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원숭이의 해인 2016년은 굵직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아 말 그대로 '다이내믹'한 시기였습니다. CBS노컷뉴스가 올 한 해 문화·연예계에서 나타난 인상적인 흐름을 되짚어 보는 '연말정산'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편집자 주]글 싣는 순서 |
① 국정농단 사태가 불러온 방송연예가의 봄 ② 문화예술계 뒤흔든 '블랙리스트' 왜 위험할까 ③ '세대교체' 바람 속 웃고 운 아이돌 ④ 잘나가던 한류의 '한한령' 수난시대 <계속>계속> |
순항 중이던 중국행 '한류호'(韓流號)에 매서운 태풍이 몰아닥쳤다.
태풍의 눈은 연예계가 아닌 정치권에 있었다. 국방부가 지난 7월 주한미군의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 배치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사드 배치'가 자국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몇년 전부터 중국에 뿌리를 내린 한류 산업으로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초반, 괴담처럼 취급됐던 중국발 '사드 보복'은 비상식적인 상황이 반복되면서 어느 정도 그 윤곽이 드러난 상황.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5개월 간 연예계를 떨게 한 중국 내 '한한령'(限韓令)의 전말을 정리해봤다.
배우 유인나와 가수 싸이. (사진=자료사진)
◇ 직격탄 맞은 한류 스타들중국 연예계로 진출한 한국 연예인들이 가장 먼저 표적이 됐다.
배우 유인나는 지난 8월 31일 촬영 중이던 후난위성TV의 28부작 드라마 '상애천사천년 2: 달빛 아래의 교환'에서 하차했다. 공식 하차가 결정된 시기가 그 때였을 뿐, 이미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유인나의 하차설은 기정 사실처럼 방송가를 휩쓸었다.
유인나가 이미 드라마 전체 분량의 2/3 정도를 촬영한 것으로 전해져 사드 보복에 따른 한류 규제 조치, 즉 '한한령'이 발동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다.
제작사인 CJ E&M 측은 연출을 맡은 PD는 교체가 되지 않았다면서 "중국 촬영 스케줄이 길어져서 국내 촬영 스케줄이 예정된 유인나가 합의를 거쳐 불가피하게 하차를 결정했다"고 의혹을 일축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업계에서는 중국이 정치적 사안인 '사드 배치' 문제에 압박을 넣기 위해 한류 산업 규제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었다.
비슷한 시기, 중국 내에서 동시 방영되며 큰 인기를 누리던 '함부로 애틋하게'의 팬미팅 또한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갑작스럽게 취소됐다. 주연 배우인 수지와 김우빈은 팬미팅 개최 이틀을 앞두고, 중국 현지팬과의 만남을 포기해야 했다.
중국 내에서 활동 중인 한류 아이돌 그룹이나 가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싸이와 아이콘 등은 중국 예능프로그램에서 전 출연분이 모자이크 처리되거나 통편집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송중기, 엑소 등 중국 내 한류를 이끄는 톱스타들 상대로는 광고 모델이 교체되거나 공연을 연기하는 일이 벌어졌다. 중국 본토 톱스타들과 비견될만큼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해도, '한한령'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셈이다.
(사진=SBS 제공)
◇ 동시 방영에 제동 걸린 한국 드라마들공식적인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한령'은 존재한다.
'한한령'의 윤곽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한국 드라마에도 본격적인 규제 그림자가 드리우면서부터다.
1세대 한류 스타 이영애의 복귀작으로 기대를 모았던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는 지난 10월 말 한중 동시 방영이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중국 심의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오는 2017년 1월로 방영 일정이 연기됐다.
문제는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이하 광전총국)의 심의 없이는 중국 내에서 드라마 방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전지현과 이민호의 조합으로 중국 동시 방영 기대를 모았던 '푸른 바다의 전설' 역시 심의 통과를 이루지 못했다. 반대로 KBS 2TV 드라마 '화랑: 더 비기닝'은 심의를 통과해 동시 방영 중이다.
경험이 풍부한 국내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이전부터 광전총국이 본격적인 한류 규제를 예정한 것은 사실이다. 사드 배치가 좋은 빌미가 됐고, 문서만 없을 뿐이지 중국 내에서도 알아서 '한한령'에 맞게 행동하는 분위기"라고 이야기했다.
결국 '한한령'이 풀리지 않으면 중국 자본 의존도가 높은 국내 드라마 제작 산업은 위기를 맞게 될 수밖에 없다.
이 관계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인 '사드 배치' 때문에 규제를 받는다고 말하기가 우리 입장에서는 어렵다. 중국 투자 아니면 드라마 규모를 키우기 힘든 게 사실이고, 한중 관계가 풀리지 않는 이상 한류 산업은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 지금도 '한한령'은 현재진행형지난달 21일 중국 외교부 정례브리핑에서 겅솽(耿爽) 대변인은 '한한령'의 존재 여부와 사드 배치와의 관련성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의미심장한 답을 내놨다.
겅솽(耿爽) 대변인은 "'한한령'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고, 중국 정부는 한중 간 인문 교류를 줄곧 지지해왔다. 그런 교류는 민의에 기초해야 한다고 믿고 있고, 중국 국민은 사드 배치에 불만을 표하고 있으며 이런 정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한령'의 존재는 부인하면서도, 한국이 원활한 인문 교류를 원한다면 사드 배치에 부정적인 중국의 '민의'를 잘 살피라는 이야기인 셈이다.
한국문화산업교류재단 류설리 연구원은 중국의 이번 '한한령'이 오히려 비공식적 규제이기 때문에 더 여파가 크다고 분석했다.
류 연구원은 "그 전에도 중국의 한류 콘텐츠 규제는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문제는 지금은 과거와 달리 비공식적 규제로 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한류 콘텐트 산업 구성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사드 배치 문제 역시 이런 규제의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류 연구원은 "이제는 더욱이 사드 배치 문제와 함께 가는 상황이라 순식간에 사라지기는 힘들다고 본다. 한류도 일종의 문화소비다. 그런데 콘텐츠 마케팅을 국가 브랜드와 연관지어 해왔기 때문에, 한류하면 한국이 떠오를 수밖에 없고 중국 입장에서도 한국을 압박하려면 한류 산업을 건드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아직 희망은 있다. '도깨비', '푸른 바다의 전설' 등 최근 중국 내 정식 방영되지 못한 국내 드라마들이 현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