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거나 다칠 걱정 없는 사회 만들자"…항공참사 추모한 시민들
"(10·29) 이태원참사의 고통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많은 분들이 사망하는 '제주항공 참사'를 겪었습니다. 재난이 우리의 일상이 되는 것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생명이 존중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생명안전기본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안전권을 시민의 권리로 보장하라고, 재난참사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라고, 또 독립적인 진상 규명을 제도화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김혜진 생명안전 시민넷 공동대표는 4일 오후 서울 광화문 앞 대로에서 열린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 추모 및 온전한 수습과 피해자 권리 보장을 위한 생명존중 안전사회 시민대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같이 말했다.
새해 첫 주말인 이날 정부서울청사 인근에서 진행된 집회는 삼풍백화점 붕괴참사, 4·16세월호참사 등 관련 단체들이 모인 '재난참사피해자연대'와 10·29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아리셀 중대재해참사 대책위원회 등이 공동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참사 유족들을 포함해 대학생,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 성직자 등 각양각색의 시민 약 500명이 항공참사를 추모하며 모였다.
한낮 기온이 2~3도에 그친 맹추위에 패딩과 털귀마개 등으로 중무장한 참가자들은 '윤석열 파면', '국민에게 총구를 겨누는 정권에 안전을 맡길 수 없다', '생명안전 사회로', '진실과 정의가 보장되는 민주주의로!' 등의 문구가 새겨진 피켓을 들고 차가운 도로에 앉아 발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김 대표는 지난달 29일 무안국제공항에서 발생한 '제주항공 참사'를 두고 "우리가 그동안 외쳤던 것은 제주항공 참사 피해자들에게도 너무나 중요하다"며 "우선 온전한 피해 수습과 함께 피해자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탑승객 181명 중 구조된 승무원 2명을 제외한 전원(179명)이 숨진 이번 참사 희생자들의 시신이 과연 존엄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유품은 방치되고 있지 않은지, 유가족들이 모여서 안전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안정적인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마련돼 있는지 등도 반문했다. 김 대표는 정부 측 브리핑에 대해서도 언론과 자원봉사자 등이 뒤섞인 공간에서 이뤄지고 있다며, 유족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참사 관련 조사를 시작한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사조위)가 전문적 조사기관인 만큼 아마도 조사가 잘 이뤄질 거라 생각한다"면서도 "사조위에 국토교통부 관계자들이 포함돼 있다. 혹시나 사고와 연관된 이들이 조사에 합류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잘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피해자·유족에 대한 '악성 댓글'이 도를 넘어섰다고도 우려했다. 김 대표는 "여전히 피해자 고통을 외면하고 속보경쟁을 하며 보상금 문제를 부각시키는 언론이 있다"며 "'악플'을 통제할 수 없는 언론이라면 (포털) 댓글 서비스를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지난 2017년 스텔라데이지호 침몰사고 당시 실종된 이등항해사 허재용씨의 누나인 허경주씨도 "(사건 발생 이후) 나를 지켜줄 줄 알았던 국가가 나를 냉대하고, 인터넷에 신원이 까발려지고, 심지어는 (시신 미수습자의) 친누나가 아니라는 온갖 협박과 모멸, 조롱을 견뎌야 했다"고 토로했다.
이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컨트롤타워가 없던 시절에 일어난 참사이기에 그 모든 것을 참아야 했는데, 지금 또다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커다란 참사가 발생했다"며 "특별히 재수가 없거나 불행해서 참사 피해자가 된 것이 아니다. 이런 사회구조 속에 사는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제 경험으로 미뤄볼 때 저에 대한 가해, 모욕보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제대로 된 원인 규명이 이뤄지지 않고 누가 (사고) 책임을 져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라며 "이번 제주항공 참사에서도 피해자들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진상규명 등에 있어서) 피해자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반 시민들의 연대 발언도 이어졌다. 홍익대에 재학 중인 황서현씨는 "살아남은 세대인 우리가 슬픔을 넘어 희망과 미래의 세대, 안전사회의 세대가 되길 소망한다"며 "저를 포함한 대학생들은 비상계엄으로 훼손된 헌정 질서와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도록, 또 반복되는 참사 속 억울한 죽음이 없게, 사고가 참사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사회 건설에 직접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인천 시민인 조진영씨 또한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는 말들을 떨쳐내고 싶었다. 생명과 안전이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시되는 사회에 살고 싶다"며 "앞으로 이 참사가 온전히 해결될 때까지 항상 유족 분들과 함께하는 자리에 나오겠다"고 거들었다.
주최 측 관계자는 "생각해 보면 우리는 '위로를 건네는 연습'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며 "곁에서 손을 잡아주고 함께 슬퍼하는 것은 남은 시민들의 몫"이라고 참석자들을 독려했다.
집회에 나온 시민들은 경복궁 앞 보행로에 마련된 '제주항공 여객기참사 희생자 추모의 벽'에 자필 포스트잇을 붙이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99년생입니다. 너무 많은 죽음, 참사를 마주하며 살고 있어요. 힘겹지만 반드시 우리의 힘으로 안전한 나라를 만들게요", "황망합니다. 반드시 제대로 된 수사와 지원이 있기를 바랍니다" 등의 글들이 빈칸을 채웠다.
집회가 끝난 이후, 같은 자리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촉구하는 '대학생 5차 시국대회'가 진행됐다. 학생 등 일부 시민은 차로에 분필로 '재난참사 만드는 윤석열들 몰아내자', '우리가 서로를 지키자' 등의 문구를 남기기도 했다.
한편,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제주항공 참사 관련 전국 곳곳에 마련된 합동분향소를 찾은 조문객은 전날 기준 24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정부가 지정한 '국가 애도기간'은 이날이 마지막이지만, 당국은 전남·광주를 중심으로 일부 분향소를 연장 운영하기로 했다.
2025.01.04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