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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기자의 '밀정' 대해부…흥행 밝힌 8가지 단서



영화

    평론가+기자의 '밀정' 대해부…흥행 밝힌 8가지 단서

    영화 '밀정'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 일제강점기

    이명희 영화평론가(이하 이)>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다는 공식이 있다는데, 작년 여름 '암살'이 1,200만 관객을 동원해 공식을 깼다. 그 후 '귀향', '동주', '덕혜옹주', 그리고 '밀정'까지 일제강점기 역사는 한국 영화의 주된 소재가 됐다. '밀정'은 폭탄을 경성에 반입하려 하는 의열단과 그 조직을 궤멸시키려는 일본 경찰 사이에 벌어지는 모략과 암투를 첩보스릴러 장르에 대입했다. '스파이'보다 '밀정'은 더 한국적이고 시대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이다.

    유원정 기자(이하 유)> '밀정'은 개봉 5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했고, 추석 연휴에도 많은 관객들이 찾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대를 다루는 영화들이 여전히 관객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유효한 것 같다. 감독들 또한 그런 수요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꾸준히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아닐까.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과거 역사의 잔재들이 남아 있는 한, '암살', '귀향', '동주', '밀정' 등 우리의 아픈 역사를 조명하는 영화들은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 '팩션'(Faction)

    이> '밀정'은 '1923년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저자 김동진)이란 저술을 토대로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이 중심 모티브가 되어 의열단의 실제 이야기들을 엮었다. 실명은 모두 바뀌어 역사 왜곡의 혐의를 비껴 가지만, 황옥은 이정출(송강호 분), 김상옥은 김장옥(박희순 분), 김시현은 김우진(공유 분), 김원봉은 정채산(이병헌 분) 등, 의열단 독립투사들이 남긴 족적이 여러 인물들에게서 신화적 전형으로 되살아남으로써 역사이야기로 깊이 각인된다.

    유> 지금껏 여름에 개봉한 '팩션' 영화들이 역사 왜곡 논란을 피해가기 힘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실명을 바꾸고 '모티브'를 강조한 '밀정'의 선택은 훨씬 현명했던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김지운 감독이 훨씬 더 자유롭게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났다. 김장옥에서 김우진으로, 그리고 다시 이정출에서 대학생으로. 감독이 영화를 관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역사 속에서 한 영웅이 큰 뜻을 이루기 보다는 끊임없이 그 뜻을 이어가는 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화 '밀정'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 '암살'

    이> '암살'과 더불어 '밀정'의 성공은 실제 역사에 입각한 항일독립운동 영화라는 장르가 새롭게 구축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암살'이 장쾌한 액션 스릴러로 관객을 만족시켰다면, '밀정'은 누아르영화의 미학적 스타일과 섬세한 디테일의 분위기를 향유하게 함으로써 예술적 스타일 취향의 관객도 만족시키는 영화다. '암살'이 통쾌한 결말로 만족감을 준 대중적 장르인 반면, '밀정'은 더 사실적이다. 특히 주인공 인물의 내면 변화에 따라 드라마가 형성되기 때문에 전형적인 이야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 '밀정'의 특색이다.

    유> 동의한다. '암살'과 '밀정'은 뉘앙스 자체가 다른 영화다. 똑같이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라도 '암살'은 우리가 이루지 못한 친일파 처단 등 판타지스럽고도 시원한 부분들이 존재한다. 그런 점이 '암살'을 천만까지 도달하게 한 저력이라고 생각한다. '암살'의 독립운동이 당연히 개개인을 뭉치게 한 대의였다면, '밀정'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 '독립운동'이란 무엇이었을지 질문을 던진다. 어떤 이에게는 당연히 따라야 할 대의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딜레마일 수도 있다. '밀정'은 그것을 쉽게 정의하거나 뭉뚱그리지 않고, 개인의 판단과 변화에 집중한다.

    ◇ 김지운 감독

    이> '밀정'에 한껏 녹아있는 누아르 스타일은 특히 전반부에 지배적이다. 경성 장면부터 상하이 장면에 이르는 전반부 대부분이 누아르의 스타일을 강조하는 밤 장면이다. 상하이의 고풍스러운 골목, 낡고 퇴색한 벽과 건물들, 빗속의 은밀한 추적이 모두 빛과 어둠의 대조속에서 펼쳐진다. '제3의 사나이'(캐롤 리드 감독)의 장면처럼 명암이 이루어내는 멋지고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어둡고 폐쇄적인 실내, 창문 틀을 통해 감시되는 내부와 외부 등, 감시자와 피감시자의 시선을 통해 긴장을 고조시키는 누아르의 분위기가 김지운 감독의 장기인 디테일의 예술과 함께 영화를 지배한다. 디테일의 묘미와 조명의 예술은 영화의 절제된 리듬과 더불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아름다움도 연상시킨다.

    영화 '밀정'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유> 꾸밈새가 무조건 화려하거나 과시적이지는 않았다. 전작 '악마를 보았다'나 '달콤한 인생' 등을 생각하면 김지운 감독 나름대로는 절제한 것이 아닐까. 특히 공간을 누구보다 잘 활용하는 김지운 감독의 장점이 잘 발휘됐다고 생각한다. '밀정' 속 공간은 마치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일본 경찰 이정출과 의열단 단장 정채산의 첫 만남 직전에 펼쳐지는 새벽의 상하이 골목은 차디찬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서로 믿지 못하는 이정출과 김우진의 심리, 정체를 알 수 없는 혼란 등이 하나둘씩 관객들을 스쳐 지나간다. 이정출이 김우진과 함께 정채산과의 만날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긴장감은 클라이막스에 이르게 된다.

    ◇ 기차

    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영화 전체에 펼쳐지는 능란하고 자유로운 공간 활용이 영화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다채로운 공간을 이토록 자유롭게 누비며 아름답게 보여주는 한국 영화는 드물다. 기차 안 풍경, 총독부, 클럽 내부 공간의 화려함도 인상적이지만, 독립투사들이 운신하는 숲속 허름한 창고나 방은 그들의 곤궁한 처지를 강하게 대립시킨다.

    유> 공간으로만 따지자면 영화의 허리를 담당하고 있는 기차 장면에 가장 감독이 공을 들였지 않았나 싶다. 의열단 단원과 일본경찰을 싣고 경성으로 달려가는 기차는 선택의 공간이자 결판의 공간이다. 어디로 물러설 곳이 없는 공간 성격 자체가 흡인력 있는 서스펜스를 형성한다. 숨고자 하는 의열단 단원들과 그들을 색출하고자 하는 일본경찰들은 쉼없이 동선이 엇갈리고, 이정출 역시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선택하는 순간에 놓이게 된다. 여기에서 감독은 밀폐된 공간들을 이용해 캐릭터들을 극한으로 몰아 넣는다. 이정출과 하시모토가 꽉 막힌 휴게실에서 나누는 대화에서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흐르고 끝내 이정출, 하시모토, 김우진 3인이 맞닥뜨리게 된 화려한 식당칸에서는 소품 하나까지도 시한폭탄을 향해 달려간다.

    영화 '밀정'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이> 중반부가 중국에서 경성으로 가는 기차 내부에서 펼쳐지는 암중비약에 할애되고 있다. 일본 경찰 하시모토와 의열단 리더 김우진, 하시모토와 김우진 사이를 오가는 이정출. 이들의 은밀하고 긴박한 움직임이 이중 삼중의 이야기구조를 만들고 서스펜스를 조성한다. 열차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근심어린 주인공의 얼굴에서 시작해 너른 평야를 가로지르는 열차의 장면을 한 컷으로 잡아내는 줌아웃 촬영이 특히 인상적이다. 활력적인 공간이동을 보여줌으로써 추후 경성에서 벌어질 파국으로 영화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긴박감과 기대감을 심리적으로 조성하는 데 성공하는 장면이다.

    ◇ 음악

    이> 체포될 위기를 피해 왕래하는 독립투사들의 동선은 루이 암스트롱의 멋진 재즈 선율 등 감미롭지만 무심한 음악과 대조를 이뤄 안타까움을 더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조명과 스타일은 누아르의 분위기를 벗어나 밝아진다. 그러나 의열단과 일본경찰의 대립은 더 치열해지고 고문과 살인, 폭파 등 차분하고 어둡게 시작된 영화의 색조는 후반부에서 뜨거워진다. 잘 알려진 음악인 라벨의 힘찬 볼레로가 통쾌한 거사장면에, 드보르작의 처연한 슬라브 무곡이 처연하고 쓸쓸한 느낌을 더한다.

    유> 장면과 어긋나는 음악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것들이 희극과 비극을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런 음악은 남발되지 않고, 서사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장면에만 사용된다. 의열단의 몰락, 경부 폭파와 배신자에 대한 처단 등 빠른 액션이 시각적으로 관객들을 자극하는 순간들이다. 그러나 김지운 감독이 선택한 우아하고 다소 고전적인 음악들이 그런 자극을 잠재우고, 비장한 느낌을 이끌어 낸다.

    영화 '밀정'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 이정출 외 3인

    이> 송강호가 연기하는 주인공 이정출은 한때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나 변절하고 친일 매국노로 전락한 고위직 일본경찰이다. 그러나 '암살'의 염석진(이정재 분)나 '덕혜옹주'의 한택수(윤제문 분)와는 달리, 동포와 나라에 진 '마음의 빚'을 갚는 인물로 변해간다. 모리배에서 정의로운 영웅으로 변모하기까지 굴곡진 과정은 이분법적 대립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혼란을 통해서이다. 안티 히어로가 영웅이 되어가는 '밀정'의 이야기는 로셀리니 감독의 '로베레 장군'도 상기시킨다. 협잡꾼이 죽음을 마다않고 레지스탕스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이야기였다.

    유> 지금까지 유사한 영화의 캐릭터들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향해 돌진했다면 이정출은 첫 등장부터 체포되기까지 흔들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이정출이 정확히 어떤 계기로 다시 독립운동가의 길을 선택했는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이정출의 눈빛과 대사 그리고 몸짓으로 서서히 변화를 쌓아 나갈 뿐이다. 이정출이 처한 상황도 그가 결국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올릴 수 없게 만들었던 측면이 분명히 있다. 친구인 김장옥의 죽음 그리고 새로운 세력 하시모토의 등장, 자신을 믿지 않는 히가시 부장과 손을 내미는 정채산 등은 그를 선택의 순간으로 몰아 넣는다. 결국 이정출의 존재는 이 영화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독립운동이라는 과제에 접근했는지 보여준다.

    이> 송강호의 연기는 절제 미학에 입각한다. 그는 이정출의 '분열적 정체성'을 인간적인 표정들만으로 연기해낸다.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때로는 코믹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이정출의 수많은 감정과 반응의 내밀한 움직임이 클로즈업을 통해 자주 포착된다. 대사는 드물고, 대사 자체도 그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쓰이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대단히 모호한 주인공이 던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하는가?'라는 행동으로 답해진다. 말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행동만을 믿는다는 정채산처럼 이정출은 결국 행동하는 인물이다.

    영화 '밀정'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유> 공유가 맡은 김우진 역은 조금 아쉽다. 처음 이정출과 대면하는 장면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지만 이후에는 이정출을 유인하는 역할에 그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정출과 대비되는 위치에 있다 보니, 좋게 말하면 끝까지 우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상당히 평면적이다. 비록 거사의 실행자는 이정출이지만 김우진의 끈질긴 설득과 목표 지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배우 엄태구가 연기한 조연급 캐릭터 하시모토의 존재감도 눈길을 끈다. 하시모토는 초중반 이정출과 날카로운 갈등 관계를 형성하며 긴장감을 유발한다. 완급조절이 자유로운 엄태구의 연기는 송강호라는 걸출한 배우의 그늘에 가리지 않는다. 홍일점이었던 한지민은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거침없이 발산한다. 고문에 몸부림치면서도 끝까지 고통을 감내해내는 결연함과 처연함이 동시에 관객들을 뒤흔든다.

    이> 이정출은 김우진이 하고자 했던 거사를 완성하는 분신이다. 이정출의 적이며 동지의 역할을 맡아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성실하게 이끌고 가는 공유는 이 영화로 존경스러운 독립투사의 이미지를 오래 기억하게 할 것이다. 공유가 연기하는 인물이 남기는 감정도 숭고함이다. 엄태구가 맡은 하시모토의 강인하고 집요한 얼굴은 수시로 클로즈업돼 적대적 관계를 긴장감 있게 몰고 간다. 하시모토 역의 엄태구는 이 영화에서 송강호에게 밀리지 않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놀라운 연기는 공유, 송강호와 함께 3각 관계의 균형을 이루며, 훌륭한 열차장면을 만들어낸다.

    ◇ 독립운동

    이> 몇몇 조연과 의상이 전형적이고 도식적이라는 느낌은 간혹 주었지만, '밀정'은 무장독립운동 이야기가 상상가능해서 뻔하거나 무겁기만한 영화가 아니라, 장르적, 예술적 다양화가 가능한 훌륭한 소재라는 걸 증명했다. '암살'처럼 '밀정'도 개연성과 무관하게 친일을 척결하는 통쾌한 결말을,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의 여운을 채택했다. 그것이 우리시대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마음의 빚'을 갚는 한 방식이기 때문이 아닐까. 스타일이 지배적인 김지운 감독의 영화들은 지금까지 차가웠다. 이번 영화는 다르다. '밀정'은 독립투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깨닫게 하는 처연하면서도 숭고한 체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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