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사진=KBS2 '추적60분' 방송 화면 갈무리)
"(법원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내가 다친다'라는 생각들을 다 하는 거죠. 판결이나 재판이나 법원 생활, 이런 것들을 인사권자에 맞추는 경향들이 꽤 많거든요. 기존 판결이 있는데 흔히 반하는 걸 쓰거나, 혹은 기존 판결이 없는데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판결을 쓰는 건 힘들거든요. 그 힘든 걸 감내하고 내가 나의 소신을 판결에 투영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렇게 했을 때 나한테 좋은 게 없을 뿐 아니라 불이익이 닥친다면 그걸 누가 하겠습니까."
지난 4일 밤 방송된 KBS 2TV 탐사보도 프로그램 '추적60분'에서 인터뷰에 응한 현직판사 C씨의 증언이다.
'사법부의 민낯, 판사 블랙리스트'라는 주제를 내세운 이날 '추적60분'에서는, '사법부는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판결해야 한다'는 헌법 정신을 스스로 망가뜨린 법원의 민낯을 집중 조명했다.
지난 2011년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이래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을 보내고 지난해 9월 퇴임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그의 임기 당시 일선 판사들을 성향 등에 따라 분류한 명단,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가 드러나 물의를 빚고 있다.
이날 방송에서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한상희 교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면서 이 두 정부가 추진했던 기본적인 정치적 방향성은 '잃어버린 10년,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며 진단을 이어갔다.
"기본적으로 국정원을 이용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이런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사회 내에 있는 진보 세력들을 축출하고 보수정권이 영구 집권할 수 있는 틀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걸로 보인다. 이 과정 속에서 사법부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뒷조사로 판사들의 독립을 훼손한 블랙리스트는 대법원 소속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것으로 지목됐다. 이곳은 대법원장을 보좌하는 사법행정기구로, 법원에 관한 인사·예산·제도 연구 등 업무를 맡고 있다. 그런데 행정처 출신 판사들이 고위 법관으로 승진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엘리트 코스의 첫 관문으로 여겨진다.
법원노조 곽승주 초대 위원장은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하기를 다들 원한다"며 "(승진의) 지름길, 판사가 고등부장으로 승진하는 길, 법원장이나 대법관으로 가는 길은 법원행정처를 통과해야 된다"고 꼬집었다.
◇ '상고법원제' 추진…사법부와 행정부의 비뚤어진 결탁을 낳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은 왜 블랙리스트 작성 등 헌법이 규정한 사법부 독립을 훼손하면서까지 정권의 편에 서려 애썼던 것일까.
'추적60분' 제작진은 "대법원이 오히려 청와대를 이용하려 했다"고 전했다.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이 사활을 걸었던 '상고법원' 설치를 관철시키기 위한 움직임이었다는 이야기다.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임지봉 교수는 "(양 전 대법원장은) 상고법원제 도입을 일종의 임기 내 숙원사업의 하나로 정한 것 같았다"며 "국민 여론을 상고법원제에 우호적으로 만들기 위해 막대한 홍보비를 쓴 것으로 알고 있다. 지하철 칸 안에도 상고법원제에 관한 광고가 붙었던 것을 봤다"고 지적했다.
상고법원은 무엇일까. 대법원에 올라오는 재판은 해마다 늘어 최근 4만건을 넘어섰다. 재판을 분산하기 위해 대법원이 낸 아이디어가 상고법원 신설이다. 그러나 실제 효과보다는 대법원장 권한만 강화한다는 비판이 컸다.
건국대 한상희 교수는 "대법원 외에 3심 법원 체제를 만든다는 것은 가뜩이나 관료화 돼 있는 우리나라 사법 체계를 더 관료화시킨다. 법관의 승진 사다리에 몇 단계 되는 승진 구조들을 삽입하는 것이 된다"며 "인사·승진을 핑계로 해서 법관들을 묶어두는 그런 통로가 될 수도 있다"고 비판했다.
서강대 임지봉 교수 역시 "(상고법원제는)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국회나 대통령이 임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며 "법원 내에 대법원장이 최종심 법원의 재판관들을 임명하는 내용이다. 그 자체가 위헌적"이라고 설명했다.
◇ "정치적 판단에 따라 법관들 통제한 사법부…스스로 사법·재판 독립 포기"
'추적60분' 제작진은 박근혜 정부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이해관계에 얽힌 비뚤어진 협력에 대해 "당시 박근혜 정부는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을 얼마나 열망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며 아래와 같이 전했다.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업무일지에는 청와대가 상고법원 관련 사항을 살핀 기록이 여러 번 등장한다. 청와대는 상고법원이 기형적인 제도라는 것을 파악한 뒤에도 사법부를 좌우하기 위한 미끼로 쓴다. 마치 상고법원 추진을 도와줄 것처럼 하면서 법원을 길들이는 수단으로 활동한 것이다."
이날 방송에서 판사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서기호 변호사는 "그 당시 김기춘 비서실장이 대법원을 이용한 것은 바로 일선 판사들에 대한 판결 통제였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대법원장과 법원장 라인을 통해 통제를 해야 되는데, 자기가 직접 이야기한 것은 아닌 것처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스스로 대법원이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법원행정처의 원세훈 국정원장 재판 관련 보고서에도 있듯이, 그런 주문들을 해가면서 '알아서 판사들 통제 잘하세요. 그러면 상고법원 부분은 저도 적극 검토는 해 보겠습니다'(라고 지침을 준 것이다)."
이러한 행태는 한국 사회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2015년 OECD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사법 신뢰도는 27%로 42개국 가운데 39위로 최하위에 머물렀다.
서강대 임지봉 교수는 "대통령은 사실 대법원장만 자기와 입장이 같고 자기 의중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만 딱 앉혀 놓으면 그 대법원장이 전국 3천여명 판사들에 대한 인사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대법원장 한명을 통해 전체 사법부를 통제할 수 있게 되는 위험한 구조"라고 지적했다.
건국대 한상희 교수는 "임헌주의의 가장 근간은 모든 국가작용이 법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담보하는 최후의 기관이 사법부에 있는 법원들"이라며 "그런데 대법원장과 그 주변에 있는 대법관 또는 법원행정처가 스스로 어떤 정치적인 전략을 세우고 정치적인 판단 속에서 전국의 법관들을 통제하려 했다는 것은 스스로 사법의 독립, 재판의 독립을 포기한 것"이라고 질타했다.
이어 "바로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재판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명령하고 있는 그러한 헌법 명령을 위반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며 "만약에 이런 이야기들이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중에 제기됐다고 한다면 당연히 이것은 탄핵소추 돼야 하는 것이고,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거쳐서 탄핵돼야 하는 사건"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