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까칠남녀' 방송 화면 갈무리)
"여기 계신 분들이 낙태를 찬성하시는 게 아니라, 그 자체를 죄로 정한 것을 반대하시는 것으로 안다."
지난 3일 밤 전파를 탄 EBS 1TV 젠더 토크쇼 '까칠남녀'에서 '낙태가 죄라면'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 MC 박미선은 위의 중요한 전제를 강조한 뒤 방송을 이어갔다.
우리나라에서 낙태는 불법이다. 지난 1953년, 임신한 여성이 낙태한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혹은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가 제정됐다. 이후 20년이 흐른 1973년, 유전적 문제나 성폭행에 의한 임신 등의 경우에 한해서만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한다는 '모자보건법'(제14조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이 제정됐다.
이날 방송에서 기생충박사 서민은 "의사가 만일 낙태를 했다 걸리면 한 달간 자격정지가 된다. 한 달간 병원 문을 닫아야 한다. 의사에게는 중죄"라며 말을 이었다.
"실제로 낙태죄 처벌을 강화하면 의사들이 낙태를 안하게 된다. 그렇다고 낙태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산부인과 학회지에 나온 이야기인데, 여성(응답자)들의 64%가 '의사가 낙태 안해주면 불법시술소를 가겠다'고 답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개인병원에서 낙태를 하다 과다출혈이 되면 큰 병원으로 옮겨서 생명은 건질 수 있다. 하지만 불법시술소는 자기(시술자)가 처벌 받을까 두려워서 큰 병원에 가지를 못해 (여성이) 죽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문화평론가 손희정은 "낙태죄는 '생명은 존엄하다'로 접근하기 이전에, 국가에서 무엇인가를 죄로 규정했다는 것을 먼저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실제로 낙태죄는 여성의 몸과 자궁을 분리해 부계중심적인 사고 안에서 '이 자궁 안에는 남성의 아이가 들어있고, 이것은 국민을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사고하는 방식이 들어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서민은 "낙태를 죄로 규정하려면 남자에 대한 처벌"이 전제돼야 한다고 지적했고, 박미선은 "법문(낙태죄 조항)에도 임신한 여성만 있다. 임신을 시킨 남성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부연했다.
시사평론가 정영진은 "생부인 남성의 경우 낙태를 강요 혹은 방조한 경우 '낙태 방조죄'에 해당한다"며 "남성이 전혀 그 (낙태) 사실을 몰랐다면 처벌할 수 없지만, 임신·낙태 사실을 알았을 때 그것은 충분히 처벌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에 성우 서유리는 "낙태 방조죄는 여성이 (낙태) 수술을 할 때, 남성이 같이 (병원에) 가서 돈을 낸 경우에만 성립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 "낙태죄가 있다고 해서 낙태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사진='까칠남녀' 방송 화면 갈무리)
이날 방송에서는 지난 1994년 방영된 화제의 드라마 'M'에 대한 이야기도 오갔다. 낙태 당한 아이의 영혼이 낙태한 여성들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의 이 드라마가 끝난 뒤 낙태에 대한 수많은 담론이 오갔다.
이에 대해 손희정은 "제가 해석하는 M의 등장 맥락은 한국 사회가 1960년대 초부터 산아제한정책이 시작된다"고 운을 뗐다.
"'출산율을 줄여야 경제가 발전한다', 이것(산아제한정책)이 너무 성공해서 1986년 정도가 되면 인구증가비율이 1% 미만으로 확 떨어진다. 그때부터 말하자면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국가정책이 시작되고 '태아에도 인권이 있다'는 생명권 담론이 등장한다. 제가 태아에 생명이 없다거나 태아의 생명을 우습게 여기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한 사회에서 생명이 무엇이라고 규정되는 것이 매우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작가 은하선은 "제가 원치 않는 임신을 잠깐 했다 자연 유산이 된 적이 있다"며 용기있는 발언을 이어갔다.
"그때가 프로라이프 의사회 (낙태 반대 운동이 거셌던) 2010년이었다. 제가 다 찾아봤는데 원정 낙태 밖에는 답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릴 정도로 되게 힘든 상황이었다. 이런 일이 제게 닥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남지친구가 '그 아이가 내 아이인지 어떻게 알아?'라는 얘기를 하는 거다. 그 상태에서 정말로 병원을 다 찾아다니는데, 저 혼자인 것 같고 세상에 나 혼자 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정말 어떻게든 살아야겠는데, '내가 이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잘 키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그래도 이 아이도 생명인데'라는 여러 복합적인 생각이 들면서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 남자는 전화도 안 받더라."
은하선은 "제가 이런 일을 겪은 사람으로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미혼모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것에 대해 낙인을 찍는 사회에서 여성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고, 남성들도 사실상 도망가게 만든다는 것"이라며 "남자를 도망가게 만드는, '나쁜 놈'을 만드는 것도 사실 사회가 하고 있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손희정은 "낙태죄가 폐지된 독일 프랑스 등에서는 태아의 주수에 따라 원하지 않는 임신에 대한 낙태를 허용한다. 그런 곳의 낙태율이 한국보다 현저히 낮다"며 "한국은 가임기 여성 3명 중 1명이 낙태를 경험한다(2010년 보건복지부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고 하는데, 낙태죄가 있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어 "실제로는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사회 문화적인 조건들 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낙태한 여성에게) '너만 잘못했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해결방법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날 방송 말미에 패널들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지 말자"(서유리·피임을 잘하자는 의미),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입니다"(은하선), "대신 아이 길러줄 게 아니면 왈가왈부하지 마세요"(서민) 등의 마무리 멘트로 각자의 입장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