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 판매부수 100만부를 돌파한
<82년생 김지영>(2016)은 '독박 육아'에 허덕이고 있는 젊은 기혼여성들의 폭풍 공감을 이끌어냈다. 우리 나이로 서른 네 살인 주인공 김지영씨는 결혼 2년 만에 낳은 딸 하나를 슬하에 둔 '경단녀'(경력단절 여성)다.
작은 홍보대행사에서 근무하던 김지영씨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배불러까지 지하철 타고 돈 벌러 다니는 사람이 애는 어쩌자고 낳아?"란 소리를 듣고, 눈물을 왈칵 쏟는다. 회사에서 임신한 직원들의 출퇴근을 30분 늦추도록 배려하자, 한 남자동기는 "30분을 날로 먹어" 좋겠다고 말한다. 홧김에 정시 출근을 고집한 김씨는 정작 퇴사 시엔 울지 않았다. 남편 정대현씨의 직장이 더 안정적이고 수입이 많다는 게 표면적 이유지만
"그런 모든 이유를 떠나 남편이 일하고 아내가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김씨가 회사를 그만둔 2014년, 대한민국 기혼여성 5명 중 1명은 결혼, 임신, 출산, 어린 자녀의 육아와 교육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통계를 담담히 덧붙인다.
8년이 흘렀지만, 김지영씨의 고민과 괴로움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9월 발표한 '2022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5~54세 기혼여성 중 경력단절 여성은 약 144만 8천 명으로 집계됐다. 재작년 대비 5만 7천 명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전체 17.4%에 달하는 비율이다. 일을 그만둔 이유는 육아(43.2%), 결혼(27.4%), 임신·출산(22.1%) 순이었다.
결혼·육아로 일을 쉬고 있는 '실사판 김지영'들은 도처에 가득하다. 문제는
자신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자녀를 가진 이들조차 이같은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긴 버겁다는 점이다. 암묵적으로 생계부양은 남성, 육아·가사는 여성의 몫으로 간주하는 사회에서 기혼여성의 일·가정 양립은 먼 얘기다.
올해 결혼 10년차에 접어든 조모(34)씨는 2013년 신혼시절 첫 딸을 낳았다. 복지기관에서 일하던 그는 출산휴가만 90일을 쓰고 복귀했다. 5년간의 공백을 두고 원하던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조씨는 "6년 전과 마찬가지로
육아휴직은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다"며 "한국이 아무리 '좋아졌다, 좋아졌다' 하지만 (육아 지원에 있어서는) 멀었구나 싶더라"고 말했다.
출산휴가는 '당연한' 권리로 권하면서도 육아휴직에 대해선 부정적인 회사의 모순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었던 조씨는 결국 둘째를 임신한 지 7개월째 되던 2018년 10월 제 발로 직장을 걸어 나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육아는 혹독했다. 둘째가 돌이 되자마자 코로나19가 터졌다. 발생 첫 해인 2020년 초등학생이 된 큰딸은 모든 행사가 '비대면'으로 전환되면서, 입학식도 하지 못했다. 갓 학교에 들어간 1학년임에도 등교하는 날은 손에 꼽았다. 자연히 매일 집 안에서 삼시세끼를 챙겨주며 아이들과 씨름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스마트이미지 제공코로나 시국에 임신해 출산한 '돌배기' 막내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예쁘지만, 돌봄의 고단함을 다 덜어주지는 못한다. 조씨는 "지금도 둘째는 감기나 수족구에 걸리면 열흘씩 어린이집에 안 간다. 막내는 형한테서 옮아 형이 끝날 때쯤 또 아프기 시작한다"며 "그럼 2주 정도는 병원만 오가며 꼼짝없이 집에 있어야 한다. 어린이집에서 감염됐어도 즉시 등원이 금지된다"고 토로했다.
조씨는 아이의 작은 생채기 하나에도 벌벌 떠는 엄마와는 거리가 멀다. 스스로를 가리켜 "애를 쉽게 키우는 편"이라면서도 "그런데도 쉽지가 않다. 지겹고 화가 나는 일은 매일 연속이라 저녁엔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중학교 교사인 남편은 퇴근 이후, 주말마다 손을 보태주지만 역부족이다. 친정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양육을 도맡아야 하고, 맞벌이라 해도 한 명은 (어린이집 등에서) 픽업을 하고 밥도 줘야 하잖아요. 그 일은 주로 엄마가 하니까 정신없고 바쁜 삶을 살아야 하는 거 같아요. 둘 중 일을 중단해야 하면 그건 당연히 엄마인 거죠. 수입도 남편이 더 많고, 가사나 육아에 접근하는 마인드 자체가 전혀 다르니까요." 때로는 같은 여자끼리도 '속 모르는 얘기'를 할 때가 있다. 조씨는 미혼인 친구가 오랜만에 만나서 한 얘기가 "넌 내일 (아침에) 늦게 일어나도 되지?"라는 데 약간 뜨악했다고 밝혔다.
"10년 넘게 직장 생활하는 그 친구가 보기엔 제가 부러울 수도 있겠죠. 그런데 육아나 집안일은 퇴근도 없고 정도(正道)도 없어요. 물질적 보상도 없고 능숙해지지도 않는 것 같아요." 본인도 '워킹맘'이던 시절이 있었기에, 한편으론 더 씁쓸한 말이기도 했다. 대학생 때 보육교사 자격증을 땄던 그는 현재 보육 장기 미종사자를 대상으로 하는 직무교육을 신청한 상태다. 다만, 비슷한 상황에서 재취업 또는 복직을 했다가 힘에 부쳐 그만둔 경우도 자주 접하다 보니 마음이 복잡하다. 그는
"막내가 최소 5살, 넉넉히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기까지 일을 다시 하기 힘들 것 같다"며 "학교는 어린이집보다 일찍 끝나서 더 손갈 일도 많다더라"고 말했다.
소설 속 김지영과 동년배로 초등학생 남매와 생후 15개월 막내를 양육하는 A씨의 사례도 비슷하다. 본래 학원에서 논술을 가르쳤던 그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거의 '오열' 수준으로 눈물을 흘렸다.
"정말 깊은 아픔과 어려움은 역시 각자의 몫이구나, 라고 느껴져 서글펐어요. 남편도, 가족도, 사회도 긴밀하게 도움을 주고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 고민하게 된 시간이랄까요."
결혼 전에는 출산에 딱히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되레 먹고살기 바빠 남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반드시 낳아야 한다는 당위성보다는 '상황과 여건이 되면' 겪는 조건부 이벤트라고도 생각했다. 단지 외동으로 자란 배우자의 의견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A씨는 밝혔다.
막상 첫째를 낳아 길러보니 육아는 총성 없는 전쟁이었다. 뼈를 갈아넣는 듯한 '현타'와 스트레스로 "쫑 내고 싶었"던 나날이 이어졌다. 시댁에서 일부 지원군으로 나서곤 있지만 "90% 이상은 엄마의 몫"이라는 게 A씨의 말이다.
계획 없이 둘째가 생겼을 때는 산후우울증도 찾아왔다. 주변에서 얹는 말은 전부 간섭으로 다가왔다. 스트레스가 너무 컸지만 주변 가족들이 이해하지 못해 홀로 이겨내야 했다. A씨는 "모든 상황과 환경의 주인이 내가 아니었다"고 했다. 첫째·둘째까지는 사명감으로 모유 수유를 했지만, 막내부터는 '완모'를 포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미 망가진 몸은 '회복 불능'이라 볼 때마다 슬퍼진다.
유능함을 인정받던 직장은 결혼과 동시에 내려놓은 지 오래다.
학업 등 남편의 타임라인에 맞춰야 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는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오면 언제든 다시 일을 시작해도 좋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아쉬움이 컸지만 남편의 미래와 육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전했다.
재취업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10년 이상의 공백을 메꿀 자신이 없다고 했다.
"다시 시작하려고 해도 이젠 기운이 없어서 못하겠어요. 진이 다 빠졌어요. 진심으로 정부가 육아도 취업으로 인정해줘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에요. 나라의 인재를 키우는 건데 '네 자식, 네가 키우는데 뭐'라는 인식 자체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가족을 포함해 '엄마'란 역할에 주어지는 사회적 기대가 짐스럽기도 하다. 자기 전 '어쩌다 이렇게 됐나'를 곱씹다가 우는 날도 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막내가 생기고부터 남편이 설거지와 아이들 목욕 등 가사·육아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노력한다고는 했지만, '아빠가 뭔지 잘 몰랐던 것 같다'는 게 남편의 해명이다.
스마트이미지 제공물론 상대적으로 나은 여건에 있고, 육아에 전념하는 상황을 만족스러워하는 기혼여성이 없는 건 아니다. 4살짜리 쌍둥이 형제를 전담해 키우고 있는 30대 후반 B씨는 "인공수정으로 어렵게 임신이 된 상황에서 우리 부부를 닮은 아이를 정말 갖고 싶었다.
아이들을 잘 양육하고 싶었기에 일을 쉬는 것이 억울하거나 힘들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육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 원했던 남편은 코로나 유행상황이 악화돼 재택근무를 할 당시에도 아이들 상황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밥을 먹이거나 놀아주는 일, 설거지와 빨래 등도 모두 분담했다. 주말엔 B씨에게 자유시간을 주기도 했다. 친정과 시댁도 종종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그런 B씨도 또래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무리 없이 감정이입이 된다. 그는 육아를 부부 중 어느 한쪽의 책임으로 고정시키려는 시도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 생명이 태어나 자라고 커가는 과정에서 부모라는 자리는 너무 귀하고 대단한 일이 맞아요. 그렇지만 갑자기 바뀐 삶의 패턴이 무겁단 점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누구나 피하고 싶을 거에요. 결혼·출산을 저어하는 여성을 '이기적'이라 한 그 사람들이 바로 이기적이라 생각해요." A씨도 "결혼하고 출산을 하면 신체의 변화를 느끼고 절망해야 하는 것도 오롯이 여성들의 몫이다.
남자들은 이때 여자들의 심리, 변화 등 어떤 것도 100% 공감하지 못한다"며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영역이기에 무책임한 비난을 해선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도적 차원의 지원이 있다 해도 누구도 선택을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제공통계는 현재까지도 육아부담이 여성에게 좀 더 기울어져 있는 무게추를 보여준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1년도 가족과 출산조사'에 따르면, 법률혼 또는 사실혼 관계에 있는 남녀 응답자 5천여 명 중 평일에 남성이 육아에 들이는 시간은 98분, 여성은 291분으로 나타나 여성이 남성의 3배 가까이 많았다. 그나마 출근이 없는 주말에는 남성 262분, 여성 373분으로 격차가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서로가 느끼는 온도 차도 뚜렷했다. 여성 응답자는 평균 본인의 육아분담비율이 78.1%, 배우자의 분담율이 22.7%라고 답변한 반면 남성 응답자는 본인의 육아분담율이 43.5%, 배우자의 비율을 56.5%라고 답했다. '독박 육아'라는 말에 대한 인식의 간극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부부가 모두 직장생활을 하는 경우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9년 기준 '맞벌이 가구' 여성의 돌봄·가사 시간은 하루 3시간 7분이었고, 남성은 54분에 그쳤다. 이러한 '선배 맘'들의 고충은 젊은 여성들의 결혼·출산 기피로 연결되고 있다. 인구보건복지협회 조사에 따르면, 추후 결혼 의향이 없다고 밝힌 싱글남녀 중 여성(56.0%)의 비율이 남성(43.0%)보다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관련 기사: 'MZ세대 남녀 '동상이몽' 심화…멀어지는 결혼·출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