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독자적인 그래픽 칩(GPU) 개발에 나선다고 밝혔다. 당장 애플 최대 GPU 칩 공급처인 영국 반도체 업체 이매지네이션(Imagination) 테크놀러지가 큰 타격을 받았다.
3일(현지시간) 애플이 "향후 15개월에서 2년 이내에 더 이상 이매지네이션의 지적재산(IP)을 신제품에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직후 이매지네이션의 주식은 무려 69%나 폭락했다.
애플이 앞으로 라이선스 및 로열티 계약에 따른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게 되면서 최대 공급처인 이매지네이션의 미래가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반면 애플은 독자 개발에 성공할 경우 핵심 디바이스의 그래픽 처리능력에 큰 발전을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애플은 그동안 자체 기술로 칩을 생산해 왔지만, 첫 아이폰 출시 이후부터 그래픽 처리에서는 이매지네이션의 GPU를 공급받아 왔다. 이매지네이션 전체 매출 1억2천만파운드의 절반인 6500만파운드가 애플에서 나왔다.
지난해 3월 애플이 이매지네이션과 인수문제를 두고 협상을 벌였지만 최종 성사되지는 않았다. 애플이 가지고 있는 이매지네이션 주식은 8.1%로 네번째로 큰 주주다. 2014년 초에는 그래픽 및 비디오 칩에 대한 애플의 다중 사용 라이센스 계약을 연장했다고 밝혔지만 이 '은밀한 관계'는 더이상 지속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매지네이션은 지난해 직원 1700여명을 추가 고용해 가상현실 헤드셋 기술 개발을 비롯해 미래 비즈니스를 새롭게 구성하고 불필요한 자산을 줄이는 등 그래픽 및 멀티미디어 사업을 크게 재조정한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여파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애플이 독자적인 그래픽 칩을 개발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1. 아이폰8에도 '애플 GPU' 탑재되나이매지네이션은 애플이 2년 내에 자사의 지적재산권 사용을 중단하려는 의도라고 발표 했다. IP 사용을 중단하면서 이르면 15개월 후부터는 이매지내이션에 지불하는 로열티는 종료된다. 시기로 보면 이르면 2018년 7월에서 늦어도 2019년 4월이다.
아이폰8은 올해 9월에 출시되기 때문에 당장에 변화는 없겠지만 이르면 2019년 7월부터 추가 제조되는 아이폰8, 새로 나올 아이폰8S나 아이폰9에 도입될 가능성이 있다. 아이패드에서는 내년 출시될 것으로 알려진 아이패드 프로2 출시 이후 추가 생산 모델과 아이패드 프로3에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애플이 단종시키지 않고 추가 제작하는 구형모델 물량에도 최소 15개월 이후부터는 애플이 설계한 GPU가 장착된다. 다만, 이매지네이션이 애플이 자사의 제품을 관리하기 위해 이미 별도의 독립적인 그래픽 디자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면서 계약 위반 가능성을 제기했다. 아직 계약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애플이 독자 설계에 들어갔다는 주장이다.
누미스증권 애널리스트 닉 제임스는 "특허 소송의 경험을 감안하면 애플이 합의 없이 독자적으로 한다면 애플에 대한 소송은 큰 파급력을 불러 올 것"이라고 말했다.
애플의 독자적인 GPU가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15개월 뒤에는 신제품들에서 애플이 직접 설계한 AP와 GPU의 강력한 조합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애플, AR 시장 주도권 잡기에 집중팀 쿡 애플 CEO는 이미 여러차례 증강현실 기술이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라면서 자체 GPU 기술 확보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밝혀왔다.
강력한 그래픽 처리 기술은 애플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증강현실 글래스(AR Glasses)' 제작에 핵심 요소가 된다. 애플이 자체 기술을 이용해 다른 메이커의 IP 의존도를 줄이려는 이유다.
애플이 향후 아이폰과 연결되는 'AR 글래스'를 만들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매지네이션의 GPU 기술이 애플워치와 같은 웨어러블 기기에 적용된만큼 'AR 글래스'와 같은 헤드셋에도 장착될 수 있다는 전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기술 예측 전문가 로버트 스코블(Robert Scoble)은 최근 애플 '증강현실 안경' 출시가 2017년 중반에서 2018년을 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하면서 독일 광학 전문 업체인 칼 자이스(Carl Zeiss)와 협력해 경량 안경을 제작할 것을 제안했다. 칼 자이스는 디지털 시네마 카메라 및 4K급 해상도를 지원하는 초 고해상도 시네마 렌즈를 제작하고 있다.
하지만 포천(Fotune)은 2019년 초까지는 'AR 글래스'가 출시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편, 애플이 AR 기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는만큼 VR(증강현실)도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미 안드로이드 플랫폼에서 구글 데이 드림과 삼성의 기어VR이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아이폰 설치형 VR 헤드셋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내다 봤다. 그러나 거추장스러운 장비를 싫어하는 애플의 특성상 가능성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3. GPU 자율주행 기술에 꼭 필요애플은 구글 웨이모처럼 자율주행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즈는 애플이 자율주행차 기술 개발 프로젝트보다 'AR 글래스'가 우선순위에 올라섰다며 애플이 이 프로젝트에 상당한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매지네이션은 모바일 장치용 그래픽 칩을 넘어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급성장하고 있는 자율주행차 시장을 위한 새로운 그래픽 칩 기술 개발이다. 자율주행을 위해서는 자동차에 설치된 카메라와 각종 센서, 라이다 등이 수집한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데 엔비디아가 선두로 나서고 있고 인텔도 GPU 칩셋 개발을 위해 몸집을 불리고 있다. AMD나 ARM 등 칩셋 회사들이 자율주행차 시장 주도를 위해 GPU 기술 개발이나 기술 스타트업 인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애플이 완성차를 만들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지만 전문가들은 시장에서 첨단 하드웨어 플랫폼의 핵심인 칩 셋의 의존도를 줄이고 로봇이나 AR 등 새로운 하드웨어 시스템을 생산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4. 강력한 모바일 게이밍 성능 확보삼성전자가 새롭게 공개한 갤럭시S8에 적용된 ARM 말리 G71 / 퀄컴 아드레노 540 GPU는 이전 모델인 S7보다 약 20~25% 이상 성능 향상이 이루어졌다. 이때문에 모바일에서는 물론 삼성 덱스(Dex)를 이용해 PC 화면으로 모바일 게임 '리니지2 레볼루션'이 원활이 돌아갈 정도로 게이밍 성능이 우수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칩들은 고화질 멀티미디어 재생과 VR의 속도를 높이도록 커스텀되어 있다.
외부 업체의 제작 기술로부터 독립해 증강현실이나 가상현실로 혹여 넘어가지 않더라도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모바일 게이밍 성능은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삼성은 물론 중국 제조사들이 최근 모바일 게임 시장의 급성장세를 의식해 '게이밍 스마트폰'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애플의 가장 큰 장점은 모바일 기술을 자체적으로 유지·관리하면서 안드로이드가 구현할 수 없는 장치들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최적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모바일 게이밍 성능에서도 자체 GPU 설계를 통해 A10 퓨전 칩셋처럼 상당한 성능 향상을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5. 이매지네이션 특허를 피해 '애플 GPU'를 만들 수 있을까이매지네이션은 성명을 통해 "애플이 자체 GPU 기술 전환이 원활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이매지네이션의 특허, 지적재산권, 기밀정보 등을 침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개발할 수 있다는 어떠한 증거도 내놓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애플이 실제 자체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특허나 관련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애플의 자체 GPU 기술은 상당기간 지연될 수 있다. 그러나 업계는 애플이 이런 상황을 뒤집을 특별한 계획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애플이 오랜 시간 특허 분쟁에 전력을 쏟아온만큼 쉬운 결정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애플인사이더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이매지내이션의 핵심 간부들이 애플로 자리를 옮겼다. 애플이 GPU 기술을 집대성해 아이폰과 아이패드 그 이상의 새로운 것, 아이폰처럼 시장을 주도할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것이 업계의 예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