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사유가 있는 때에는 작량하여 그 형을 감경할 수 있다."
형법 제53조 '작량감경' 규정은 판사에게 유기징역 형기를 반 토막 낼 수 있는 재량권을 보장한다. 원칙적으론 실형을 벗어날 수 없는 피고인들까지 집행유예로 풀어줄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이다. '솜방망이 처벌', '유전집유 무전실형', '복불복 판결' 등 국민청원에 올라오는 단골 비판들의 밑바닥에는 견제 받지 않는 권력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다. CBS노컷뉴스는 지난 2019년 서울중앙지법 1심 형사사건 중 형법 제53조가 적용된 판결 925건(피고인 1020명)을 모두 분석했다. 작량감경은 얼마나 빈번하게 사용됐는지, 작량감경이 적용되는 합당한 기준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기준이 존재한다면 '국민들이 공감하는 정의'에 부합하는지 면밀히 살펴봤다. [편집자 주]
구속된 A를 대신해 다친 경찰관에게 누차 사과한 것은 A의 어머니였다. A는 10년 전에도 공무원의 직무집행을 방해하는 범죄를 저질러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받은 전과가 있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의 대부분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다"며 작량감경 해 형량을 반으로 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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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감옥에 보낸 어머니가 아닌 A 본인의 '진지한 반성'이 확인됐을까. 범행의 일부분은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A가 보이고 있다는 반성하는 태도란 무엇일까. 판사들은 어떻게 그 반성의 진정성을 평가하는 것일까.
◇'진지한 반성' 하니 형량 반토막 작량감경…타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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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가 2019년 서울중앙지법 1심 형사판결 중 작량감경이 적용된 925건(피고인 1020명)을 분석한 결과 541명(53%)에게 '진지한 반성'이 유리한 양형이유로 적용됐다.(판결문엔 작량감경 사유가 별도로 기재되지 않고 통상 '아래 양형이유 중 유리한 정상을 참작한다'고 갈음한다.)
특히 중범죄들이 배당된 합의부에서 '진지한 반성'을 인정받은 피고인 247명중 160명(64.8%)은 집행유예나 벌금형, 선고유예로 풀려났고 87명(35.2%)만 실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합의부에서 '진지한 반성'이 감형이유로 적용되지 않은 피고인 203명에 비해 집행유예가 선고된 비율이 2배나 높았다. 형사재판에서 '진지한 반성'은 작량감경의 주요 사유이자, 집행유예까지 이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치트키'인 셈이다.
죄질이나 범죄 전력(초범 여부), 피해자와의 합의 등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됐거나 피고인 혼자 힘만으론 어찌할 수 없는 조건이다. 그러나 '진지한 반성'은 피고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진지한 반성' 인정받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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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는 앞서 같은 유형의 범죄를 2번 저지른 전과가 있는 상습범이었다. 4년 전 장소도 같은 찜질방에서 잠든 아동을 성추행해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비슷한 준강제추행 범죄로 징역 4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성폭력처벌법에 따르면 B는 최소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고인이 반성하고 있다'는 이유 한 줄을 근거로 2년 6개월로 감형했다. 피해 여아와 부모가 B를 용서하거나 합의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가 다른 어떤 방식의 반성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판결문엔 드러나지 않았다.
◇범행 인정하면 덩달아 '진지한 반성'까지 OK…심리도 안해실제 재판 현장에서는 피고인이 제출하는 반성문이 '진지한 반성'임을 입증할 근거의 전부인 경우가 다반사다. 반성에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지, 다시 범죄를 저지를 소지가 없는지 등을 두고 따로 기일을 배정해 신중하게 심리하는 재판부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법정에서 범행을 순순히 인정하는 피고인에게는 '진지한 반성'까지 덩달아 인정해 주기도 한다. 상당 경우, '진지한 반성'이란 큰 의미 없이 유리한 양형이유 서두를 장식하는 액세서리로 쓰이는 셈이다.
분석 대상 중범죄(합의부) 판결에서 '범행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유리한 양형이유로 적힌 피고인은 256명이었고, 이중 217명(84.8%)은 '진지한 반성'도 함께 적용받았다. 피고인이 범행 자체를 인정하는 지 여부와 거기서 나아가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는지는 별개의 판단 영역임에도, 판사들이 '피고인은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다'고 관행적으로 쓰는 것 아닌지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기계적인 '진지한 반성' 인정이 거꾸로 피고인 인권을 침해할 여지도 있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재판에서 범행을 부인하는 것은 피고인의 권리다. 그런데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감형조건이 된다면 권리를 행사하지 말라고 압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반면 특수준강간을 저지른 가수 정준영의 경우처럼 범행을 부인하는데도 '진지한 반성'을 인정해 작량감경한 사례도 다수 있었다. 대체로 "범행은 사실이 아니지만 피해자가 괴롭다니 어찌됐든 미안하다"는 식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셈인데, 이를 진지한 반성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형사재판 경력이 10년 이상인 한 부장판사는 "1심은 유무죄를 따지기 바빠 양형 심리를 거의 하지 못하고 매번 비슷한 문구를 적는게 현실"이라며 "2심 역시 공판검사가 적극적으로 가중사유를 주장하지 않는 한 피고인의 합의 시도 등을 기계적으로 반영해 감형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평가 기준 없는 '진지한 반성'…적용도 서술도 "판사 마음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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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이고 심층적인 검증이 이뤄지지 못하다보니, 판사 개개인이 특정 범죄 유형에 대해 가진 인식이나 재판에 임하는 피고인의 태도 등에 대한 주관적 평가가 '진지한 반성' 판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실제로 사기 관련 혐의로 기소돼 작량감경을 적용 받은 피고인 72명 중 '진지한 반성'이 인정된 피고인은 16명(22.2%)에 불과했다. 중범죄(합의부) '작량감경' 대상 피고인 중 '진지한 반성'을 인정받은 비율이 54.9%인 것과 비교하면 한참 낮은 수준이다. 혐의를 모두 인정하거나 범행으로 인한 피해를 회복하는 조치를 취했음에도 '진지한 반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기죄 피고인도 25명 있었다.
반면 작량감경을 적용받은 성범죄자 178명 중에선 102명(57.3%)에게 '진지한 반성'이 유리한 양형이유로 적시돼 평균보다 높은 비율을 보였다. 이 중 37건은 피해자의 처벌불원이나 합의가 없는 경우임에도 피고인의 반성이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성범죄 전과가 있는 사람이 또 성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진지한 반성'을 인정한 사례도 12건이나 됐다.
물론 사기죄로 작량감경을 받은 피고인들 중에선 36.1%만 범행을 인정하는 데 그쳤다. 성범죄자(60%)의 범행인정 비율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지만, 성범죄자의 '진지한 반성'은 그러한 차이 이상으로 더 많이 받아들여졌다. 판사들이 사기범의 "반성한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믿지 않고, 성범죄자의 반성은 그보단 진정성이 있다고 판단한 셈이다.
마약사범의 경우에도 63명 중 55명(87.3%)에게 '진지한 반성'이 적용됐다. 마약사범은 투약증거가 명백해 수사단계에서부터 범행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고 호기심 또는 이미 중독 상태의 범행인 점 등이 감안되면서 더욱 쉽게 '진지한 반성'이 인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대중의 문제인식이 엄중해지고 있는 음주운전도 '진지한 반성'이 쉽게 인정되는 대표적인 범죄다. 작량감경이 적용된 음주운전 피고인 350명 중 328명(93.7%)은 이미 음주운전 전과가 있는 경우임에도 재판부가 '진지한 반성'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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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운전의 경우 초범은 대체로 약식재판에 회부돼 벌금형을 받고 2차례 이상 적발됐을 때에야 정식재판 대상이 된다. 3차례 이상 전과가 있거나 사람을 다치게 하면 비로소 실형을 선고 받고, 대부분은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수차례 음주운전과 집행유예가 반복되다 인명피해로 귀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피고인의 '진지한 반성' 여부를 심층적으로 심리하지 않고 작량감경을 한 대가다.
이미 전과 3범인 C에 대해 판사가 적은 작량감경 사유는 '잘못 반성' 단 4글자였다. 다시는 음주운전을 하지 않겠다며 '자동차를 팔았다'거나 '피해자에게 상당액수의 합의금을 줬다', (성범죄·뇌물범죄 등의 경우) '피고인이 이미 직장을 그만뒀다'는 등 진지한 반성의 근거를 서술한 판결문도 간혹 있지만, 이 근거들이 적절한지도 의문이다. 이마저도 대부분은 진지한 반성의 근거를 아예 기재하지 않는다.
교통범죄 사건을 전담했던 한 판사는 "단독판사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판사들이 업무량이 많아 판결문을 기계적으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소홀한 판결문의 방패막이가 될 순 없다"며 "'다시는 재범하지 않겠다'는 반성과 각오를 인정한 근거가 무엇인지 기재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지적했다.
◇형벌 목적이기도 한 '진지한 반성'…어떻게 반영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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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이 애매하다고 해서 '진지한 반성' 자체를 양형에서 아예 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형벌은 범죄자에 대한 응보뿐 아니라 해당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일반예방) 범죄자가 다시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재사회화(특별예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목적에서 범죄자의 '진지한 반성'은 형벌의 수위를 결정할 때 중요한 잣대가 된다.
대법원도 '반성과 가책의 유무'를 양형의 요소로 언급하고 있고, 현재 시행 중인 44개 범죄군의 양형기준 대부분에도 '진지한 반성'이 일반감경요소로 들어가 있다. 그러나 △반성하는 경우 정말로 재범 위험성이 낮아지는 지 상관관계가 입증된 적이 없다는 점이나 △반성의 개념 자체가 불명확해 그 존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점 △피고인이 반성을 꾸며낼 여지가 충분하다는 점 등에서 판결문에 '진지한 반성'을 서술하기까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교육 수준이 낮거나 심리적·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반성하는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려운 피고인이라면 양형상 차별받을 소지가 있다는 문제도 있다. 반대로 특정 피고인에게는 재판부가 직접 '진지한 반성'의 근거를 찾아주기 위해 유난히 세심한 배려를 해 논란이 되기도 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농단 뇌물·횡령 사건에서 서울고법이 이 부회장의 반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회사에 준법감시위원회를 설치하라고 제안한 것이 대표적이다.
법원이 직접 '감형 가이드라인'을 줬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재판부는 결국 준법감시위를 유리한 양형이유로 반영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부회장에게 작량감경을 적용해 형량을 반으로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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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재판 과정에서 판사가 피고인에게 뭘 잘못했다고 생각하는지, 원인이 무엇인지 등을 집요하게 묻고 그 과정에서 사건을 마주하게 해야 한다"며 "그런 과정도 없이 집행유예로 다시 사회에 나가니 피고인 본인이 벌을 받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고 지적했다.
피고인의 재사회화를 위해서라도 '진지한 반성'을 심리하는 기준이나 방법이 더욱 연구돼야 한다는 것이다. '진지한 반성'에 대한 평가가 결국 주관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면 양형에 미치는 영향력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통계·분석 도움: 법무법인 케이에스앤피 법과인간행동연구소(김상준 대표변호사·홍성범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