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3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핼러윈 참사 현장에 핼러윈 관련 물품들이 떨어져 있다. 류영주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참사 후 1년…이태원과 日아카시는 어떻게 달랐나 ②참사 1년이 오도록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계속) |
1년 전 10월 29일 밤 서울 한복판에서 발생한 참사로 159명이 숨졌다. 그날 이후 유가족들은 지금까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싸우고 있다.
73일간의 경찰청 특별수사본부의 수사 결과를 기다렸던 유가족은 참사 1년이 다 되도록 끝이 보이지 않는 1심 재판을 지켜보고 있다. 참사 책임자인 주요 피의자들은 여전히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1년째 지지부진…'한달에 한 번꼴' 열리는 재판에선 "예견할 수 없었다"
이태원 참사 관련 재판은 크게 다섯 갈래로 나뉜다. △박성민 전 서울경찰청 정보부장 등 정보라인 △이임재 전 서울 용산경찰서장 등 용산서 관련자 △ 박희영 용산구청장 등 서울 용산구청 관계자 △최재원 용산구보건소장 △ 해밀톤호텔 대표 등 불법 증축 관련자를 피고인으로 하는 재판이다.
그중 참사 대응과 밀접한 경찰 정보라인과 용산서, 용산구청 관련 피고인에 대한 재판은 서울서부지법 제11형사부가 맡고 있다. 해당 재판부는 살인 등 다른 강력 사건들도 다루고 있다보니 이태원 참사 관련 공판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열린다. 각 사건 별로 네다섯 번씩 공판을 진행했지만, 지금 속도라면 올해 안에 1심 재판 결론이 나올 가능성은 작다.
심지어 검찰 구형 단계까지 온 사건은 고작 해밀톤 호텔 대표 등에 대한 재판 하나다. 검찰은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골목에서 건물을 불법 증축한 혐의로 기소된 이 대표에 대해 징역 1년을 구형했고, 선고는 다음 달로 예정돼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10·29 이태원참사 태스크포스(TF) 단장을 맡은 윤복남 변호사는 "중앙 정치인 관련 재판은 매주 1회씩 열리는데 이렇게 재판이 지연돼 아쉽다"며 "사법제도의 한계가 있지만 특별재판부를 만들든, 법원 안에서 제도적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나마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들마다 "이태원 참사는 예견할 수 없었다", "주최자 없는 행사는 예년에도 대비하지 않았다"며 하나같이 책임을 피하고 있다.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 황진환 기자참사 부실 대응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 전 용산서장은 무전만으로는 참사를 조기에 인지해 대처하기 어려웠다고 줄곧 주장한다. 이 전 서장이 '경력을 동원하라'는 첫 지시를 내린 시각은 오후 10시 36분. 이태원 참사를 우려한 첫 112 관련 신고는 당일 오후 6시 34분부터 쏟아졌고, 오후 10시 15분부터 참사가 벌어졌다. 이에 대해 검찰은 불과 참사 5분 만에 용산서 자서망(경찰 무전망)에 비명 소리가 계속 나왔다고 반박하고 있다.
참사 관련 경찰 정보 보고서를 삭제하라고 지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 전 부장 역시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제작됐던 경찰 정보 보고서를 통해 사고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는 검찰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정보 보고서를 삭제하라고 지시한 일도 규정에 따른 올바른 직무수행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이미 참사 직후부터 경찰과 용산구청은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재판 내내 박 구청장 등 용산구청 측은 인파 관리 권한은 경찰에 있어 참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자신들에게 책임을 물을 법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도 마찬가지다. 전날(22일) 진행된 서울청 정보라인 재판에서 검찰은 박 전 부장이 경찰청 정보관리 과장에게 "적극적인 수사 드라이브로 주최 측과 자치단체의 책임이 부각되도록 조치 필요"라는 문자를 보냈다며 경찰이 책임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려던 증거를 내밀었다.
공판 직전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사 희생자 고(故) 유연주씨의 아버지 유형우씨는 "한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나고 1주기가 돼가도 누구 한 명 '내 실수다', '내 잘못이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며 그저 신속한 재판 진행과 엄중한 처벌을 촉구했다.
핵심 피의자는 구속됐다 풀려나…김광호 서울청장은 불기소 가닥?
재판이 길어지자, 구속됐던 주요 피의자들은 줄줄이 보석으로 풀려났다. 용산경찰서 이임재 전 서장과 송병주 전 112치안종합상황실장, 박희영 용산구청장, 용산구청 최원준 전 안전재난과장, 서울경찰청 박성민 전 정보부장, 용산경찰서 김진호 전 정보과장 총 6명의 주요 피의자들이 구속 상태에서 벗어났다. 참사를 책임져야 할 '몸통'으로 꼽히던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도 7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청구가 기각돼 업무에 정상 복귀했다.
참사 유가족은 이들의 죄가 가벼워질 뿐 아니라, 윗선의 책임 소재까지 덮이고 참사는 묻힐까 두려워 한다. 박 구청장이 보석으로 석방된 뒤 열린 첫 재판에 유가족들은 소복을 입고 나타나 통곡하며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태원 참사에 부실하게 대응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박희영 용산구청장이 지난 6월 8일 보석으로 풀려나면서 직무 권한을 회복한 가운데 서울 용산구청 구청장실 앞에서 유족들이 박 구청장의 출근 저지 행동을 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보석 석방 직후 일부 유가족과 마찰을 빚자 구청 공무원들을 총동원해 구청 방호에 나섰던 박 구청장은 현재 별다른 차질 없이 구정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핼러윈은 '하나의 현상'"이라며 미리 대비할 수 없었다던 박 구청장은 약 열흘 전에는 ''핼러윈데이 유관기관 합동 대책회의'를 주최했다. 안전사고를 막겠다며 경찰, 소방 등 유관기관이 참석한 이 자리에는 박 구청장뿐 아니라 최성범 용산소방서장 등 참사 당시 책임자 등이 고스란히 참석해 논란이 일었다.
경찰 피의자 중 최고위급인 김광호 서울청장은 검찰 수사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 기소 여부조차 확정되지 않았다. 최성범 용산소방서장, 참사 당일 서울청 상황실에 근무한 류미진 전 인사교육과장 등도 검찰 수사 단계에 머물러 있다.
김광호 서울경찰청장. 국회사진취재단특히 지난달 말에는 검찰이 경찰 관련 수사를 맡았던 형사3부의 수사를 용산구청·소방 관련 수사를 맡은 형사5부로 일원화하면서 김 청장을 불기소하기로 가닥을 잡고, 참사 '윗선'을 그대로 둔 채 수사를 마무리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서부지검장도 지난 1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 나와 속도를 내 수사를 종결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참사 1주기가 다가오지만 진상 규명은 멀고 책임자 처벌은 느리기만 현실에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전날 보고회를 열고 김 청장의 기소가 지연되는 이유를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윤희근 경찰청장과 김 청장의 참사 전후 대응, 대통령실 용산 이전과의 관련성 등을 꼽으며 참사를 방치하고 피해를 키웠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과제로 지적했다.
10·29 이태원참사 태스크포스(TF) 소속의 이창민 변호사는 통화에서 "김 청장은 본인이 주재한 회의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로 인해 핼러윈에 많은 인파가 몰릴 테니 촘촘한 계획을 세워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지만 (실제 기동대 배치가 됐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며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경찰이 당시 대통령실 근처에 있는 삼각지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집회·시위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은 여실히 드러났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