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합뉴스북한은 지난 2012년 4월 13일 헌법을 개정하며 서문에 '핵보유국'임을 명기했다. 이어 2017년 11월 29일에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 15형 시험발사를 계기로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영변 핵 단지를 방문한 적이 있는 미 스탠퍼드대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북한의 현재 핵능력에 대해 핵무기 45개를 만드는데 필요한 핵물질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한 바 있다.
북한은 지난 2016년 수소탄 시험에 이어 올 초에는 초대형 수소탄 개발 성공을 밝히기도 했다. 국제 사회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북한은 이미 강력한 핵보유국인 것이다.
北 핵보유국 선언에도 영변 핵시설 재가동 정황
그런데 핵 무력을 완성했다는 북한이 최근 다시 영변 핵시설을 가동하는 징후가 나타났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연례 보고서를 통해 북한이 7월 초부터 냉각수 배출을 비롯해 영변 5MWe 원자로를 재가동한 정황이 있다고 밝혔다. 올 2월 중순부터 7월초까지는 폐연료봉 재처리시설인 방사화학 실험실이 가동된 정황도 관측됐다고 보고했다.
4년 전 핵 무력 완성 선언이후 영변 원자로 가동을 멈춘 북한이 재가동에 나선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여기에는 핵보유국 유지를 위한 통상적인 핵 활동을 기본으로 해서 국방력 강화, 대미 협상력 제고 등 북한의 다목적 포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영변 핵 단지. 연합뉴스영변 원자로 1년 돌려도 4kg 플루토늄 추출…핵무기 1개 해당
문제의 영변 5MWe 원자로는 시설 노후화로 연간 플루토늄 생산량이 4kg 정도로 추산된다. 1년 간 원자로를 돌려도 핵탄두 1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플루토늄과 우라늄 농축으로 이미 수 십 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북한임을 감안하면 그렇게 많은 양으로 볼 수는 없다.
따라서 군사 기술적 측면보다 북미 대화를 압박하는 측면을 더 봐야한다는 견해가 나온다.
북한은 지난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영변 핵단지 폐기를 조건으로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했으나, 영변 폐기 이상(영변+α)을 요구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로 회담이 결렬된 바 있다. 대북 제재를 해제하기에는 영변 핵 단지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인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미 바이든 행정부와 북한의 대화가 개시된다면 북미협상은 과거 협상이 결렬된 하노이 논의 지점, 즉 영변이 기준점이 될 개연성이 높다. 물론 북한은 영변의 값을 더 높게 부를 공산이 크다. 아무튼 북한으로서는 영변 핵 단지가 결코 값이 싼 협상 카드가 아님을 미리부터 부각시킬 필요가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北 대외 메시지, 영변 핵 단지 결코 싸지 않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영변 핵시설의 재가동 징후는 실제적인 핵 물질 생산보다는 하노이 회담이후 중단된 북미협상의 재개를 앞두고 영변 핵시설이 여전히 유효한 대미 협상카드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목적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핵능력 고도화 맥락에서 영변 핵 단지 여전히 유효
반면 북한의 영변 원자로 재가동과 관련해서는 군사 기술적 차원에서 플루토늄 추출만이 아니라 수소탄과 증폭핵분열탄 등 전반적인 핵능력 강화 맥락을 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원자탄을 넘어 증폭핵분열탄과 수소탄 등 보다 위력적인 핵무기를 제조하는데 핵심적인 삼중수소(트리튬)을 만들 수 있는 시설이 바로 영변 원자로이기 때문이다.
삼중수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리튬-6에 대량의 중성자를 쏘여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북한에서 대량의 중성자를 공급할 수 있는 장치는 영변에 있는 5MWe 원자로와 IRT-2000 연구로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삼중수소는 반감기가 12년 3개월로 짧기 때문에 만들어진지 6년만 지나도 핵폭발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수소탄·증폭핵분열탄 만드는 삼중수소 제조 가능한 곳이 영변
안진수 전 원자력통제기술원 연구원은 "삼중수소는 수소탄과 증폭핵분열탄의 추가 제조에 필요할 뿐만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놓은 수소탄과 증폭핵분열탄의 성능유지를 위해서도 중간 중간에 삼중수소 보충 등 관리가 필요하다"며, "이런 삼중수소를 만들 수 있는 시설이 영변 원자로"라고 설명했다.
안 연구원은 아울러 "미사일 등 투발수단에 수소탄을 탑재하기 위한 탄두의 소량화·경량화 작업에는 무엇보다 기폭장치를 줄여야하는데, 여기에는 부피와 중량이 많이 나가는 우라늄 대신 플루토늄을 쓸 수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영변 원자로는 낡았지만 여전히 필요한 시설"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지난 86년부터 최근까지 영변 원자로에서 추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약 50kg의 플루토늄 생산량이 핵능력 고도화를 꾀하는 북한 입장에서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닐 것"이라는 게 안 연구원의 진단이다.
북한이 그동안 쌓아온 핵 시스템을 유지하고 더 발전시키기 위한 차원으로 영변의 핵 활동 재개를 봐야한다는 얘기이다.
김정은 '대결에도 대화도 준비하라'…핵능력 고도화 메시지 대외 표출
북한이 영변의 폐연료봉 재처리시설인 방사화학 실험실 가동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점이 지난 2월, 냉각수 배출 등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한 것으로 보이는 시점이 지난 7월 초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올해 초 8차 당 대회 사업총화 보고에서 "중단없는 핵무력 건설" 방침을 밝힌 바 있다. "핵 기술을 이미 고도화하여 핵무기의 소형화와 경량화, 규격화, 전술무기화를 마쳤고, 이후에도 핵 고도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면서, 핵선제 및 보복 타격 능력의 고도화, 핵 잠수함과 주중발사핵전략무기의 보유를 과업으로 제시했다.
북한이 지난 1월 8차 당대회 기념 열병식에서 공개한 '북극성-5ㅅ'. 연합뉴스김 위원장이 핵능력 고도화를 위한 구체적인 과업을 제시한 만큼, 과업 관철을 위한 후속조치가 필요하고, 2월 중 영변 방사화학실험실 가동도 이런 차원의 일환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이후 6월 17일 당 중앙위 3차 전원회의에서는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 동향을 분석한 뒤 "대화에도 대결에도 다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특히 대결에는 더욱 빈틈없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미국과의 대결과 대화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수단으로 북한이 주목한 것이 바로 기존 핵 능력의 정비·강화·발전으로 관측된다.
7월 초 영변 원자로의 재가동 정황은 기본적인 핵 활동을 재개함으로써 핵 능력 강화의 메시지를 외부에 전하는 의도가 있다. 대북제재와 코로나19, 자연재해, 식량부족 등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바이든 정부가 과거 오바마 정부처럼 전략적 인내 정책으로 수렴될 경우 핵능력 고도화로 나가겠다는 메시지를 부각시킴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의 북미대화를 압박한 셈이다.
"北, 군 열병식에 무엇을 들고 나오지는 주목해야"
북한이 핵능력 강화의 맥락에서 영변 핵시설 재가동 정황 이후 어떤 동향을 보일지는 불투명하다. 일단 오는 9월 9일 북한 정부수립기념일이나 10월 10일 당 창건 기념일에 개최할 것으로 예상되는 군 열병식이 주목된다.
이정철 서울대 교수는 "영변 핵시설 재가동 정황은 북한이 미국을 압박하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본다"며, "북한의 향후 대응 동향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열병식에서 북한이 무엇을 들고 나오는지를 봐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내치집중으로 군사동향 수위조절 전망도
북한이 이처럼 핵시설 재가동 정황과 열병식 준비 등 군사적 동향을 보이고 있으나, 전략 도발로 판을 깨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이와 관련해 김 위원장은 최근 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주재하며 자연재해 방지와 코로나19 비상방역, 인민소비품 생산증대, 식량생산 증대 등 민생·경제 현안을 집중적으로 챙기면서도 군사 및 대외 분야 언급은 하지 않았다.
임을출 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당 정치국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은 김 위원장이 현재 갖고 있는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준다"며, "영변 핵시설 재가동과 열병식 준비동향이 있기는 하나 과도한 군사 활동은 보여주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8차 당 대회에서 결정한 국가방위력 개선 사업도 대내외 정세를 감안하면서 수위와 속도 조절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