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로 조선의 4번 타자' 19일 일본과 '2015 WBSC 프리미어12 ' 4강전에서 9회 천금의 역전결승 2타점 적시타로 짜릿한 1점 차 승리를 이끈 한국 야구 대표팀 이대호.(자료사진=윤성호 기자)
사실 이번 레터는 지난 11월 11일 일명 '빼빼로 데이'(공교롭게도 롯데 생산 과자 이름이네요)에 쓸까 하다 접었습니다. 한국 야구 대표팀이 도미니카공화국에 10-1 대승을 거둔 다음 날 부칠까 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일단 참았습니다.
그러길 참 잘했다고 스스로에게 참으로 오랜만에 칭찬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마침내 가장 감격스러운 때를 위해 인내한 게 새삼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물론 절대 제가 자랑스러워서가 아니라 이른바 '조선의 4번 타자'가 절체절명의 찰나에 존재감을 위대하게 뽐낸 그 장면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는 판단에서입니다. 여간해서는 제 평생에 지워지지 않을 그 환희의 순간 말입니다.
'빅 보이' 이대호(33) 얘기입니다. 대한민국 4번 타자가 일본 야구의 심장에 꽂은 그 한방을 위해 한국 타선의 물꼬를 튼 한방을 날렸던 도미니카공화국과 예선전은 그저 예열에 불과했나 봅니다. 이대호는 19일 도쿄돔에서 열린 '2015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프리미어12' 숙적 일본과 4강전에서 9회 극적인 역전 결승 2타점 적시타로 4-3 짜릿한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2015년 11월 19일, 한국 야구사에 영원히 기록될 가장 감동적인 '도쿄대첩'을 일궈낸 이대호. 시계를 강산이 한번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2005년으로 돌려 23살 풋풋한 청년이던 이대호가 감히, 아니 자신있게 내뱉었던 10년 전의 약속을, 10년 뒤 영웅이 될 자신을 위해 그토록 혹독하게 육신을 닦달했던 다짐을 여러분께 살짝 들려드릴까 합니다.
▲10년 전 아직은 미완의 대기였던…10년 전 이대호는 프로야구 롯데의 떠오르던 타자였습니다. 2004년 처음으로 풀타임 주전으로 뛰면서 26홈런 68타점으로 가능성을 인정받은 뒤 2005년 16홈런 80타점으로 타자로서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완의 대기였습니다. 2000년 캐나다 애드먼턴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일구고 이듬해 롯데에 입단한 이대호는 타자로 변신했지만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2002년 백인천 전 감독의 혹독한 체중 감량 훈련에 무릎 반월판 연골이 파열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때가 있었나?' 롯데 시절이던 이대호가 2004년 시즌을 앞두고 팬 사인회를 하는 모습.(자료사진=롯데 자이언츠)
이후 피나는 재활 끝에 롯데의 4번 타자로 성장했지만 2005년 당시 아직은 정상급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양상문 감독(현 LG 감독)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기회를 얻었지만 2005시즌 뒤 강병철 신임 감독이 오면서 이대호는 또 한번 검증을 받아야 했습니다.
때문에 이대호는 그 시즌 뒤 경남 양산 통도사 극락암에 머물며 혹독한 체중 감량 훈련에 돌입했습니다. 130kg이 훌쩍 넘었던 몸무게를 줄여야 타격이 더 살 것이라는 주위 지적에 따른 훈련이었습니다.
이대호는 당시 수시로 즐겼던 피자, 치킨 등 육식과 야식을 일체 끊고 절간 음식만을 먹으며 식이요법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두 달 가까이 인근 해발 1081m 영축산을 새벽같이 오르내리며 살을 빼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2005년 피나는 체중 감량 훈련당시 저는 스포츠 전문지 '스포츠투데이'의 롯데 담당 기자였습니다. 최고 인기팀 롯데의 4번 타자가 그토록 강훈련을 소화하고 있다는 소식에 데스크 회의에서는 담당 기자가 동행 취재를 하라는 지령이 떨어졌습니다.
이에 2005년 10월 하순 한창 진행 중이던 이대호의 지옥 훈련을 현장 취재하기 위해 양산으로 향했습니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직전 통도사에 도착한 저는 마침 영축산을 오르려던 이대호를 붙잡고 등정을 시작했습니다.
194cm의 장신에 130kg 가까이 나가는 거구의 이대호는 당시에도 참으로 빨랐습니다. 산등성이가 험하기로 소문난 강원도 양구에서 군 생활을 보낸 데다 평소 날래다고 자부하던 저로서도 무척이나 어렵던 난코스를 참으로 쉽게도 올랐습니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고 핀잔을 주던 이대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대한민국 최고 타자 될 거야!' 롯데 시절인 2005시즌 뒤 이대호가 혹독한 체중 감량 훈련 중의 일환으로 해발 1081m 영축산 정상에 오른 뒤 포효하는 모습.(자료사진=롯데)
울퉁불퉁한 산바위를 부여잡고 마침내 정상에서 바라보던 해돋이, 안개가 끼어 흐릿했지만 나름 새로운 희망을 찾기에는 충분했던 순간. 이미 익숙했던 이대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더 빠르게 하산했고, 통도사 입구에 이르니 어느덧 점심 무렵. 근처 식당에서 고기가 없는 산나물 비빕밥을 장재영 당시 롯데 트레이너와 함께 먹던 때가 떠오릅니다.
오후 잠깐의 휴식 뒤 1000m 고지 정복 못지 않은 웨이트 트레이닝과 타격 훈련을 마치면 해가 뉘엿뉘엿 기울었습니다. 어둠과 정적이 내려앉은 통도사 방 한켠에서 이대호는 지금의 아내이자 당시의 여자친구였던 신혜정 씨의 사진을 바라보며 죽음과도 같던 적막을 견뎠습니다.
▲10년 전 산사의 다짐과 약속 당시 이대호는 고역이나 다름없던 산사의 기나긴 밤을 두 달 가까이 견뎌냈습니다. 인터넷과 TV, 친구들과 모임 등 화려한 속세의 유혹을 끊고 원동력은 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가 되겠다는 일념이었습니다.
통도사 숙소에서 간신히 불빛이 내비치는 방 밖 마당에서 이대호는 끊임없이 방망이를 휘둘렀습니다. 그러면서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떠나려던 제게 했던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루 동안 이대호의 강행군을 취재하면서 녹초가 됐던 담당 기자에게 말입니다.
"행님요, 지금 정말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정말 많십니데이. 진~짜로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십니더. 그러나 지금 이렇게 하지 않으면요, 지는 언제 성공할지 모릅니더."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 2005시즌 뒤 이대호가 경남 양산 통도사 극락암에서 훈련을 소화하며 수행하는 모습.(자료사진=롯데)
그런 이대호에게 제가 할 수 있었던 말은 "대호야, 지금처럼만 한다면 분명히 너는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다"였습니다. 피곤에 절어 비몽사몽 간이었지만 그 다음 이대호의 말은 분명히 기억합니다. "행님요, 제가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가 돼서 정말 다시 보입시더."
이후 이대호의 취침 시간이 돼서 저는 상경했고, 기사 작성 뒤 10월 말경 스포츠투데이의 지면에 기사가 게재됐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그 회사 생활 동안 그래도 가장 공들이고 문장이 잘 나왔던 기사가 아니었나 지금도 생각해봅니다.
▲빼어난 활약에도 더 돋보이는 선수가… 이후 이대호는 과연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로 성장했습니다. 2006년 이대호는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이뤘습니다. 타격과 홈런, 타점 등 가장 중요한 타이틀을 석권했습니다. 이후 2008년부터 4년 연속 롯데의 포스트시즌을 이끌었습니다.
특히 2010년에는 전인미답의 타격 7관왕을 달성했습니다.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 타이틀을 차지한 겁니다. 당시 이대호는 타율(3할6푼4리) 홈런(44개) 타점(133개) 안타(174개) 득점(99개) 장타율(6할6푼7리) 출루율(4할4푼4리) 1위를 석권했습니다. 정규리그 MVP에도 올랐습니다.
'다시 봐도 울컥' 이택근(왼쪽부터), 류현진, 진갑용, 이대호, 윤석민, 오승환, 장원삼 등 한국 야구 대표팀이 베이징올림픽 쿠바와 결승에서 우승한 뒤 기뻐하는 모습.(자료사진)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최고 타자로 보기에는 2% 부족한 듯한 평가였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팀 우승이 없어서였을 겁니다. 여기에 이대호는 동시대에 항상 거물급 선수들이 이목을 집중시키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이대호는 2006년에도 타격 3관왕에 올랐지만 MVP를 한화 류현진(현 LA 다저스)에게 양보해야 했습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도 이대호의 활약은 빼어났습니다. 일본과 예선전에서 값진 동점 2점홈런을 뽑아내며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는 4강전에서 결승 홈런을 터뜨린 이승엽(삼성)에게 집중됐습니다.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는 준우승에 힘을 보탰지만 주목은 동갑내기 친구 추신수(텍사스), '봉열사' 봉중근(LG) 등이 받았습니다.
해외로 진출한 2012년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2013, 14년 류현진이 메이저리그 신드롬을 일으켰고, 올해는 강정호(피츠버그)가 신선한 자극을 줬고, 추신수가 극적인 부활을 알렸습니다. 이대호는 오승환(한신)과 함께 일본을 정복하고도 다소 저평가된 해외파로 꼽혔습니다.
▲10년 만에 비로소 온전히 이뤄진 약속 이런 가운데 이대호는 10년 만에 비로소 진정한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로 우뚝 섰습니다. 선배 이승엽이 가고, 동기 추신수가 없는 가운데 또 후배 박병호(넥센)가 아직 최고의 반열에 오르기 전에 한국 대표팀을 이끈 기수로 나선 겁니다.
이대호는 11일 도미니카공화국과 프리미어12 B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이미 존재감을 뽐냈습니다. 0-1로 뒤진 7회 통렬한 역전 결승 2점 홈런을 뽑아내며 한국 타선의 물꼬를 텄습니다. 일본과 개막전 0-5 완패로 힘을 잃었던 한국 타선은 이대호의 한방에 깨어나 10-1 대승을 일궈냈습니다.
올해 프리미어12에서 비로소 대한민국 최고 타자로 명실공히 우뚝 선 이대호.(자료사진=박종민 기자)
사실 이번 레터는 그때 기획된 기사입니다. 이승엽이 없는 가운데 박병호가 아직 국가대표의 부담감에 짓눌려 있을 때 중심 타자의 역할을 제대로 해낸 이대호를 조명하고픈 마음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10년 전 영축산의 다짐을 일궜다고 보기에는 미진한 감이 들어 아껴뒀습니다.
일주일여가 지나 이대호는 마침내 화룡점정을 이뤘습니다. 개최국 일본의 대회 우승을 위해 온갖 꼼수가 난무했던 가운데 통렬한 승리를 가져온 한방이야말로 이대호가 현재 '조선의 4번 타자'라는 명제를 확실하게 입증시킨 증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춥고 힘들었으며 배고팠던 2005년 경남 양산 통도사 영축산의 나날들. 이제 10년의 세월이 흘러 이대호는 자신의 다짐과 약속을 온전히 모조리 지켜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비로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호야, 10년 전 영축산의 다짐을 이제야 완전하게 이뤄냈구나!" 하고 말입니다.
p.s-사실 영축산 훈련 동행 취재 이후 이대호와 이렇다 할 교류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애석하게도 '스포츠투데이'가 이듬해 3월 말 폐간되면서 저도 지금의 회사로 옮겨왔던 까닭입니다. 스포츠 전문지에서 라디오 방송사로 이직하면서 현장에서 선수들을 자주 직접 만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저 간간히 프로야구 경기장에 나갔을 때나 베이징올림픽, WBC 등 국제대회에서 안면을 유지해온 정도였습니다.
더 슬픈 것은 그때 이대호와 함께 등반했던 영축산과 통도사에서 훈련했던 모습 등을 담은 사진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1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포털 사이트에서도 당시의 기사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스포츠투데이도 사라진 마당에 지면을 찾으려면 대형 도서관 신문 스크랩에서나 볼 수 있을 겁니다. (당시 정말 고생하셨던 사진 기자 선배께서는 혹시 갖고 계실는지도….)
'이게 벌써 10년 전 얘기구나' 이대호(왼쪽)가 2005년 롯데 시절 장재영 트레이너와 지옥의 영축산 등반 훈련 도중 꿀맛 휴식을 취하며 미소짓는 모습.(자료사진=롯데)
하지만 그때의 다짐은 비록 저 혼자일지 모르지만 온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대호는 이런 말도 했죠. "저는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가 될 테니 행님은 최고의 스포츠 기자가 되시라"고 말입니다. 이대호는 자신의 말을 온몸으로 실천했는데, 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이대호가 날린 천금의 결승타가 한없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퍼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는지….
비록 사진은 없지만 그 당시의 기사를 추억해봅니다. 어느 포털 사이트에서도 10년 전 기사를 찾지 못했는데 고맙게도 어느 롯데 팬께서 블로그(http://yagu4u.tistory.com/1079)에 올려놓으셨더군요.
이대호는 한국에서 못 이룬 우승을 일본에서 두 번이나 이뤄냈습니다. 올해는 일본시리즈 MVP에도 올랐습니다. 이제 야구 본토 미국 도전을 노리고 있는 이대호의 메이저리그 진출과 대한민국 대표팀의 프리미어12 초대 우승, 여기에 문득 떠오른 다음 달 개봉을 앞둔 영화 '대호'도 흥행이 잘 되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