 무브는 생각 없이 그냥 했다고 합니다.)

    이날 겨우 59초만 쉬었습니다. 이틀 전 양동근은 전주 KCC 원정에서 40분을 다 뛰었습니다. 올 시즌 47경기 전 경기에 나와 평균 출전 시간이 35분 12초, KBL에서 가장 많이 뛰는 선수입니다. 이런 선수가 "힘들다"고 하니 엄살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감독님 이제 좀 웃으세요' 모비스 유재학 감독(왼쪽)이 15일 SK와 경기에서 이긴 뒤 양동근(오른쪽) 등 선수들과 통산 500승 기념 시상식에 나선 모습.(자료사진=KBL)

     

    경기 후 인터뷰에서 유 감독은 "동근이가 오늘은 감독을 위해 열심히 뛴 것 같다"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어 양동근의 농담섞인 은퇴 발언을 전해듣자 "누구 마음대로 은퇴하냐"면서 펄쩍 뛰었습니다. 신인 때부터 담뿍 쏟아부었던 제자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대목.

    양동근도 유 감독 인터뷰 다음에 기자회견장에 나와 화답했습니다. "감독님처럼 되고 싶다"고 운을 뗀 양동근은 "그래도 혹독하게 훈련시킨 유 감독이 미운 적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런 적은 전혀 없다"면서 "우리가 훈련을 많이 한다고 하지만 다른 팀보다 오히려 적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이어 "내가 잘 되라고 하는 훈련"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유 감독은 양동근에 대해 "내가 일찍 은퇴했는데 동근이를 보면서 위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양동근이 유 감독의 페르소나인 셈입니다.

    대한민국 농구 최고의 지도자와 당금 KBL 최고의 가드가 연출한 훈훈한 드라마. 둘의 앙상블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합니다. 휴일을 포기하고 단행한 출장이 전혀 아깝지 않았던 역사적인 장면이었습니다.

    p.s-이날 경기 후 기자단과 회식에서도 유 감독은 "동근이는 내가 얘기한 것을 정말 모두 받아적는 아이"라면서 "언제 은퇴할지 모르겠지만 지도자로서도 대성할 수 있다"며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이어 "동근이는 내가 모비스에 남아 있는 한 외국 코치 연수를, 허투루가 아니라 정말 제대로 받게 해달라고 구단에 요청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둘이 지도자로서 맞대결을 펼칠 날이 올 수 있을까요? 정말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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