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수' 장도리 역 배우 박정민. 샘컴퍼니 제공※ 스포일러 주의 "정민씨 영화를 꽤 많이 봤는데, 정민씨의 모든 영화 중 '밀수'가 최고예요. 진짜로, 정말, 앞으로 본인이 '밀수'의 장도리를 뛰어넘기 어려울 거예요." _영화 '밀수' 제작보고회 중 김혜수의 말
배우 김혜수는 '밀수'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박정민의 연기를 극찬했다. 단순히 잘했다는 말 이상으로 그의 필모그래피 중 최고의 연기였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박정민이 만들어 낸 장도리가 활자 속 인물보다 훨씬 더 현실에 발 디딘 것처럼 생생했다는 의미일 테다. 평소 '짜증 연기 갑(甲)' '현실 연기의 달인' 등의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게 박정민이지만, '밀수' 속 그의 연기에는 김혜수의 말마따나 조금 더 특별함이 숨어 있다.
박정민이 연기한 장도리는 카리스마 있는 춘자(김혜수)와 진숙(염정아) 사이에서 찍소리 한 번 못 해보고 막내 역할에 충실해 온 인물이다. 그런 장도리도 잠시 이들의 밀수판에 공백이 생기자 자신도 한번 인생을 바꿔볼 수 있겠다는 야망을 갖게 된다.
류승완 감독 역시 박정민에 관해 "굉장히 영리하고 지혜로운 배우인 것은 물론, 나와 코드가 잘 맞는 배우다. 그런 박정민 배우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감독과 베테랑 배우의 극찬이 이어질 만큼 살아있는 캐릭터를 만들어 낸 박정민은 '밀수' 현장을 두고 "특별했다"고 이야기했다.
영화 '밀수' 스틸컷. NEW 제공 류승완 감독에 대한 팬심으로 시작한 '밀수'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한 장도리 캐릭터를 시나리오를 통해 처음 만나 든 생각은 "눈앞에 이익만 좇고 사는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박정민은 장도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주변의 어떤 훈육이나 조언 같은 거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기도 전에 이미 자라버린 어른인 거죠. 그때그때 자기가 살아남을 방법을 항상 쫓아가던 사람이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기할 때도 그런 상황들에 맞춰서 장도리가 했을 법한 선택이 무엇이고, 어떠한 선택을 했을 때 이 사람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을지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러면서도 "장도리가 악역이라고 해서 '나는 나쁜 놈이니까 나쁜 놈 연기를 할 거야'하고 들어가기보다 자꾸 어긋나는 선택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빠지게 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빌드업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촬영했다"고 이야기했다.
박정민은 특히 류승완 감독에게 캐릭터와 관련해 많은 디렉션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감독님께서 '밀수'에 나오는 인물 중 본인이 가장 잘 아는 인물이 장도리라고 하셨다. 실제 본인의 고향에 사셨던 어떤 아저씨가 모티프가 되어 들여온 캐릭터여서 디렉션을 많이 주는 거니, 못해서 그러는 거라고 오해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영화 '밀수' 스틸컷. NEW 제공그렇게 박정민은 낯선 인물인 장도리를 그를 잘 아는 류승완 감독과 함께 만들어 나갔다. 그는 "70%는 시나리오, 29%는 감독님이 만들어 주신 거, 1%는 내가 한 거지 않을까"라고 너스레를 떤 뒤 "대부분이 감독님께서 만들어 주신 게 많다"고 공을 돌렸다.
그렇기에 더욱 특별했다. 박정민은 "감독님께서 저한테 중요하고 좋은 역할을 주셨다는 것부터가 특별했다"며 "그리고 내가 감독님의 팬이다. 너무 잘하고 싶으면 사람이 긴장되고 떨리는데, 막상 현장에 갔더니 너무 즐거웠다"고 밝혔다. 그는 류 감독으로부터 영화를 계속해 나갈 사람으로서의 시선이라든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해나갔으면 좋겠다는 등의 애정 어린 말을 들었다고 전하며 "팬을 넘어서 인생에서 의지하는 분으로 내 안에 자리 잡았다"고 했다.
"그리고 감독님의 강점은, 현장에서 그 누구보다 본인 발로 뛴다는 거예요. 계속 뭐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생각하는 게 보여서, 그게 감독님 영화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원천이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그동안 봐온 영화도 감독님의 그런 열정에서 나온 게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고요."영화 '밀수' 캐릭터 포스터. NEW 제공 선배 김혜수가 전해준 행복
감독에 대한 팬심으로 시작해 두려움으로 첫발을 내디뎠던 현장은 즐거웠다. 그리고 이런 즐거운 현장을 만든 데에는 김혜수, 염정아의 덕이 컸다. 박정민은 "두 분께서 현장을 되게 행복하게 만들어주셨다. 후배들이 현장에 즐거운 마음으로 나올 수 있게 만들어주셔서 촬영하면서도 너무 좋았다"며 "그래서 애정이 많이 가는 영화"라고 말했다.
특히 김혜수는 제작보고회나 인터뷰에서 그랬듯이 박정민을 향해 애정 어린 말들을 계속 건넸다. 박정민은 "혜수 선배님은 정말 대선배님이시고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분인데, 그런 분이 눈만 마주치면 좋다고 말씀하시니까 너무 감사하고 너무 좋았다"며 "내가 마음을 잘 표현하는 성격이 못돼서, 온전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게 죄송스러울 정도로 감사했다"고 했다.
영화 '밀수' 스틸컷. NEW 제공이어 "혜수 선배님과 같이 현장에서 연기할 때는 날 후배가 아닌 한 프레임 안에서 연기하는 동료이자 배우로서 상대해 주시는 게 느껴져서 그게 힘이 됐다"며 "난 주눅이 잘 드는 사람이라 무섭거나 하면 바로 그게 티가 나는데, 대선배님께서 동료처럼 대해주시니 연기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고 이야기했다.
김혜수는 지금의 장도리 스타일을 완성하는 데도 도움을 줬다. 평소 패션 잡지 등을 보며 참고할 만한 의상들을 저장해 두는 김혜수는 류승완 감독에게 장도리의 패션과 관련해 의견을 제시하며 사진을 보냈다. 그중에서 류 감독이 고른 게 지금의 장도리 스타일을 완성했다.
박정민은 "내가 평상시에 시도는커녕 쳐다보지도 않는 옷을 입고 금붙이를 차고 처음 나왔을 때 되게 신났었다. 이게 무기가 되어 주는 느낌이랄까"라며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무기가 되어 주는 느낌이어서 되게 고마웠다"고 말했다.
영화 '밀수' 장도리 역 배우 박정민. 샘컴퍼니 제공 박정민이 '밀수'로부터 받은 선물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과 '일장춘몽'에 이어 류승완 감독의 '밀수'까지 거장이라 불리는 감독들과 함께하며 박정민은 "중요하지 않은 신이 없다"는 걸 몸소 배우며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감독님들께서 그 어떤 것도 허투루 하시는 게 없으니까 제가 덜렁덜렁 가면 들켜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중요하지 않은 신이 없다.' 대사 없이 뒤에 서 있는 신이어도 저는 어떤 역할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준비해서 가요. 쓰레빠(슬리퍼) 끌고 덜렁덜렁 가는 일이 없어진 거 같아요. '밀수'가 특히 저한테 그렇게 해줬어요. 방심하지 않게 만들어 줬죠. 두 감독님께서 그런 역할을 해주신 거 같아요." 마음가짐에 따라 신이 달라진다는 것을, 그 신이 조금 더 풍부해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 박정민은 "대세에 지장은 없지만 100%일 걸 120%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배우의 준비 자세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거 같다"고 요약했다.
박정민에게 또 다른 변화도 생겼다. '침착맨'이라는 부캐로 활동하는 웹툰 작가 이말년의 유튜브에 출연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준 것 역시 그에게는 중요한 변화다. 그는 "옛날 같았으면 나한테 독이 될까 봐 주저하고 계산하고 그랬을 텐데, 그분을 만난 후 어느 순간부터 '내가 내 인생을 되게 재밌게 살고 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영화 '밀수' 스틸컷. NEW 제공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행복해지려고 사는 건데 자질구레한 요소들로 자신의 행복을 막지 말아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름의 의미와 재미를 찾은 거다. 소소하게는 '밀수' 촬영을 위해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까지 땄고, 취미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조 세트 촬영을 하며 컷 소리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재미를 느꼈다. 오죽하면 류승완 감독이 박정민을 향해 "그런다고 '밀수 2' 나오는 거 아니니까 빨리 나와"라고 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박정민은 "돌고래처럼 묘기를 벌이고 있었다"고 설명하며 웃었다.
그렇게 작품을 통해 박정민은 배우로서도, 박정민으로서도 변화하고 나아가고 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고 어떤 일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데, 그때그때 기회가 있을 때 여러 가지 경험을 해보는 건 좋다고 생각해요. 거기서 얻는 재미들 그리고 영감을 받을 때도 있고, 가르침을 얻을 때도 있으니까요. 그런 게 쌓여서 결국 제가 되는 거겠죠. 저도 궁금해요. 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