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과 배우 그리고 제작사 및 투자·배급사. 한 편의 영화를 대표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영화 한 편이 나오기까지 거치는 손은 너무나 많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일을 다하는 숨은 영화인들을 찾아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정성진 감독이 시각 효과를 담당한 영화 '미스터 고'의 한 장면. 주인공 고릴라 링링은 덱스터 스튜디오의 자체 개발 프로그램으로 탄생했다. (사진='미스터 고' 스틸컷)
영화 '미스터 고'의 거대한 고릴라를 기억하는가. 야구 경기장 한가운데서 진짜 고릴라처럼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이 CG(컴퓨터 그래픽스)는 'VFX(Visual FX·시각적인 특수효과) 불모지'라는 국내 영화계의 오명을 벗기기에 충분했다.
'덱스터 스튜디오'의 정성진 감독은 당시 특수효과팀에서 시각효과를 담당해 이끌었던 감독이다. 그는 '미스터 고'로 제8회 아시아 필름 어워드 최우수시각효과상, 제19회 춘사영화상 기술상,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기술상, 제34회 청룡영화상 기술상 등을 휩쓸었다.
◇ 국내 VFX 업계, 中으로 활로를 모색하다개봉 2년이 지난 지금, 정 감독은 '덱스터 스튜디오'의 디지털 본부장을 맡아 VFX 작업 전반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지난해 영화 '해적' 속 각종 해상 전투 장면도 모두 이들의 손을 거쳤다. 아시아에서 최대 규모임을 자부하는 이 스튜디오는 최근 중국 진출에 힘쓰고 있다.
"지금 중국 영화 시장이 커지고 있어요. 북경 쪽에서 프로젝트 의뢰가 와요. 1~2주에 한 번 씩은 출장을 가는 것 같네요. 거기에서 영업도 하고, 일도 진행을 해야 되니까. 덱스터 스튜디오 북경 사무소가 있거든요. 거기에 작업자들도 있고, 프로듀서도 있고, 통역가 분들도 전부 있죠."
덱스터 스튜디오 디지털 본부에만 210명의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다. 더 나은 기술을 개발·연구하는 연구소와 함께다. 이런 거대 조직을 이끄는 정 감독에게도 '미스터 고'는 그 어떤 영화보다 특별하다. 실제 이 스튜디오에는 곳곳에 '미스터 고' 조형물과 포스터들이 걸려 있다.
"사실 한국 영화계는 장르가 한정적인 부분이 있죠. '미스터 고'가 CG를 이용해서 어떤 창조물이 나오는 최초 시도였으니까요. 물론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도 있었고, 봉준호 감독의 '괴물'도 있었죠. 그런데 그건 해외작업이었어요. 한국 영화로서는 이렇게 기술적으로 많이 투입한 게 '미스터 고'였거든요."
지난달 24일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 있는 '덱스터 스튜디오' 디지털 본부에서 정성진 VFX 감독이 CBS 노컷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시장의 크기다. 정 감독이 중국으로 눈을 돌리는 이유도, 그곳에서는 CG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꾸준히 제작되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는 한국 시장을 바라보기 때문에 영화 제작비가 클 수가 없어요. 물론 저희도 작업에 적극적으로 들어가기는 하는데, 블록버스터처럼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거든요. 할리우드의 경우 1천억~2천억 원 하는 제작비에 VFX 예산이 절반 정도 들어가요. 시장이 커지면 당연히 그렇게 됩니다. 중국 역시 자국 시장이 크니까 블록버스터를 계속 만드는 거예요. 한류가 있듯이 영화 쪽도 아시아 시장이 커질 수 있다고 봐요."
그렇다면 중국에서 굳이 한국 VFX 감독들을 찾는 이유는 뭘까. 정 감독에 따르면 중국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이야기의 스펙트럼이 넓고, 장르가 다양하다. 영화 시장 역시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이에 비해 자국 기술은 부족한 실정이다.
"거기는 이제 시작이에요. 한국 VFX는 한국 영화를 작업하면서 성장했으니 중국보다는 한국인들이 기술을 더 많이 갖고 있고 잘하거든요. 그래서 인기가 많은 거죠. 자국 기술이나 VFX 기술이 별로 없으니까 많이 찾아요. 저희도 한국 영화를 하기는 하는데 그 쪽에서 의뢰가 많이 들어오니까 초점을 맞추는 것도 사실이고요."
사실 아직도 국내 관객들 사이에서 CG는 '애증의 대상'이다. 영화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면서도 할리우드의 화려하고 정교한 CG와 비교해 'CG인 것이 티가 난다', '어색하다' 등 비판을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나름의 업계 사정이 있다.
"욕을 먹을 수 있다고 봐요. 일단 관객들은 영화 제작비가 얼마인지는 관심이 없거든요. 예를 들어 제작비가 5천 억 원에 육박하는 '아바타'와 100억 원짜리 한국 영화를 비교하면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저희도 그만큼의 돈과 시간을 주면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미국은 영화의 역사가 긴 나라고, 기술적인 것도 필요하긴 하죠. 거꾸로 뒤집어보면 저희는 가격 대비 성능은 최고예요. 그 정도 비용으로 버금가는 것들을 만들어왔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살아 남았어요. 이런 치열함이 경쟁력이 아닌가 싶어요. 할리우드와 저희를 비교하는 건 사실 체급이 다른 사람과 권투를 해서 졌는데 '넌 왜 졌느냐'라고 하는 것과 비슷해요. 물론, 우연일 수도 있지만 머리를 잘 쓰면 가끔 라이트급 선수가 슈퍼 헤비급을 이길 때도 있죠."
지난 1977년 개봉한 '스타워즈 에피소드 4-새로운 희망'의 한 장면. 위와 같은 '스타워즈' 오리지널 시리즈의 우주장면들은 CG가 아닌 정교한 미니어처 모형들을 기반으로 제작됐다. (사진='네이버 영화' 캡처)
◇ 시각 효과=CG? VFX의 복잡한 속사정VFX에 CG가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영화계는 변화를 맞았다. 제작 방식은 물론이고, 제작비까지 절감되는 효과를 낳았다. 그런 의미에서 CG는 '복덩이'가 아닐 수 없다.
"25년 전부터 CG가 제작에 대거 도입되면서 영화 시장이 많이 변했어요. 예전에 콘티를 그리던 것도 가볍게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도 하고, 배우들은 모션 캡처라는 기술 속에서 연기를 하고, '프리 비주얼'이라고 촬영 전에 시뮬레이션을 만드는 것도 있어요.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촬영해야 하는 장면이 있다면 크로마키(색상 차이를 이용하여 움직이는 피사체를 다른 화면에 합성하는 기법)를 이용해서 프랑스 풍경을 합쳐요. 진짜 프랑스에 가는 시간과 비용이 절감되는 거죠. 관중들이 모인 장면도 예전에 그만큼의 인원을 동원해야 됐다면 지금은 100명에서 200명 정도면 충분해요.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는 거의 대부분 특수효과로 제작된 것들이에요. '해적' 같은 경우도 해상 전투 장면은 바다에서 촬영을 한 적이 없어요. 산 속에 배를 만들어 놓고 바다를 합성한 거죠."
이전보다 CG가 관객들에게 친숙해진 것은 사실이다. 예전에는 영화를 개봉할 때, 새로운 CG를 도입한 것을 광고했다면 이제 오히려 CG를 사용하지 않고 촬영했다는 것이 마케팅 포인트가 될 정도다. 영화 '매드맥스'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지만 정 감독이 보기에는 '매드맥스' 역시 곳곳에 CG가 사용된 영화란다. 그는 문화적 융성기인 199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내며 CG가 전격 도입된 VFX에 눈을 떴다.
"우리나라는 인프라가 좋아서 IT나 네트워크 발전이 빨랐죠. 컴퓨터를 접한 속도가 정말 빨랐고,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고요. 제가 신세대, 엑스세대인데 당시 새로운 문화들이 한국에 집중적으로 들어오던 시절이었어요. 저도 그런 문화 콘텐츠를 많이 접했었죠. '응답하라 1994'가 딱 제 대학시절 이야기입니다. 문화를 새로 만든 세대라고나 할까요. 전공은 미술이었어요. 그런데 게임이나 이런 것에 관심이 많았죠. 요즘 말로 하면 '덕후'였어요. 자연스럽게 영화나 영상 쪽에도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전까지만 해도 컴퓨터 그래픽은 연산작업 정도로 약한 상황이었는데 그 때가 컴퓨터 그래픽스의 태동기였거든요. 그걸 해보자고 생각하게 된거죠."
컴퓨터 그래픽스, 즉 CG가 VFX의 전부는 아니다. 미국 VFX의 발전사 그 자체인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 오리지널 시리즈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SF 영화들은 컴퓨터를 이용하지 않은 VFX 작업을 거쳐 만들어진 영화다. 고전 명작으로 꼽히는 '벤허' 역시 그렇다. 생각보다 광범위하게 영화는 VFX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VFX라는 말은 시각 효과잖아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걸 CG로 알고 있더라고요. '스타워즈' 오리지널 시리즈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SF 영화, '벤허'처럼 컴퓨터 없이 VFX가 들어간 영화들이 많아요. 특수촬영과 결합해 우주공간과 과거공간을 재현하는 거죠. '스타워즈'에서는 미니어처 특수촬영을 했었고요. 점점 VFX가 발전하다가 도구로 컴퓨터를 이용해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만약 컴퓨터로 하는 것보다 진짜 폭발하는 것을 찍는 게 낫겠다고 하면 그렇게 가요. 원하는 샷을 상상하는 거죠. 여기에는 실제 배우가 필요하고, 외계인이 걸어다니는데 CG로 할까 아니면 리모콘으로 움직이는 로봇을 쓸까. 이 모든 게 VFX입니다."
지난달 24일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 소재한 '덱스터 스튜디오' 디지털 본부에서 정성진 VFX 감독이 CBS 노컷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그래서 VFX에는 어떻게 촬영하는 것이 좋을지, 어떤 제작 방식이 가장 실감날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를 위해서 '한계'를 겪는 경험은 필수다.
"저희가 촬영을 직접 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현장에서 촬영에 대한 노하우와 방법은 배워야 해요. 특히 컴퓨터 그래픽스와 카메라, 혹은 다른 특수효과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공부해야 됩니다. 욕도 들어 가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더 발전시켜야 할 것을 알아가는 거죠."
정 감독의 최종 목표는 'VFX 명가' 할리우드 시장으로의 진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을 넘어서 새롭고 독창적인 VFX 기술이 필요하다. 그 스스로도 미술을 전공했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만 있어서는 불가능한 꿈이다. 그래서 덱스터 스튜디오 디지털 본부에는 전도 유망한 공학도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결과적으로 VFX는 공학 기술과 예술의 결합이다.
"'미스터 고' 당시에 고릴라 캐릭터의 피부와 털은 저희가 내부에서 직접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만들었어요. 할리우드 VFX 회사들도 그들만의 독자적인 프로그램이 있고 계속 개발하고 있습니다. 직접 개발한 프로그램은 어떤 문제가 생겨도 그 문제를 찾아내는 게 빨라요. 노하우도 필요하겠지만 효율적인 일처리가 가능하려면 기술 개발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학력의 능력있는 천재 공학도들이 필요하고요. 사실 대기업 가면 정말 좋은 연봉 받고 일할 수 있는 실력자들인데 그들 모두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함께하고 있어요.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좋아지도록 더 노력해야죠. 컴퓨터 그래픽 산업 끝단에 있는 것이 저는 VFX라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