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스타전 시상식에서 남자부 MVP를 차지한 신영석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왜 배구를 보러 와야 하나'.
한국 배구의 '살아 있는 전설' 신영석(38·한국전력)은 올 시즌 프로배구 개막 전부터 큰 고민이 필요한 질문에 직면해야 했다. 최근 국제 무대에서 한국 배구가 거둔 저조한 성적과 맞물린 근본적 물음이었다.
신영석은 당시 "이번 위기를 기회로 발판 삼아 모든 배구인들이 더 나은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 "위기라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다짐했다.
이후로 약 3개월 반이 지났고, 어느덧 V-리그는 반환점을 돌아 후반기로 접어드는 시점이 됐다. 이번엔 신영석이 먼저 '왜 배구를 보러 와야 하나'라는 질문을 꺼냈다.
팬들을 위한 세레머니를 선보이는 신영석. KOVO 제공신영석은 지난 27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도드람 2023-2024 V-리그 올스타전'에 남자부 선수 중 팬 투표 1위를 차지했다. 4년 연속 1위였다. 그만큼 신영석은 배구계 인기 스타다.
활약은 이어졌다. 신영석은 팬들을 위해 준비해온 세리머니 '슬릭백'을 능수능란하게 선보이며 남자부 세리머니 상을 거머쥐었다. 여기에 경기 최우수 선수(MVP)로도 선정됐다. 그야말로 '별 중의 별'이었다.
신영석은 올스타전이 끝난 뒤 MVP, 세리머니 상 수상자 자격으로 취재진 앞에 앉았다. MVP로서 소감, 세리머니 준비 과정 등을 밝은 표정으로 말하던 신영석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그러더니 '왜 배구를 보러 와야 하나'라는 질문을 꺼냈다. 신영석은 어떤 답을 찾은 것일까.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 남자 배구 1차전에서 인도에 패한 남자 대표팀. 연합뉴스신영석은 이날 "대표팀이 팬들에게 실망을 드렸다. (남자 배구가)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고 본다"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이어 "그때 이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오늘 어린 선수들에게 그 이유를 봤다"고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팬들을 위한 후배 선수들의 부단한 노력을 언급한 것. 신영석은 "어린 선수들이 이번에 많이 뽑혀서 끼를 보여줬다. 임성진(한국전력), 임동혁(대한항공), 김지한(우리카드)이 숙소 앞 방을 썼는데, 전날 새벽 2~3시까지 세리머니 준비를 했다"고 뒷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이 선수들이 팬들을 위해서 준비를 열심히 하는 걸 보고 기특했다"고 덧붙였다.
신영석의 말대로 이번 시즌 V-리그는 최악의 분위기 속에서 출발했다. 특히 작년 열린 여러 국제 대회에서 남자 배구는 최악의 성적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남자 배구는 작년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인도, 파키스탄 등 상대적으로 열세로 평가됐던 상대들에게 힘없이 무릎을 꿇으며 12강에서 탈락했다. 1966년 방콕 때부터 매 대회 메달을 획득해왔는데 아시안게임에서 굴욕적인 '노 메달' 수모를 겪은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남자 대표팀은 앞서 열린 아시아 챌린저컵, 아시아선수권에서도 각각 3위, 5위로 성적을 내지 못했다. 남자 배구가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은 건 2000년이 마지막이다.
왼쪽부터 임성진, 바야르사이한, 임동혁이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이러한 상황임에도 신영석은 배구계 대선배로서 후배 선수들의 노력을 알아 달라고 읍소한 것이다. 신영석은 "어린 선수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기대해주시고, 선수들은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꿈을 꾸면 좋겠다. 많은 실망을 하셨겠지만 기대해 주시고 응원을 부탁한다"고 재차 당부했다.
신영석은 같은 질문을 시즌 전에도 받은 적 있다. 지난해 10월 10일 경기도 의왕체육관에서 열린 한국전력의 기자 간담회에서 신영석은 "대표팀의 경기를 보면서 많은 배구인들께서 생각을 하셨길 바란다"며 "위기라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답했다.
"그렇지 않으면 팬 분들께서 등을 돌릴 것이라 생각한다"고도 덧붙였다. 이어 "더 악착같은 모습으로, 더 파이팅하는 모습으로, 지고 있어도 어떻게든 따라잡으려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 이번 위기를 기회로 발판삼아 모든 배구인들이 더 나은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다짐한 바 있다.
올스타전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 KOVO 제공다행인 점은 팬들이 무관심보단 직접 경기장을 찾아 응원으로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시점까지 이번 시즌 V-리그 남자부 평균 관중은 지난 시즌에 비해 증가했다.
2022-2023시즌 남자부 정규 리그 126경기 전체 관중은 19만4681명. 평균 관중은 1545명이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 4라운드까지 84경기가 치러진 시점에서 총관중은 15만3090명. 평균 관중은 1823명으로 지난 시즌보다 17.95%(평균 277명) 오른 수치다.
질타와 우려 속에 출발해 암울한 시즌이 예상됐지만 팬들의 의리는 외려 V-리그 코트를 한층 밝아지게 만들었다. 시즌 중 한 V-리그 팬은 "배구 팬으로서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해 안타까웠다"면서도 "팬이라면 선수들과 함께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나가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의견을 전한 바 있다.
또 다른 팬도 "한국 배구가 국제 무대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팬들이 힘을 실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선수들이 잠을 미뤄가며 새벽까지 세리머니 훈련을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