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서 9단(오른쪽). 연합뉴스농심배에서 한국 바둑의 새 역사를 세우고 귀국한 신진서(23) 9단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지난 19일부터 닷새간 중국과 일본의 최정상급 기사 5명을 꺾느라 진력을 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승의 기쁨을 가릴 정도로 큰, 남모를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23일 농심배 우승 직후 신진서는 어릴 적 자신이 잘 따랐던 친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
친할머니는 신진서가 농심배 출전을 위해 중국으로 출국한 18일에 지병으로 별세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진서의 부모님은 아들이 대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일부러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신진서도 최근 병세가 좋지 않은 할머니가 걱정되는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농심배 대국을 치러왔던 터였다.
24일 인천국제공항 귀국 인터뷰에서 신진서는 아직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신진서는 "어제는 만감이 교차했다. 바둑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슬픈 날이었기 때문에 기쁨을 즐기지는 않았다"고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어릴 때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자주 뵀는데, 요새는 대국 때문에 부산에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할머니를 추억한 신진서는 "가장 최근에는 보름 전에 뵀었다. 그때도 몸이 많이 안 좋으셔서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고 떠올렸다.
할머니의 존재는 이번 대회에서 신진서가 자신을 채찍질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전날 구쯔하오(중국) 9단과의 최종국에서 나온 짜릿한 재역전승 뒤에도 할머니에 대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는 신진서는 "구쯔하오 9단은 제가 갖지 못한 강점을 가진 몇 안 되는 기사 중 한 명이기 때문"이라고 복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국에 들어갈 때) '내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서 무너지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들어갔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육신을 벗은 할머니가 바다를 건너가 중국에 있는 손자와 함께했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신진서는 "할머니와 같이 싸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진서는 전날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3라운드 최종 14국에서 중국의 마지막 주자 구쯔하오를 꺾고 한국의 4년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바둑 삼국지' 농심배는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최강자 5명씩 출전해 진 선수는 탈락하고 이긴 선수는 계속 두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국가대항전이다.
신진서는 동료 기사 4명이 1승도 거두지 못하고 모두 탈락한 상황에서 중국 기사 5명, 일본 기사 1명을 연파하는 '원맨쇼'를 선보였다. 끝내기 6연승은 대회 사상 처음 나온 기록이다.
2005년 제6회 대회에서 나온 이창호 9단의 '상하이 대첩'을 뛰어넘는 위업이다.
신진서는 22회 대회에서부터 파죽의 16연승을 기록하며 이창호가 2005년 수립했던 14연승도 뛰어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