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의 한 쿠팡 물류센터. 연합뉴스지금쯤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월동하고 있을 뻐꾸기는 여름이 시작할 무렵 번식을 위해 한반도를 찾을 것이다. 이 땅에서 날개를 쉬는 뻐꾸기는 굳이 제 둥지를 짓지 않는다. 그 대신 남의 둥지에 슬쩍 알을 낳고 다른 새가 제 새끼인 양 돌보게 한다. 생물학적 기생의 방식 중 하나인 탁란(托卵)이다. 뻐꾸기는 몸통에 비해 다리가 짧아 알을 품기 어려운데, 그러한 특성을 극복하고 번식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탁란을 택한다.
하지만 탁란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통한을 품을 수밖에 없다. 탁란을 준비하는 뻐꾸기는 뱁새와 같은 숙주의 둥지에서 알 하나를 밀어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자기 알을 슬며시 밀어넣는다. 그런 줄도 모르고 뱁새는 뻐꾸기 알까지 정성껏 품어주는데, 알을 깨고 나온 뻐꾸기 새끼는 뱁새의 다른 알마저 둥지 밖으로 밀어내곤 한다. 그런 뻐꾸기 새끼는 훌쩍 몸집을 키우지만, 그 앞에 작아진 어미 뱁새는 뻐꾸기가 둥지를 떠날 때까지 계속 먹이를 물어다 줄 뿐이다.
쿠팡 매출 90% 올려주는 한국엔 죽음과 정보유출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택배노동조합,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 등 관계자들이 1일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서 열린 '쿠팡 피해자 행동의 날' 집회에서 김범석 쿠팡Inc 의장의 처벌과 사과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쿠팡은 탁란하는 뻐꾸기를 닮았다. 한국계 미국인 김범석에 의해 설립된 쿠팡은 '로켓배송'을 무기 삼아 토종 기업들을 차례로 제치며 2023년 국내 전체 유통업 점유율 1위에 올랐다. 그런 쿠팡이 지난 2024년 한국에서 벌어들인 순이익은 7849억원. 그런데 이보다 많은 9390억원은 김범석 의장의 미국 쿠팡Inc. 등 특수관계자에게 돌아갔다. 매출의 90%가 한국에서 나온다는 쿠팡은 우리 지갑 속 돈을 부지런히 미국으로 실어나르는 중이다.
미국의 레드오션을 피해 탁란한 쿠팡이 몸집을 키우는 사이 한국이라는 둥지는 병을 키웠다. 쿠팡의 배송을 맡은 택배기사 4명과 물류센터 노동자 8명이 지난해 목숨을 잃었다. 심근경색, 뇌졸중 등이 사망원인인데, 무리한 고강도 노동이 그 배경으로 꼽힌다.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쿠팡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망자의 수는 무려 29명이라는 전국택배노조의 주장도 있다. 물론 쿠팡 측은 대부분의 사례가 개인 질병 탓이라는 입장이다.
지난해 말에는 쿠팡 회원의 개인정보 3367만 건이 유출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국내 단일 민간 기업의 유출 사고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정부와 정치권이 한 목소리로 질타하자 쿠팡은 자체 조사를 벌여 유출자를 특정하고 유출에 사용된 장치까지 회수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유출된 개인정보도 단 3천 건 정도라고 덧붙였다. 최악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내놓고 별 것 아니라는 '셀프 조사' 결과를 그저 믿으라는 격이다.
책임 나몰라라 쿠팡…둥지의 일격은 '싸늘한 외면'
경찰이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과 관련해 허위로 증언한 의혹을 받는 해롤드 로저스 쿠팡 임시 대표가 6일 서울 마포구 서울경찰청 반부패수사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로저스 대표의 경찰 출석은 이번이 두 번째다. 황진환 기자얼굴을 더 붉히게 하는 건 쿠팡 측의 일관된 태도다. 온 나라가 쿠팡으로 시끄러워도 그 정점에 있는 김범석 의장은 여태 목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다. 그 대리인(박대준 전 대표)은 '끝까지 책임지고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밝힌 지 8일만에 맥없이 물러났다. 쿠팡의 실질적 2인자로 불린 이(해롤드 로저스)가 바통을 넘겨받았는데, 한국 국회에 나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의원들과 말싸움을 벌였다. 그는 곧 미 의회에 초대돼 '한국이 미국 기업을 차별 대우한다'는 주장과 관련해 증언할 예정이다.
한국이라는 둥지에서 탁란으로 자라난 쿠팡은 둥지의 질서를 흩뜨리며 그 안의 안전도 위태롭게 하고 있다. 둥지 안에 다른 생명을 얕잡아볼 정도로 몸집을 키우고 나서도 꼬박꼬박 먹이를 받아먹는다. '당신들의 생활 기반이 된 거대 플랫폼을 어쩌겠는가' 하는 오만함과 '미국이 아끼는 기업을 한국 정부가 어쩌겠는가' 하는 방자함이 쿠팡의 뒤를 받치고 있다. 쿠팡은 우리 당국의 수사나 제재, 국회의 압박이 별로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쿠팡의 치명적 아킬레스 건이 살짝 드러난 적이 있다. 2015년 3월 당일 배송 서비스를 공개하며 기자들을 불러모은 김범석 대표는 "쿠팡은 경쟁이 두렵지 않다" 호언장담하면서 "오히려 고객의 실망이 두렵다"고 밝혔다. 신뢰의 붕괴가 곧 비즈니스 모델의 해체로 이어지는 플랫폼 업체의 특성을 그는 알고 있었다. 쿠팡을 몸서리치게 하는 건 소비자들의 조용한 이탈과 싸늘한 외면이면 충분하다. 탁란조 쿠팡에 밟힌 우리 둥지 세력의 뒤늦은 일격은 이제라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