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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50대들의 대화 "한번 속았으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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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50대들의 대화 "한번 속았으면 됐지…"

    (이미지=스마트이미지 제공)

     

    “고교시절 일간지 사설을 스크랩하는 취미가 있었어요. 매일 가위를 들고 사설이 실린 부분을 오렸는데, 당시(1978년) 일간지는 세로 조판이고 사설란은 모두 2면 상단에 배치돼 있었지요. 그런데 사설을 스크랩하기 위해 가위질을 하다 보니 반대쪽 1면에 실린 사진이 문제였어요.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였냐고요? 십중팔구는 박정희 대통령이었지요. 나는 가위질로 대통령 얼굴이 토막 나거나 귀나 턱이 잘려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설을 오릴 때마다 반대쪽 1면을 확인했어요. ‘대통령 각하’의 사진이 나온 날에는 가위 방향을 빙 돌려 사설을 오렸어요. 그 때문에 네모반듯해야 할 스크랩의 오른쪽 면은 늘 삐죽하게 튀어나오기 일쑤였지요.”

    “아! 그랬군요. 고교 2학년 학생이 매일 일간지 사설을 스크랩해서 읽었다니까, 학구열이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네요. 그런데 고등학생이 대통령 사진을 애지중지했다니, 학습효과가 대단하긴 했었지요?”

    “그런데 말이죠… 어느 날 대학생이었던 누나가 우연히 스크랩해 놓은 사설 뭉치를 보더니 황당하다는 듯 웃더군요. 어린 동생의 사설 읽기가 기특해서가 아니라, ‘기가 막힌다’는 뉘앙스로 다가오더군요.”

    “당신의 누나는 ‘우상’과 ‘이성’을 분별할 수 있는 대학생이었으니까 그럴 수 있었겠지요?”

    “2년 후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비로소 누나의 황당해하던 웃음을 이해할 수 있었지요. 그 순간, 스스로 어찌나 부끄럽고 무안했는지… <유신>이라는 거대한 ‘우상’을 볼 수 있게 된 거죠.”


    60~70년대 화끈한 박치기로 전국민에게 통쾌한 기쁨을 줬던 프로레슬러 고 김일씨의 영정사진 (사진=자료사진)

     

    “1970년대 전 국민을 열광시킨 프로레슬링 영웅, 박치기왕 ‘김일’ 생각나죠?”

    “우리가 초등학생일 때지요. 시합이 열리는 날이면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온 마을 장정들과 꼬마들까지 TV가 있는 이장님 집에 몰려가 손에 땀을 쥐고 응원했었지요.”

    “그처럼 열광했던 프로레슬링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진 거 아세요?”

    “씁쓸한 이야기죠. 누군가가 ‘저거 다 쇼란다!’ 이 한마디에 ‘에이!’ 하는 실망을 넘어 절망이 깔린 한탄이 터져 나왔지요. 그리고는 박치기왕 ‘김일’도 당수왕 ‘천기덕’도 모두 잊혀지기 시작했지요.”

    “박치기왕 ‘김일’이라는 ‘우상’이 깨지던 순간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지요.”

    “저도 TV를 통해 레슬링 시합을 봤던 세대인데, 쇼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링 위에서의 처절한 사투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온 정신을 빼앗겼어요. 박치기왕 ‘김일’은 우리 모두의 우상이었으니까요.”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12일 세종시 정부청사 교육부에서 가진 역사교과서 발행체제 개선방안 기자회견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 전환을 공식 발표하고 있다. (사진=윤성호 기자)

     

    “요즘 국정교과서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지요. 역사를 보는 시각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통일하겠다는 국가의 발상 같은데, 이 소식을 접하니까 당신이 들려준 고교시절 ‘사설 스크랩’ 비애와 나의 초등학교 시절 ‘박치기왕 김일’이 가져온 한탄이 떠오르네요.”

    “우상을 만드는데 가장 좋은 재료가 교과서라서 그렇겠지요?”

    “학생시절에 배운 역사는, 특별한 전환점이 생기지 않는 한 그 사람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죽을 때까지 일관되게 갖고 갈 수 있게 하잖아요. 무덤에 묻힐 때까지요.”

    “당신처럼 고고시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학습’이 대학생이 되면서 전환되는, 그래서 올바른 역사관을 갖게 되면 다행이지만, 또 다른 당신들은 그 시절 교육받은 내용들이 뼛속 깊이 이데올로기로 이식되어 50대 중년을 살고 있는 거지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박치기왕 김일의 레슬링이 쇼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모두가 등을 돌린 것과는 어떻게 다를 까요?”

    “스포츠나 게임은 즉물적이고 감정적이지만, 역사는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사고를 통해 결정되거나 변환되는 것이잖아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는 저마다 자기 논리를 구축하기 때문에 한번 우상으로 인식되면 벗어나오기가 어렵다는 점이 레슬링과 다르겠지요.”


    새누리당 한국사 국정교과서 홍보 현수막의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15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 대통령 기념 도서관에 박 전 대통령을 찬양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사설 스크랩 시간의 대통령이라는 ‘우상’과 박치기왕 김일의 ‘우상’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이야기가 국정교과서 부활이라는 화두와 묘하게 연결되네요.”

    “교과서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우상’이 되는 게 아닌가요? 얼핏 떠오르는데요, 깨어진 우상 가운데 교과서에 실린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가 있어요. 이것을 리영희 교수가 바로잡았는데요. 리 교수는, UN은 <대한민국은 선거가="" 실시된="" 남한지역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 만을 선언했다는 사실을 밝히며 ‘교과서 우상’을 향해 돌을 던졌어요.”

    {RELNEWS:right}“그러니까 ‘대한민국은 UN이 승인한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는 교과서 기술은 잘못이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프레임만으로 만들어진 역사교과서는 ‘우상’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봐야겠지요.”

    “이러다가 십 수 년 뒤 우리 손자들이 대통령 얼굴이 실린 신문을 오려내지 못하는 날이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닐까요?”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는 댔어요.”

    “한번 속았으면 됐지 또 속겠어요!”

    “아휴! 올해는 가을이 언제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나라가 조용할 날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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