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사진=자료사진)
"대법원은 결국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지 못하고, 10대 피해자의 두려움을 묵과한 것입니다."
서울 마포구에 소재한 한국성폭력상담소에는 시민단체를 대표하는 토론자 7명이 모였다. '연예기획사 대표에 의한 청소녀 성폭력사건' 때문이었다.
이 사건의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로 활동해왔던 이들은 지난달 9일 대법원 제1호 법정에서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는 한 마디를 들었다. 6년 간의 힘겨웠던 법정 공방은 연예기획사 대표에게 무죄가 확정 선고되는 결말을 남기고 끝났다.
2011년 중학생이었던 피해자는 당시 42세였던 연예기획사 대표를 만났다.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며 접근한 대표는 피해자와 수차례 강압적인 성관계를 맺으며 동영상을 촬영했다. 이후 피해자는 27살 차이가 나는 가해자의 아이를 임신했다. 가해자의 아들은 피해자와 불과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징역형을 선고한 1심과 2심 재판부 그리고 무죄를 선고한 대법원이 가진 관점의 차이는 하나다. 두 사람이 맺은 성관계가 자발적인 '사랑'에 의한 성관계였는지 위계적
지배관계에서 발생한 강제적 성관계였는지다. 대법원은 이를 '성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판단했다는 것이 공대위의 설명이다.
미성년자 성폭력 사건에 대해 어떻게 대법원은 이런 판결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일까. 7명의 시민단체 대표들은 이번 판례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법의 합리성과 객관성 아래 한 번 더 아픔을 겪어야 하는 현실을 짚었다.
지난 6일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열린 '연예기획사 대표에 의한 청소녀 성폭력 사건 의미와 쟁점 토론회'에 참석한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과 법무법인 온세상 김재련 변호사. (사진=유원정 기자/자료사진)
◇ 여성 피해자 관점 사라진 성편향적 판결공대위는 대법원 판결을 내리는 법관들의 성별이 대다수 남성인 점을 주목했다. 여성 피해자들이 대다수인 성폭력 사건에 남성중심적인 시각이 작용할 위험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성폭력의 판단기준과 관련해 대부분 남성들로 구성된 담당자들에 의한 법제정 및 이행과정에 피해자의 경험과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법이 강조하는 객관성이 이미 가부장제 안에서 마련된 합리성의 틀 안에서 성장하고 발전해왔기 때문에 그 한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미경 소장은 한 토론회 자료집을 인용해 "법을 집행하는 법원과 검찰이 가치중립성을 표방하는 실증주의적 객관성을 판단의 기준으로 한다면 성폭력 피해자를 비난하는 가해자 온정주의가 뿌리 깊은 우리 사회에서 그 객관성은 남성 가해자 중심의 무늬뿐인 객관성일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피해자에게 부당하며 성차별적인 법 집행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 '합리성'에 묻힌 피해자의 주관적 두려움대법원이 연예기획사 대표의 청소녀 성폭력 사건을 무죄취지로 파기 환송시킨 중요한 증거는 바로 해당 대표가 수감돼 있을 때 피해자가 보낸 서신이었다.
당시 대법원은 피해자가 보낸 서신의 내용과 횟수, 접견 시의 대화 내용 등을 두고 "하트 표시를 그리고 꾸미기도 한 점에 비춰봤을 때 마음에 없는 허위 감정을 표현했다는 피해자 진술을 믿기 어렵다. 이런 서신들과 휴대폰 메시지 내용에 비춰보면 피해자는 피고인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사랑의 감정을 느꼈고 피고인이 구속된 후에도 그 감정이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피고인이 피해자를 물리적, 실력적인 지배관계 아래에 두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파기 환송 이유를 밝혔다.
피해자는 계속해서 이 같은 서신이 연예기획사 대표의 강제적 요구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대법원은 피해자의 감정이 표현된 '합리적' 증거를 바탕으로 이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성폭력 사건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의 심리 상태를 기반으로 심리가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법무법인 온세상 김재련 변호사는 "폭력을 행위자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사랑해서 한
것이라는 변명과 합리화가 힘을 얻게 된다"면서 "피해자 관점에서 들여다보지 않으면 피해자가 어떤 두려움과 공포 속에 처해있었는지, 왜 피해자가 즉극 신고할 수 없었는지, 왜 피해자가 당시 저항하지 못하고 순순히 응할 수밖에 없었는지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고 이야기했다.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문에 대해서도 "위 판결문에는 피해자의 개별적 사실행위에 대해서는 상세히 적시돼 있는데 왜 그와 같은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두려움, 공포에 대해서는 제대로 판단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재상고 당시 피해자 측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27살이나 되는 연령 차이, 피해자의 성격과 이성관계에 대한 인지능력, 곤궁한 가정형편, 피해자 측과 상반되는 피고인의 사회 경제적 지위 등 피해자가 처했던 환경과 상황을 봤을 때 성관계가 자발적인 동의 하에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장과 모순될 수 있는 편지를 보낸 심리적 배경은 첫 강간피해 이후의 순응적 태도, 즉 심리학적 방어기제에서 비롯된 강요된 적응현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진술의 신빙성 역시 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이 자발적이고 일관적이고 구체적이었다.
그러나 파기환송심 및 재상고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서신을 바탕으로 그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했다. 미국의 경우, 12세의 나이에 성폭행을 당한 의붓딸이 의붓아버지에게 이번 판례와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지속적으로 썼지만 미국 법원은 피해자의 양가적 태도를 성폭행 피해아동이 충분히 보일 수 있는 행동으로 판단해 의붓딸 증언에 대한 진실성을 인정했다.
김 변호사는 "피해자의 주관적 공포인 두려움은 개별사건에서의 사실관계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상태에서 판단돼야 한다"면서 "피해 발생 당시,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해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들여다보고 합리적 판단자 관점에서는 그 두려움이 비합리적이라고 판단되더라도 피해자 입장에서 이미 두려움이나 공포에 빠진 상태에서 행동한 것이라면 강압에 의한 성폭력을 적극적으로 인정함이 마땅하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