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뉴스의 '뒤끝작렬'은 CBS노컷뉴스 기자들의 취재 뒷 얘기를 가감없이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전방위적 사회감시와 성역없는 취재보도라는 '노컷뉴스'의 이름에 걸맞은 기사입니다. 때로는 방송에서는 다 담아내지 못한 따스한 감동이 '작렬'하는 기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사진=트위터 화면 캡처)
일본 구마모토(熊本) 지진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아픔을 공유하며 아낌없이 성원을 보냈던 2011년 동일본 지진 때와는 크게 다르다.
말할 것도 없이 아베 정권의 퇴행적 역사인식 때문이다. 아베 정권은 과거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부정 또는 미화하며 우경화 길을 내달리고 있다. 옛 영화를 되살리려는 듯한 모습에 주변국의 우려는 커져만 간다.
이번 지진으로 일본이 자랑하는 구마모토 성채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선뜻 안타깝다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구마모토 성은 임진왜란 때 함경도까지 진격하며 악명을 떨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지었다. 축성 과정에서도 수많은 조선 포로들의 희생이 있었을 것이다.
구마모토는 약 300년 뒤 우리 민족과 또다시 피의 악연을 맺는다.
고종의 왕비 명성왕후가 궁궐에 난입한 일본 낭인들에게 참혹하게 시해 당한 것이다. 1895년 10월 벌어진 을미사변이다.
일설에 따르면 이들은 명성왕후를 옷을 벗겨 칼로 찌르고 번갈아가며 욕을 보인 뒤 불에 태우는, 필설로 옮기기 힘든 만행을 저질렀다. 동서고금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야만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이들 시해범의 출신지가 대부분 구마모토다. 구마모토는 정한론 주창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위시해 조선 병탄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을 배출한 야마구치(山口)와 붙어있다. 야마구치는 아베 총리의 지역구이기도 하다.
넓게 보면 이들 지역은 고대로부터 현해탄 건너 한반도에서 문명이 전해져온 통로였다. 이런 지리적 이점은 오히려 나중에 은혜를 원수로 갚는 쪽으로 활용됐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출병기지였던 가라츠(唐津)가 구마모토와 지척인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이번 지진 사태를 계기로 새삼 부각된 사실이 또 있다. 지난해 구마모토 등 규슈 지방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280만명 가운데 한국인이 절반이나 되는 점이다.
거리가 가까운데다 엔저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불편한 관계 속에서도 경제·문화 교류는 지속해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싸늘해졌는데 우리만 속없이 허허 거리며 일본을 찾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다. 일본 내 한류는 시들다 못해 '혐한류' 시위로까지 악화되고 있다.
정부의 대응도 속 터지기는 마찬가지다. 외교부는 12.28 위안부 협상 타결에 이어 1월 초 북핵 사태가 터진 이후로는 대일 비판에 매우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물론 북핵 해결이 지상과제인 만큼 대북공조 차원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한 현실은 인정된다. 문제는 이런 국면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지 알 수 없다는 것.
'역대 최강'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쉽게 굴복할 것으로 보는 이는 별로 없다. 일본은 이런 틈새를 이용해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고 우경화·군사대국화 로드맵을 착착 진행할 것이다.
그렇다면 북핵 문제가 풀릴 때까지 일본의 이런 역주행을 넋 놓고 지켜봐야만 할까?
아니다. 정부는 지금까지도 독도나 위안부 같은 영토·역사 문제를 안보·경제 문제와 분리 대응한다는 투 트랙 전략을 취해왔다.
이런 기조가 달라지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북한 비핵화를 위해선 적극적 협조를 구하되 영토·역사 문제에선 보다 당당할 필요가 있다.
우리 외교 당국자들은 언필칭 일본을 우리 주변 국가 중 가장 비슷한 가치와 체제를 가진 우방국이라 한다.
하지만 아베 정권의 끊임없는 망언과 망동, 겉과 속이 다름을 보고 있자면 이런 시각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불과 100여년 전 이웃국가의 왕비를 잔혹무도하게 죽인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고도 아직까지 진정한 반성이 없는 나라다.
우방이란 말만 믿고 쓰린 역사를 잊는다면 언제고 다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된다.
구마모토 지진은 자연과 인간, 역사를 모두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