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을 연출한 뉴스타파 최승호 PD가 21일 서울 정동 뉴스타파 사무실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노컷뉴스)
국정원의 간첩조작 사건을 파헤쳐 국가폭력의 잔혹한 민낯을 들춰낸 '자백'(감독 최승호)이 1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뒀다. 정치·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이례적인 흥행세임에는 분명하지만, 아쉬움도 적잖다. '자백'을 연출한 탐사보도매체 뉴스타파의 최승호 PD는 "상영관이 더 있었다면 더 많은 분들이 봤을 텐데…"라며 속내를 털어놨다.
21일 서울 정동에 있는 뉴스타파에서 만난 그는 "'자백'은 멀티플렉스의 상영관 배정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개봉 전부터 몹시 애를 쓴 영화"라고 운을 뗐다.
"기존 정치·사회 이슈를 다룬 다큐 영화로는 최고 흥행작인, 용산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2012)의 관객수(7만 3730명)는 어제(20일) 넘어섰어요. 하지만 '두 개의 문'이 세운 기록은 멀티플렉스로부터 상영관을 배정받지 못한 어려운 상황에서 얻어낸 기적 같은 일이잖아요. '자백'은 개봉(13일) 당시 150곳에서 지금은 80여 곳으로 줄긴 했지만, 훨씬 나은 환경인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욕심 만큼은 멀티플렉스가 상영관을 안 열었어요. '럭키'에 이어 계속 좌석점유율 2위를 했으니 우리 입장에서는 상영관을 늘릴 이유가 있지 않냐고 어필했는데, 그쪽(멀티플렉스)은 그렇지 않더군요. 항의를 통해 일부 회복하기는 했지만, 상영관이 크게 줄어드는 걸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죠."
최 PD는 '자백'의 개봉을 전후해 멀티플렉스 측의 불합리한 상영관 배정을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펀딩을 통해 시민들이 4억 3000만 원의 개봉 비용을 마련해 주셨고, 그만큼의 지지자들이 생겼죠. 개봉을 앞두고는 2만여 명을 대상으로 시사회도 열었어요. 멀티플렉스로부터 상영관을 배정받기 위한 노력이었죠. 이런 점을 하나하나 따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형편이 안 되지만 TV 광고도 한 겁니다. 결국 관을 하나라도 더 배정받기 위한 상업적 판단 지수들을 하나씩 채워간 거죠. 그렇게 들인 정성에 비해 120개 관은 현저히 적게 다가오더군요."
결국, 한국 영화산업의 부익부 빈익빈을 가속화시키는, 영화 제작부터 배급·상영을 몇몇 대기업에서 장악한 수직계열화, 스크린 독과점 문제를 절감했다는 것이 최 PD의 설명이다.
"일단 스크린 배정이라는 게 문화적 다양성 존중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시장 논리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근거에 의문을 갖게 된 거죠. '자백'은 시장에서 요구하는 조건, 그러니까 시장 논리를 충족시켰는데도, 멀티플렉스 측이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죠. 그러니 멀티플렉스의 스크린 배정에 정치적인 민감성이 고려된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거죠."
개봉에 앞서 영화 '자백'을 미리 접한 영화인들의 반응이 "(민감한 소재를 다뤘는데) 멀티플렉스에서 관을 주겠냐"는 우려였다는 데도 그는 다소 놀랐다고 한다.
"'멀티플렉스에서 안 열 것이다.' 막무가내로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대다수였어요. 영화계 내부에서는 (스크린 배정에)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미친다고 생각한다는 걸 느꼈죠. 그렇게 걱정들 하신 것 치고 '자백'은 잘 된 셈이죠. 영화계에서도 놀라고 있어요. 우리 배급사(㈜엣나인필름·㈜시네마달)가 대단히 훌륭한 일을 했다고 말입니다."
◇ "'좋은 나라' 만드는 일은 '나쁜 나라'에 사는 우리네 책임"
영화 '자백' 스틸컷(사진=㈜엣나인필름·㈜시네마달 제공)
최 PD는 '자백'을 내놓으면서 겪은 영화계의 모습에서도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로 지목되는 '민주주의의 퇴보'를 봤다고 했다.
"아시다시피 MBC 해직기자인 제가 과거 MBC에서 일하던 때는 (외부로부터 오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거의 없었어요. 자유롭게 언론 활동을 한 거죠. 심지어 '정치가 방송에 영향을 미치는 시기는 지났다. 남은 건 재벌의 영향력뿐'이라고 여겼으니까요. 그런데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언론에 대한 정치적인 영향력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그렇게 방송은 제가 만드는 내용을 내보낼 수 없는 곳이 됐고, 그곳에서 일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죠. 이젠 방송 전체가 그렇게 된 겁니다."
이러한 방송계 환경에서 그는 영화계로 눈을 돌렸지만, 그곳에서도 희망과 한계를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영화를 오락매체로 보는데, 지금의 언론이 하지 못하는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는 영역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큐멘터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2013)도, '다이빙벨'(2015)도 그랬잖아요.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여기도 여전히 정치적인 영향력이 고스란히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과하게 느꼈습니다. 그 와중에 시장 논리까지 끼어드는 거죠. 결국 대한민국에서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 체제 부조리를 제기하는 방송이나 영화가 대중과 만나는 건 '바늘구멍 통과하기'라는 점을 많이 느꼈죠. 민주주의의 퇴보가 걱정스러운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백'을 영화로 내놓고 관객들과 만나면서 남다른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국정원의 문제를 밝혀냈고 이를 방송으로 내보냈는데 (국정원은) 변하지 않았어요. 언론으로서 뉴스타파의 한계를 절감했고 영화로 눈을 돌린 겁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 중에는 '저 정도일 줄이야'라며 정서적인 충격을 받는 분들이 꽤 많아요. 그런 면에서 우리 영화가 언론으로서 충분히 가치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방송과는 다른, 예술 장르로서 영화 매체가 지녀야 할 요소에 대한 고민도 적지 않았으리라.
"내용은 확보하고 있으니 그 내용을 지루하지 않게, 어떻게 몰입도를 유지해 갈 지를 고민했죠. 초반에 지지부진한 경향이 없지 않았는데, 전체적인 스토리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면이 있었어요. 중반 이후에는 속도도 그렇고 장면 전환시 예상치 못한 정서를 전달하는 등 밀도가 있다고 봅니다. 극 마지막에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인 김승효 선생이 '대한민국은 나쁜 나라'라고 말하는 장면에 특별히 공을 들였어요. 그게 대한민국의 현실이잖아요. 나쁜 나라에 사는 우리에게는 이곳을 좋은 나라로 만들 책임이 있으니까요."
◇ "영화 감독 어색해…빨리 마치고 PD로 돌아가고파"
최승호 PD가 인터뷰 도중 스마트폰으로 영화 '자백'의 상영관 배정·관객동원 추이를 살펴보고 있다. 그는 "영화 개봉 이후 이를 수시로 확인하게 됐다"고 전했다. (사진=황진환 기자/노컷뉴스)
최 PD는 '자백'을 통해 영화감독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언론인으로서 언론이라는 틀 안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제가 MBC 'PD수첩'에서 '자백'의 내용을 방송할 수 있었다면 굳이 영화로 내놓지 않아도 됐겠죠. 관객들이 많이 봐 주시는 것도 방송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고 접할 수 없으니 극장을 찾으시는 거고, 그렇게 대한민국을 바꾸는 데 힘을 보태려 애쓰시는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내용이 방송으로 나가는 게 가장 자연스럽죠. 그랬다면 현실 사회의 상황이 이런 식으로 악화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최 PD에 따르면, 유우성 씨 간첩조작사건이 터지고 그의 동생이 허위자백을 했다고 폭로했을 당시 이미 MBC 시사프로그램 '2580'에서 이를 다루려 했다. 하지만 담당 부장이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나팔수냐"며 이를 거부해 방송은 무산됐다.
"만약 그때 방송이 됐다면 무죄판결이 보다 일찍 나오는 등 조치가 취해졌을 겁니다. 국정원이 중국 공문서까지 위조하면서 증거를 조작하지도 않았겠죠. 당시 언론이 바로 잡혀 있었다면 이 사건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큰 책임을 느낍니다."
그는 "시대가 저로 하여금 영화를 하도록 만들었다"며 "요즘 어색하게도 감독 소리를 듣는데, 빨리 마치고 다시 PD로 돌아가고 싶다"고 웃어 보였다.
"물론 다시 영화를 하고 싶기도 합니다. 좋은 주제를 만나 계속 취재 내용을 쌓아가다보면 영화로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오겠죠. 하지만 오로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보통 영화인들이 준비하듯이 몇 년의 시간을 쏟아부을 수는 없습니다. 일상적인 취재를 하면서, 그러니까 3년에 걸쳐 '자백'이 만들어진 과정 그대로겠죠. 제가 뉴스타파에서 앵커를 하면서 취재도 병행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일선 PD로서 한두 달에 (콘텐츠를) 하나씩 만들어야 했다면 불가능했겠죠. ('자백'을 만드는 과정은) 정말 끝까지 가본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영화 '자백'을 계기로 엄혹한 시대에 대중으로부터 언론의 사명을 요구받고 있는 영화 매체의 가치도 절감했다는 것이 최 PD의 견해다.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송환'(2004) 등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는 이미 언론의 역할을 충분히 해 왔잖아요. 특히 방송이 관심을 갖지 않는 영역이나 사건들에 대해 미시적인 시각으로 깊이 있게 담아내 감동을 불러 일으켰죠. 시대정신을 담은 이러한 영화들은 언론 매체보다 앞서 이슈를 끌고 가는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기존 언론은 그러한 영화의 정신에 빚지고 있어요. 영화를 통한 각성이 한 곳에서 열리면 언론에서 그것에 대해 조금 더 적극적인 보도를 했던 거죠. 현재는 방송 등 대중매체에서 일반적인 보도조차 내보내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다보니 보다 대중적인 영화 매체에서 그 역할을 하려고 애쓰는 상황이 온 거겠죠. 이런 상황이 나름대로 영화계에도 자극을 주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 "서로 생각 다른 사람들이 영화 '자백' 함께 봤으면"
영화 '자백'의 수익금 가운데 50%는 비영리 민간단체인 '민들레 국가폭력피해자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 기부된다. 최 PD가 보다 많은 관객이 이 영화를 봤으면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백남기 선생님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분이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는 과정은 영상을 통해 전 국민이 다 보고 있었어요. 누구나 아는 그 사실을 부인하는 국가권력의 행태를 보면서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분의 죽음을 유족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이 국가가 파렴치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인 거죠."
그는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피해자를 가해자로 조작하는 권력층의 민낯이 영화 '자백'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고 강조했다.
"집권세력의 의도에 따라 사실 관계가 언제든지 뒤집어지고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자백'에서 (국정원이) 간첩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똑같아요. 그 과정에 유명한 기성 언론이 관여하고 있고요."
최 PD는 "영화 '자백'을 통해 국민을 낙인 찍는 국가폭력의 실체를 말하고 싶었다"고 역설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뉴스타파라는 작은 언론과 민변의 변호사들이 힘을 합쳐 (국정원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국정원이 제대로 변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겼어요. 역사에는 '국정원의 간첩조작사건'이라고 기록될 테니까요. 영화를 통해 '우리가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어요. 영화 '자백'이 만들어지는 과정 역시 뉴스타파 회원들의 성금으로 제작돼, 개봉까지 후원자들의 힘으로 할 수 있었잖아요. 폭력을 자행하는 국가권력의 힘이 센 것 같지만, 우리가 손잡고 가면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그는 보수 성향의 관객들이 '자백'을 본 뒤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에 고무되고 있다고 전했다.
"영화 '자백'을 만들면서 진보 성향의 다큐멘터리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애썼어요. 의견을 빼고 사실만을 집어넣은 이유죠. 합리적인 보수 성향의 관객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봅니다. 건강한 보수는 국가기구가 제 역할을 다해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바라는데, 그분들이 봤을 때도 '이건 국가기구가 아니'라는 거죠.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분들이 모여 우리 영화를 함께 봤으면 한다. 이는 국정원에 대한 한풀이가 아니라, 공통분모가 넓혀가는 일입니다. 결국 그 공통분모는 변화를 가져올 힘이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