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외교부 장관이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2018년 대법원의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국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조성한 재원으로 판결금을 대신 변제하는 방안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정부의 일제 강제징용 해법이 '백기투항' '외교치욕'이라는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반면 일본 측은 '외교적 완승'에 표정관리하면서 일본도 좀 더 양보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여유마저 부리고 있다.
실제로 일본 언론에 따르면 집권 자민당 의원들은 "한국이 잘도 굽혔다. 일본의 요구는 거의 통했다"는 등의 평가를 내놓으며 흡족한 모습이다.
이로써 한일 간에 일단락 된 강제동원 문제는 대립전선이 국내로 옮겨지게 됐다.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의 내달 미국 국빈방문 이벤트를 집중 부각하며 한미일 협력구도 속에 한일 과거사 문제의 '종결'을 기정사실화하려 한다.
아울러 정부 입장에 우호적인 전문가들이 나서 대대적 여론 조성을 시도하며 반대론자들과의 한판 승부에 들어갔다. 2015년 한일 종군위안부 합의 때 익히 경험했던 일들이다.
당시 일부 전문가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대승적 결단'이라고 평가했지만 따가운 여론에 밀려 점차 발을 뺐다.
급기야 1년 뒤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대선 국면에선 여야 주요 대선주자 모두가 위안부 합의 파기 및 재협상을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잘못된 외교의 결과는 그 자체로 국익을 해침은 물론, 이후로도 오랜 내분과 불필요한 국력 소모로 이어진다는 교훈을 줬다.
당시 일본 외무상으로서 위안부 합의를 얻어냈던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이번에 더 큰 승리를 거머쥔 채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바다 건너 한국의 내홍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일본으로선 더 이상 좋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설령 한국의 강제동원 피해자 일부가 법적 소송을 지속하며 정부 해법을 수용하지 않더라도 일본은 잃을 게 없다.
만약 차기 한국 정부가 이번 결정을 뒤집는다고 해도 일본은 한국을 '못 믿을 나라'로 매도해 버리면 그만이다. 한국으로선 어떤 경우에도 손해를 입는 함정을 스스로 판 셈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국내에서 수혜 아닌 수혜를 보는 곳도 있다. 강제동원 해법을 논하는 국면에 갑자기 등장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다.
전경련은 일본 측 파트너 격인 게이단렌(경제단체연합회)과 '미래청년기금'(가칭)을 공동 조성하는 방안을 검토함으로써 정부 결정을 측면 지원했다.
전경련은 6일 강제징용 해법이 발표된 직후 "게이단렌과 그간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논의해 왔으며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양국 정부 간 합의를 계기로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구축 방안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는 "외교 실패를 감추기 위한 성동격서" "전형적인 물타기"(피해자 측 임재성 변호사)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미래 세대'를 앞세워 일본의 배상 책임을 희석하고 시선을 돌리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때마침 전경련이 지난달 27일 공개한 '청년세대(MZ) 대상 한일관계 인식 설문조사'도 이런 의구심을 뒷받침한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강제징용 문제 해법으로 최근 거론되고 있는 '제3자 대위변제 방안'에 20‧30 세대의 52.4%가 한일관계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 응답했다.
이는 정부 해법에 대한 일반국민 여론조사(1월. MBC)에서 찬성이 22.9%(반대는 63.7%)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전경련은 또 이들 청년세대의 70% 이상이 한일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면서 과거보다 미래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의미 부여했다.
전경련이 청년세대만을 대상으로 한일관계 관련 설문조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마치 정부의 해법 발표가 임박했음을 예견한 듯한 것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3.1절을 앞두고 실무적 차원에서 결정한 것으로 다른 의미는 없다"고 말했다.
어찌됐든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에 연루돼 위상이 추락했던 전경련은 최근 윤석열 캠프 출신의 김병준 전 부총리를 간판으로 내세운데 이어 강제징용 문제를 계기로 존재감을 되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