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본회의(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지난 1996년 어린이날, 난생처음 국회를 찾았습니다. 본회의장 천장에 달려 반짝반짝 빛나던 수백개의 조명이 지금도 기억에 또렷합니다.
본회의장에만 365개의 조명이 설치돼 있으니 어린아이였던 제 눈에 예뻐보였을 수밖에요.
365개 조명의 설치 배경은 정당팀을 출입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365일 24시간 일하라는 뜻에서 설치했다고 합니다. 1년 내내 국회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열심히 의정활동을 해 국민의 뜻을 밝히기 위해서요.
그런데 기자가 된 후 두번째 출입처인 정당을 맡은지 2주가 지나도록 아직 의정활동다운 의정활동을 취재하지 못했습니다.
18대 국회 말기에 당시 다수당이었던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이 예산안 처리 때마다 반복됐던 '날치기 몸싸움' 관행을 막자는 당시 야당(현 민주당)의 요구를 수용해 만든 국회선진화법이 화근이었습니다.
몸싸움과 날치기, 다수당의 일방적 입법과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만든 법인데, 여야 대립으로 법안 처리가 아예 안될 경우를 대비해 만든 패스트트랙을 두고 지금 여야는 싸우고 있습니다.
4월 임시국회 내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선거법 개정안·검경수사권 조정안을 패스트트랙에 태울지 말지를 두고 설전을 벌이다가 의사 일정 합의도 못 하고 있고요.
4월 임시국회에선 강원산불·포항지진 지원 등 민생 문제도 처리해야 합니다.
여야는 패스트트랙을 두고 각자 입장에 따라 '시대의 요구'라거나 '의회 민주주의의 폭거'라고 규정했지만, 국민들 입장에선 '그날의 요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국회가 되어버린 겁니다.
'의회의 꽃'인 상임위가 제대로 열린 적이 없거든요.
법제사법위원회는 이미선 헌법재판관의 인사청문회 보고서 채택 여부를 두고 여야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끝내 파행됐고, 여상규 위원장은 폐회를 선언하며 의원들에게 "넋두리나 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행정안전위원회에선 강원 산불을 계기로 국민의 염원이 된 소방직 국가직화 전환도 통과시키지 못했습니다. 한국당 이채익 의원은 23일 법안소위를 진행 중이던 행안위에 들이닥쳐 "여당이 협치를 파괴하고 책임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쏘아붙였습니다. 이 의원은 평소 소방직 국가직화에 찬성 입장을 밝히기도 한 터라 국민들 보기에 이같은 훼방이 더욱 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장외 규탄대회에서 황교안 대표, 나경원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와 참석자들이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하고 있다.(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한국당은 급기야 광화문 광장으로 뛰쳐나가 청와대까지 행진했고, "대통령은 김정은 대변인"이라는 막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앞서 있었던 일부 한국당 전·현직 의원들의 5·18 막말이나 세월호 막말은 구태여 언급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정치부 신참 기자의 눈엔 이 모든 파행이 패스트트랙 논의에서 제대로 '패싱' 당한 한국당의 분풀이처럼 보였습니다.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국회의장 주재 5당 원내대표 회동에서 "저 빼놓고 만나시지 말고 의회가 대화와 타협으로 갔으면 하는 바람"이라면서도 "만약 패스트트랙 태우면 20대 국회 없을 것 같다"고 말해 문희상 국회의장으로부터 "겁박은 누가 하는 거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으니까요.
거친 언사는 여당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의원은 "한국당, 4·19 혁명 때 국민에 총을 쏜 정권의 후신"이라고 말해 논란이 됐고, 이해찬 대표는 "내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잘 이겨서 지금 이른바 극우파들이 하는 차별과 혐오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결과를 갖고 오도록 노력했으면 한다"며 강성 발언을 했습니다.
결국, 아슬아슬했던 여야의 갈등은 패스트트랙을 계기로 폭발했습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24일 국회 의장실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선거제 개편안 및 공수처 설치법안 등 신속처리안건과 관련해 의장실을 점거하자 경호를 받으며 의장실을 빠져 나가고 있다.(사진=윤창원 기자)
24일 패스트트랙에 반대하는 바른미래당 오신환 의원의 사보임을 막기 위해 한국당 의원들이 문희상 국회의장을 찾아 갔는데, 자리를 피하던 문 의장의 손이 임이자 의원의 배를 스친 게 발단이었습니다.
임 의원이 "이러시면 성추행"이라고 외치자 문 의장은 두 손으로 임 의원의 볼을 감싸며 "이것도 성추행이냐"고 되받아치는 바람에 더 아수라장이 됐고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야당 여성 의원에 대한 문 의장의 '두 볼 감싸기'도 의문스럽지만, 임 의원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부 한국당 의원들의 발언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이채익 의원은 "결혼도 안 한 미혼 여성을 이런 식으로 성적 모욕 했다는 건 대한민국 국회의 치욕"이라고 했고, 송희경 의원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황에서 더더구나 느꼈을 수치와 모멸감이 어땠을지 심각하게 보고 있다고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성의 결혼 유무가 성적 수치심의 심각성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발을 디뎠던 국회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폭로한 야당 의원의 구속동의안 상정을 필리버스터로 막아냈던 곳, 그야말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곳이 국회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 지켜본 국회는 '이거 실화야?'하고 물을 만한 블랙코미디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럴 거면 본회의장의 365개 조명, 아예 꺼버리십시오. 제대로 일도 안하는데 전기요금이라도 아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