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환경노출피해자연합이 지난 1월 3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 참사 가해기업 사과 및 배상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독성 성분이 포함된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해 대규모 인명 피해를 일으킨 혐의로 2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SK케미칼 홍지호 전 대표와 애경산업 안용찬 전 대표가 다시 재판을 받게 됐다. 앞서 유죄가 확정된 옥시레킷벤키저(옥시) 사건과의 공범 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에서다.
26일 대법원 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SK케미칼 홍 전 대표와 안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각각 금고 4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2심은 옥시와의 '공범 여부' 인정…"국민 상대 독성시험"
홍 전 대표 등은 독성 화학물질인 CMIT(메틸클로로이소치아졸리논)와 MIT(메틸이소치아졸리논)를 활용해 가습기 살균제를 개발·제조·판매하는 과정에서 안전성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아 98명(사망 12명)의 인명 피해를 낸 혐의로 지난 2019년 기소됐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 98명 중 94명은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옥시레킷벤키저 등 여러 회사의 가습기 살균제를 함께 사용한 '복합 사용자' 그룹이다. 검찰은 이들 회사의 임직원을 업무상 과실치사죄의 공동정범으로 보고 재판에 넘겼다.
2심 재판부는 SK케미칼 홍 전 대표와 애경산업 안 전 대표에 대해 1심 무죄 판결을 파기하고, 금고 4년형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전국민을 상대로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독성 시험"이라고 질타하며, 이들이 독성 등 위험성을 알고도 별다른 조치 없이 판매를 결정해 대규모 인명 피해를 일으켰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다른 독성 화학물질인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디닌)‧PGH(폴리옥시에틸렌헥사메틸렌구아디닐) 성분을 활용한 가습기살균제를 제조, 판매해
이미 유죄가 선고된 옥시 관계자들과 이들(SK케미칼·애경)의 공동정범 여부도 인정했다.2심 재판부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경쟁관계에 있는 복수의 제조업자가 동일한 유형의 제품을 제조·판매하고 소비자가 시중에 유통되는 여러 종류의 제품들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히 예정돼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위 각 가습기 살균제 제품의 개발·제조·판매에 관여한 사람들 모두가 공동의 주의 의무와 인식 아래 업무상 과실로 결함이 있는 가습기 살균제를 각각 제조·판매한 것"이라며 "그 결함으로 그 중 두 종류 이상의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피해자들에게 사망 또는 상해의 결과가 발생했다면, 이들 중 특정 피해자가 중복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들의 제조·판매에 관해 업무상 과실이 있는 사람들 간에는 해당 피해자에 대한 업무상과실치사상죄의 공동정범이 성립한다"라고 판단했다.
대법 판단은 달랐다…"성분 다른 옥시와 공범 인정 안 돼"
지난 2월 6일 오후 서울 서초동 법원 삼거리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 주최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 세퓨 제품피해 국가책임 민사소송 2심 판결에 대한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한 피해자가 발언하는 모습. 연합뉴스대법원은
△업무상 주의의무 위반 존재 여부 △과실범의 공동정범 성립 여부 △인과관계 인정 여부 △공소시효 완성 여부 등의 쟁점들을 살핀 뒤 파기환송했다.
우선 대법원은 옥시와의 공범 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SK케미칼·애경산업의 가습기살균제와 옥시 등이 제조·판매한 가습기살균제는 성분이 다른 전혀 별개의 상품이기 때문에 이들을 공동정범으로 묶어서 처벌할 수 없다는 취지다.대법원은 "(옥시 사건의) 피고인들이 제조·판매에 관여한 가습기살균제의 주원료는 PHMG 등이고, 이번 사건 살균제의 주원료는 CMIT/MIT로, 그 주원료의 성분, 체내분해성, 대사물질 등이 전혀 다르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활용하거나 응용해 개발·출시됐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어떤 제품이 개발·출시된 후 경쟁업체가 '기존 제품과 주요 요소가 전혀 다른 대체 상품'을 독자적으로 개발·출시한 경우에는 사망 또는 상해의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정을 공동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고 볼 여지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과실범의 공동정범 성립을 인정한다면, 현대사회에서 상품 제조·판매자들 등에 대한 과실범의 공동정범 성립범위가 무한정 확장된다"고 판시했다.
파기환송 후 2심 법원에서는 복합 사용자 그룹 피해자들의 사망 원인을 구체적으로 규명해 잘잘못을 가려야 한다.
하지만 공소시효 문제가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 다수의 피해자가 2010년에서 2011년 사이 숨졌는데 검찰이 홍 전 대표와 안 전 대표를 기소한 시점은 2019년이다. 업무상과실치사죄의 공소시효는 7년이다.
검찰은 공범이 기소되면 공소시효가 정지되는 형사소송법 규정을 근거로 공소시효 만료 전에 옥시 측이 먼저 기소됐음을 들어 이들을 기소했지만, 옥시 측과 공범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날 경우 일부 피해자들에 대한 범죄는 '면소' 판결이 선고될 가능성이 크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날 판결에 대해 "성분이 다른 가습기 살균제 제조, 판매회사와의 공동정범은 성립하기 어려우므로, 이 사건 가습기 살균제만으로 복합사용 피해자들의 사망 또는 상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여부를 더 심리할 가능성이 있다"며 "무죄 취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과실범의 공동정범을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공소시효가 완성된 부분에 대하여는 면소 가능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법원이 과실범의 공동정범 성립 여부를 다시 심리할 가능성이 있지만, 각 회사에 따라 공소시효가 완성됐다면 심리를 하지 않고 소송이 종결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