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집필한 정서경 작가. tvN 제공"20년 정도 글을 쓴 거 같은데, 원동력은 직업 정신 같아요." (정서경 작가)
스크린에서 정서경 작가의 필모그래피는 화려하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 그리고 '독전'까지. 이중 많은 작품을 박찬욱 감독과 함께했기에 그는 박 감독의 '파트너'로도 유명하다.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그런 정서경 작가의 독립적 재능을 가감없이 발휘한 작품이었다.
'작은 아씨들' 종영 이후 가진 화상 인터뷰에서 정서경 작가의 얼굴은 시종일관 밝았다. 스릴은 물론, 때로는 섬뜩함까지 안겼던 '작은 아씨들'의 분위기와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1시간 가량 이어진 인터뷰에도 전혀 지치지 않는 모습에 작품을 이끌어 가는 에너지를 엿볼 수 있었다.
'작은 아씨들'은 결코 보기 편한 드라마는 아니다. 돈에 중심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돈이 우리의 영혼에 어떤 의미인가'를 끊임없이 묻는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은 정서경 작가의 이야기와 그 속도를 따라가며 12부까지 동행했다. 12회 자체 최고 시청률 11.1%(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시청률과 인기를 떠나 '작은 아씨들'에 대한 정서경 작가의 애정은 두텁고 담대했다. 작품을 향한 이야기라면 떨리고 두렵지만,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존중은 하되, 지나치게 흔들리지 않는다. 거칠 것 없이 늘 활짝 열려 있는 귀가 대중의 비판과 지적을 다음 작품의 양분으로 삼는다. 차기작에서 정서경 작가의 더 나은 변화가 기대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음은 정서경 작가와의 일문일답.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 스틸. tvN 제공Q 드라마는 이번이 '마더'에 이어 두 번째 작업이다. 영화 시나리오 작업과는 달랐을 것 같고, 매회마다 시청률 부담도 있었을 듯한데A '마더'는 원작이 있어서 큰 흐름을 갖고 있었다. 12부작 드라마('작은 아씨들')를 시작하면서 한 사람이 12개 이야기를 머릿속에 한꺼번에 담고 시작할 수 있나, 이런 의심이 처음에 들었다. 그래도 일단 무조건 시작을 해봤고, 쓰면서 과정과 결말을 만들어 갔던 것 같다. 영화와 드라마가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길이에 있는 것 같다. 크기와 깊이감은 얼마나 다를지,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거기 들어가 있을지 그런 고민을 하면서 썼다. 또 드라마에서 구현될 수 있는, 더 쉽게 또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장점을 모아서 드리자고 생각하면서 썼다.
시청률은 첫 회부터 너무 잘 나와서 감사하고 놀라운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런데 이 정도 시청률이 김희원 감독님에게는 좀 실패한 시청률이라는 걸 깨닫고 거기서 한 단계 더 올라가면 만족이라고 생각했다. 시청률에 대해선 사람들에게 너무 기뻐하는 인상을 주지 않는 거면 됐다. (웃음) 내용에 관해서는 매주 너무 떨렸는데 멘탈(정신) 관리는 잘 자면 언제나 잘 잊어버리는 것 같다.
Q 시놉시스가 없는 대본이라고 들었는데 가장 안 풀렸던 부분은 어떻게 돌파했을까A 이야기 처음엔 시작하는 힘으로 어떻게든 왔고 내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였기 때문에 2시간까지는 어떻게 풀게 된다. 그런데 3회에 오니까 이 드라마가 어디로 뻗어나가야 될 것인지 그런 동력을 찾기가 좀 힘들었다. 그래서 인물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 일단 들어가서 바닥을 치고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결국 인주(김고은 분)가 자기 마음 속에 감춰져 있던 죽은 동생을 찾아내고 이 가난과 공포의 기억으로 돈에 대해 달려가는 동력을 얻게 된다.
Q '돈에 대한 욕망이 어디에서 왔는지, 돈이 영혼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묻고 싶다'는 기획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본인이 결국 내린 답은A '가난한 세 자매에게 엄청 큰 돈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질문에서 한번 시작을 해봤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돈의 의미가 계속해서 변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이었다가 또 가족이라는 의미가 됐다가 자기 목숨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회적인 의미로 변해 갔다가 결말에는 처음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큰 돈이 다시 주어진다. 세 자매가 큰 돈을 가져가는 결말이라면 이 돈이 어디서 왔는지 처음부터 짚어서 보여주자는 생각을 했다.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 스틸. tvN 제공처음에 세 자매가 이 돈을 받았을 때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잘 알지 못했고 마지막에 끝났을 때는 그것을 다 지켜보았기 때문에 의미가 굉장히 달라졌을 거다. 마지막에 세 자매가 돈을 받았을 때는 단순히 무언가를 살 수 있고 더 많은 부를 얻는 그런 의미의 돈이 아니라 이걸로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많은 돈이 주어진 의미가 무엇일까, 이렇게 생각하는 어떤 기회나 변화의 의미로 봤다. 주제와 돈을 둘러싸고 인물들이 각각 서로 다른 입장을 대변하기를 바랐다.
Q '정란회'라는 조직은 어떻게 탄생했을까A 한국 현대사를 읽으면서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되게 단순하게 기술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날마다 뉴스를 보면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던 사건들이 그 뒤에서 하나로 연결돼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 현대사에서 받는 인상들과, 하루하루 뉴스에서 받는 인상들을 모아 어떻게 보면 '음모론적'인 가상 조직을 생각해봤고, 이 조직이 있어 우리 현대사를 설명할 수 있다는 상상이 가능하도록 꾸며보고 싶었다.
Q 베트남 넷플릭스에서 '작은 아씨들'이 베트남전을 왜곡했다며 퇴출 당하기도 했는데A 돈의 기원으로 베트남 전쟁을 생각했다. 베트남 전쟁은 우리나라가 경제 부흥을 시작한 시점이기도 해서 그랬다. 현지의 관점에 대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의 사실 관계를 다루거나 정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같은 반응을 크게 예상하지 못했다. 반응을 듣고 보니 그럴 수 있겠더라. 글로벌한 시장에서 드라마를 집필하면서 시청자들의 반응을 더 세심하게 살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됐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피드백과 시청자들 의견을 많이 본다면 그 이유는A 이 드라마에서 가장 해보고 싶은 게 속도감이었다. 1~2회를 날아가는 것처럼 해볼 수 없을까. 우리가 차를 탈 때 막 급발진해서 목이 뒤로 꺾이는 것 같은 느낌 있지 않나. 그런 느낌으로 달려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면 사실 개연성 같은 게 희생될 때도 있고, 인물의 감정을 따라갈 수 없는 순간들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시청자들이 이 속도에 맞춰 달려주시고, 미친 드라마라고 하시더라. 그게 너무 좋았다. 제가 인물을 많이 운영하니까 각 관점에서 이야기를 바라보지만 반응에 대해서는 제가 잘 따라가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서 많이 본다. 의외로 깜짝 놀라고, 내가 여기서 또 놓쳤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다음 작품을 잘 쓰기 위해서, 그렇게 놓치지 않기 위해 보고 기억하려고 한다.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 스틸. tvN 제공사실 스튜디오드래곤 사람들이나 저희 감독님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저 분들만 믿고, 괜찮다고 하면 정상이겠지 생각했는데 나중엔 저 사람들도 좀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제가 정상적인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좀 없다.
Q 하지만 그럼에도 작품 속 독특한 캐릭터, 특히 주체적인 존재로서 개성을 뚜렷하게 가진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사랑 받았다A 캐릭터를 구현할 때는 언제나 이 인물이 어떤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제일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가진 엔진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쓰게 된다. 초반에 주변 사람들한테 '왜 캐릭터를 호감 가게 그리지 않느냐'는 반응을 많이 들었다. 시청자들은 주인공을 좋아할 준비를 하고 있을텐데 싫은 지점을 집어넣어서 왜 방해하느냐는 거죠.
그 질문을 받고 생각해 보니까 이제까지 작품을 쓰면서 시청자들이나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특성을 캐릭터에 한 번도 넣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럴 수가 있나 싶어서 뒤져보니 쉽게 좋아할 수 있는 장면이 없더라. 저는 캐릭터를 만들 때 일단 우리가 좋아하지 않을 만한 장면들, 이 캐릭터의 결함들로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캐릭터가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 같다.
Q 최근 좋은 퀄리티의 K-드라마가 전세계적 사랑을 받고 있다. 꾸준한 인기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A 이번에 스튜디오드래곤 제작진을 만나 함께 드라마를 하면서 정말 놀라고도 두려웠던 부분이 무엇을 생각해도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너무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이렇게 좋은 퀄리티의 작품을 만들 만한 내용이어야 할텐데, 그렇게 수준 높은 내용과 또 윤리관을 갖추고 있어야 될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잘 나가는 자동차에 탄 초보 운전자 같은 기분이 좀 들었다. (웃음) 이제 하드웨어가 갖춰져 있으니까 이에 걸맞는 좋은 작품들을 써내려가면 되지 않을까.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집필한 정서경 작가. tvN 제공Q 많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파트너' 박찬욱 감독도 피드백을 남겼는지A 감독님과 제가 원래 서로 대본을 보여주고 이런 사이가 아닌데 중간에 굳이 대본을 보내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보내드렸는데 예상과는 달리 너무 재밌다고 하셨다. 토론토에서도 뵈었는데 드라마를 매번 공개된 밤이나 다음날 챙겨보고 계시더라.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그런 걸 보니 재밌어하신 것 같다. (웃음)
Q 박찬욱 감독과 함께 한 영화 '헤어질 결심'이 이번 오스카(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주요 후보에 오를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A 오스카 주요 후보가 된다면 너무 영광이고 기쁠 것 같지만 아직 안됐으니까. (웃음) 칸영화제에서 처음 봤을 때 '헤어질 결심이' 갖고 있는 가치는 상을 받는 것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이 울리는 지점은 가장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영역이고, 주목을 받는 것은 또 다른 문제 같다. 칸영화제에서 상을 받을 때 너무 기뻤지만 제가 가장 기대하고 원하는 것은 이 작품이 해외에서 개봉하고 시상식 등에서 주목 받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관객들에게 깊은 곳에서 울림을 만들어내면 제일 기쁠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에서 좋은 성과를 받으면 기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