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박순관 아리셀 대표. 연합뉴스23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리셀 화재 참사와 관련해 항소심 재판부가 박순관 아리셀 대표에게 징역 4년으로 대폭 감형한 판결을 내린 데 대해 유가족과 시민대책위원회는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 무력화 선언"이라며 강력 비판했다.
수원고법 형사1부(재판장 신현일)는 22일 중처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박 대표의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4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유가족과의 합의를 양형에 제한적으로 반영하며 역대 최고 형량을 내렸으나,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항소심 재판부는 "합의를 양형에 제한적으로 반영하게 되면 피고인이 피해회복을 위한 노력을 소극적으로 하게 하거나 급기야는 이를 포기하게 만들어 오히려 피해자들의 실질적이고 충분한 피해 회복을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합의를 적극적인 감형 사유로 삼았다.
이에 대해 아리셀참사대책위원회와 아리셀산재피해자가족협의회는 선고 후 입장문을 내고 재판부를 강력하게 규탄했다.
대책위는 재판부가 박 대표의 실질적 경영책임자 지위와 안전보건관리 의무 위반을 인정했음에도 가벼운 형을 선고한 점을 지적했다. 이들은 이번 재판 결과를 두고 "중처법을 위반해도 중형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선언이자, 결국 "중처법은 무력한 법"이라는 선언이라고 일갈했다.
특히 유가족과 대책위는 재판부의 핵심 감형 사유인 '합의'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했다. 대책위는 참사 피해자들이 대부분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던 이들이라 유가족들이 경제적 어려움 탓에 민사상 합의가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생계 문제로 합의한 유족의 상황을 거론하며 "합의를 했으니 가해자에게 벌을 주지 않겠다"는 것은 법원이 앞장서서 "돈 앞에 정의 따위는 없다"고 선고한 셈이라고 비판했다.
재판 과정과 선고 직후 법정에서 보인 재판부의 태도도 논란이 됐다. 대책위에 따르면 2심 재판부는 합의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려는 유족 대리인단의 의견을 듣지 않고, 유가족들의 아쉬움 토로에 법정을 소란스럽게 한다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소재 일차전지 업체인 아리셀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 모습. 연합뉴스이날 감형 선고가 내려지자 방청석 곳곳에서는 "사람이 23명이 죽었는데 4년이 말이 되느냐"는 유족들의 오열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에 신현일 재판장은 재판 진행 방해 등을 이유로 법원 직권으로 구금하는 제도인 감치를 운운해 유족들의 공분을 샀다.
대책위와 유가족 측은 이번 2심 판결에 그치지 않고 대법원의 판단을 다시 구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들은 대법원에서 이번 판결의 부당함을 입증하고, 아리셀 경영진이 마땅한 벌을 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강조했다. 피해자 측 대리인단 역시 2심 판결에 대해 명백한 양형 부당이자 법리적 오해라고 지적하며 상고심에서 이를 반드시 바로잡겠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을 두고 노동계도 거세게 반발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같은 날 성명을 내고 재판부가 스스로 법을 무력화했다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중처법이 시행된지 4년이 지났지만 산업재해는 줄지 않는다"며 "법이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최근 중처법 1호사건인 삼표그룹 사건에서도 정도원 회장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며 "노동자를 죽음으로 밀어넣는 일터를 만든 실질적인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산업재해를 막아보자는 중처법의 법취지는 매번 법원에서 주저앉는다"고 일갈했다.
또 중처법의 무죄비율은 일반 형사사건보다 3배이상 높다는 점을 지적하며,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옹호해야 할 사법부가 자본의 탐욕을 옹호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어 민주노총은 "더는 중처법이 무력화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며 "중처법을 무력화 하는 사법부의 만행에 맞서 싸울 것이다. 더는 일하다 죽는 노동자가 나오지 않도록 투쟁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