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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만든 '간첩'…죽어서야 낙인 지우다

사회 일반

    국가가 만든 '간첩'…죽어서야 낙인 지우다

    대법원, 간첩단 '몸통'으로 조작된 강우규 씨 무죄 확정

    1977년 3월 24일 경향신문에 보도된 재일동포 사업가 간첩 사건.

     

    수사기관은 제주 출신인 그를 북괴공작원이라고 했다. 언론은 신문에 거물급 간첩이 붙잡혔다고 대서특필했다. 중앙정보부는 '남한에 위장 기업체를 설립해 연고자를 중심으로 조직원을 포섭하고 지하세력을 구축하라는 지령을 받은자'라고 낙인찍었다. 그리고 1978년 2월, 그는 국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1917년 1월 제주도 중문에서 태어나 일본에 간 뒤 45년 만에 고국 땅을 밞은 사업가 강우규 씨. 국가는 강 씨를 유신정권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강 씨는 한순간 '재일교포 사업가 위장 간첩사건'의 몸통이 됐다.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

    강 씨는 11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1988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출소한 지 9년만인 2007년 일본에서 세상을 등졌다.

    재일교포 간첩단의 주범이라는 낙인은 지난 9일에야 지워졌다. 38년만에 대법원으로부터 무죄를 확정받았기 때문이다.

    대법원 3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뒤 사형선고를 받고 11년 간 옥살이를 한 강 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지하조직원으로 몰렸던 강 씨의 동생 강용규 씨와 직장동료 김추백, 김성기, 이근만, 이오생 씨 등 5명에게도 무죄를 확정했다.

    고문, 그리고 자백

    대법원 (사진=자료사진)

     

    강 씨 등 피해자들은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이유로 지난 1977년 2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수사관들에 의한 강제 연행이었다.

    강 씨의 동생과 직장 동료 10명도 함께 잡혀갔다. 이들은 수사실에 끌려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다. 구타가 이어졌고 잠도 자지 못했다.

    결국 강 씨 등은 수사관의 말을 토대로 거짓 진술을 했다. 강 씨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내로 잠입했고, 동료들이 강 씨에게 포섭돼 간첩활동비 등을 받았다는 것.

    결국 강 씨는 사형을 선고받고 나머지 피해자들에게는 징역과 집행유예가 내려졌다.

    이들 중에는 강 씨와 절친한 사이였던 제주교육대학 제1대 학장을 지낸 김문규 씨도 포함돼 있었다.

    김 학장은 간첩으로 몰린 뒤 지난 1982년 2월 경 서귀포시 월평동 해안에서 농약을 마신 뒤 절벽에서 추락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희대의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은 이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진실·화해위 통해 세상에 드러난 진실

    (사진=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재일교포 사업가 위장 간첩사건'은 지난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를 통해 다시 재조명됐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확정판결이 있는 사건에 대해 재심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해 조사를 할 수 있다'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 2조에 따라 2008년 해당 사건을 조사했다.

    진실화해위는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에 의해 불법 체포돼 장기간 불법 구금되고 이 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피해자와 유족들의 주장에 따라 사건을 규명했다.

    그리고 지난 2010년 국가에 가혹행위와 범죄사실을 조작한 점, 불법구금 행위에 대해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또 형사소송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재심 등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라고 밝혔다.

    진실화해위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이었던 조모 수사관은 "남산 지하조사실이라는 공포 분위기에서 추궁을 하며 뺨을 때리면서 윽박질렀다는 말은 들었었다"고 진술했다.

    나머지 수사관들은 고문 사실이 없었고 목격한 적이 없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진실화해위 조사내용을 토대로 마침내 피해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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