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녹슬지 않았어." 2013년 올스타전에서 현역 못지 않은 기량을 뽐낸 허재 전 KCC 감독. (사진=KBL 제공)
[90년대 문화가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토토가'는 길거리에 다시 90년대 음악이 흐르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90년대는 스포츠의 중흥기였습니다. 하이틴 잡지에 가수, 배우, 개그맨 등과 함께 스포츠 스타의 인기 순위가 실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렇다면 90년대 스포츠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병신년(丙申年)인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1991년 오늘로 돌아가보려 합니다.]
겨울스포츠인 남녀 프로농구가 한창입니다. 남자프로농구(KBL)에서는 모비스가 선두를 달리고 있고, 여자프로농구(WKBL)에서는 우리은행이 순위표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여전히 인기 있는 겨울스포츠지만, 사실 그 인기가 1990년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프로로 전향하기 전, 흔히 말하는 농구대잔치 시절이 농구 인기의 전성기가 아닐까 싶네요.
25년 전 오늘. 그러니까 1991년 1월2일에도 농구대잔치가 한창이었습니다.
특히 오늘은 1990년 농구대잔치 1차대회 결승전이 치러졌는데요. 당시에는 1차대회, 2차대회, 3차대회를 거치면서 하위팀들이 차례로 떨어지는 방식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살아남는 팀이 4차대회(챔피언결정전)를 치르는 방식이었죠. 챔피언결정전 진출팀은 각 대회 순위에 따라 점수를 받아 최종 합산하는 방식으로 가렸습니다. 그만큼 1~3차 대회 성적이 중요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1차대회 결승전에서는 모비스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기아자동차와 군인 정신을 앞세운 상무가 맞붙었습니다.
당시 기아자동차는 우승 후보로 꼽히지 않았습니다. 물론 멤버는 여전히 화려했습니다. 한기범, 김유택으로 이어지는 더블 포스트에 허재, 강정수 등 정상급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다만 한기범이 무릎 수술로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고, 유재학 역시 은퇴했습니다. 무엇보다 1990년 4월 코리안리그 1차대회에서 전패하는 등 내분으로 인해 방열 감독이 물러났고, 최인선 코치가 지휘봉을 잡고 출전하는 등 어수선한 상태였습니다.
상무는 기아자동차에서 뛰다가 입대한 강동희를 비롯해 최병식, 이영주, 김대의, 이훈재 등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 됐습니다. 물론 당시 상무는 키 제한으로 장신 센터를 수급하지 못해 기아자동차 같은 장신 팀을 만나면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실업농구 시절 기아자동차.
하지만 기아자동차는 1988년, 1989년 농구대잔치 우승팀다운 저력을 보여줬습니다.
전반을 50-37, 13점 차 여유 있는 리드로 마쳤는데요. 후반 강동희가 친정팀을 상대로 맹활약하면서 10분을 남기고 64-61, 3점 차로 쫓기기도 했습니다(강동희는 1차대회 후 전역해 2차대회부터는 기아자동차 유니폼을 입고 뜁니다). 하지만 '농구 대통령' 허재가 연속 3점포로 승기를 잡았고, 결국 97-81로 승리합니다.
"역시 허재"라는 말만 나오는 활약이었는데요. 허재는 38점에 11리바운드, 9어시스트, 5스틸, 2블록의 트리플 더블급 활약을 펼치며 상무를 잠재웠습니다. 최우수상은 당연히 허재의 몫이었습니다. 김유택 역시 25점, 1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고공 농구의 진수를 보여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