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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봄길로 만나는 4色의 천년 고도 ''낭만 서울''

여행/레저

    도성 봄길로 만나는 4色의 천년 고도 ''낭만 서울''

    [서울의 재발견 ②] ''성곽도시'' 서울의 도성 봄길을 걸으며 역사를 만난다

    우리가 잘 몰랐던 천년 고도의 역사도시 서울! 바로 그 서울 사대문안 도심 즉 성곽도시 ''서울''을 4가지로 걸으며 만나보고자 한다. 그 길잡이는 바로 ''서울성곽 즉 서울한양도성''이다. 요즘 특히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 도성길로 세월과 역사의 풍취와 낭만을 봄볕을 벗삼아 이제부터 천천히 만끽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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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이 웬 ''천년 古都?''

    수도로서 서울의 역사를 보자. 백제의 700년 역사 중 500년 동안(BC 18년 ~ AD 475년)의 수도가 서울, 지금의 송파구 한강변이었다.

    백제 역사 중 500년을 차지하는 한성백제가 하남위례성으로 일컬었던 지금의 서울 한강변에 도읍을 정했으니,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그것을 보여주는 유적임이 밝혀지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 역사 약 500년(913~1392) 중 400년간 고려 제2의 수도가 서울, 지금의 경복궁 서편에서 창덕궁 부근까지의 도심 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고려 수도 개경 남쪽의 남경이라고 해서 제2의 수도로 삼고, 고려시대 여러 왕들이 수시로 남경 천도를 시도했었다.

    그러다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결국 남경 천도에 성공하고, 모두 알다시피 조선 500여년(1392년~1910년)의 수도가 서울, 지금의 사대문 안 도성이다. 그리고 그 후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이라는 이름으로, 해방 후에는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이 나라의 수도로 이어져 온 것이 100년이다.

    백제의 수도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 고도, 그리고 서울 사대문 안 도성 지역으로만 보면, 고려 제2의 수도 남경으로부터 조선의 수도 그리고 지금의 수도에 이르는 1000년 고도가 바로 서울이다. 전 세계 수도 중 서울만큼 오랜 기간 수도로서의 역사를 가진 도시를 찾기 어렵다.

    ◈ 왜 하필 이곳, 서울이었을까?

    서울이 한반도의 최고 명당지이자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자연환경으로 보자. 서울 어디서든 버스로 15분 거리 안에 산이 있고, 서울 어디서든 차로 30분 거리 안에 한강이 있으며, 서울 어디서든 지하철을 타고 한시간이면 바다를 볼 수 있다.

    이는 선조들이 지금의 서울 사대문안 도심, 즉 한양도성을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닌 명당지이자 요충지로 보고 도읍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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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명당지로 본 것일까? 

    먼저 도성 지역을 네 개의 산(내사산 -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이 품고 있고, 그 밖으로 또 네 개의 산(외사산 - 북한산, 덕양산, 관악산, 아차산. 조선시대 외사산의 경계는 묘하게도 지금의 서울 경계와 거의 일치)이 감싸고 있다.

    내사산 안에서는 북악산을 등지고 청계천이 흐르고, 외사산 범위에서는 북한산을 등지고 한강이 흐르는 이중적 배산임수, 즉 우리 전통의 최고 명당 지형이자 자연적 요새가 이 도성 지역이었다. (이런 명당 지형으로 비슷한 형세를 갖고 있는 곳이 지금 세종시가 들어선 곳. 조선 개국 당시 도읍을 이곳으로 정하려고 시도한 바 있었고, 박정희 정권와 노무현 정부 때도 이곳으로의 수도 이전을 추진한 바 있다)

    이러한 명당으로서의 지형뿐 아니라, 위치로도 한반도의 중심이자 바다와 강을 통한 수로가 발달한 교통의 핵심 요충지였다.

    삼국시대에 서울의 외사산의 북쪽산인 북한산에는 신라의 진흥왕 순수비가, 외사산의 동쪽산인 아차산에는 고구려 아차산성이 남아서 서울을 두고 벌였던 삼국시대의 치열한 각축전을 지금도 웅변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천혜의 자연 조건들이 여전히 서울의 자연환경을 구성하고 있다.

    얼마전 한중일 삼국 학자들이 서울과 도쿄 그리고 베이징을 비교하는 학술회의에서 최고의 자연환경적 생태적 입지를 지닌 도시가 바로 서울이라고 밝힌 것도 이런 배경이다. 그리고 이 서울의 사대문안 도심 지역을 조망하며 만날 수 있는 길잡이이면서 동시에 역사도시 서울의 모습을 현재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서울성곽, 공식 명칭으로 ''서울한양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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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한양도성대한 관심이 최근에 특히 높아지고 있는데, 왜일까?

    잡아끄는 요소들이 여럿이다.

    일단 도성을 따라 걸으면서, 우리가 몰랐던 서울 도심 자연환경의 매력을 아주 잘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첫 번째 요소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게 개발됐던 도심 한복판 에 비밀의 정원과 같은 숲길과 계곡을 발견하는 그 새로움이 있고, 왜 하필 이곳을 최고 명당지로 보고 조선이 천도했는지를 새삼 깨닫는 즐거움이 있다.

    또 다른 매력은 도성길이 이어지는 산의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

    300m 높이의 북악산과 인왕산, 200m 높이의 남산, 100m 높이의 낙산, 서울 도심을 둘러싼 네 개의 산, 즉 내사산을 따라 쌓여진 성곽이 서울한양도성이다.

    이 내사산의 높이가 그리 높지 않다. 가파른 성곽 계단길도 있지만, 북한산이나 관악산 등산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서울 도성 산책로는 트래킹에 가깝다. 운동화만 신었다면 젊은 남녀 커플들이 함께 데이트를 즐길 코스로서도 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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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으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바로 도성을 따라 펼쳐지는 도시 전경이다.

    도성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어느덧 100m 높이에만 올라도 서울 도심 전경이 펼쳐지고, 남산에 이르러 200m만 오르면 한강 너머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또 편안히 걷다가 북악산과 인왕산을 만나서 300m까지 천천히 오르면 내사산 바깥에서 다시 한번 서울 도성을 둘러싸는 네 개의 산, 북으로 북한산, 남으로 관악산, 동으로 아차산, 서로 덕양산, 그리고 그 너머까지 메가시티 서울의 속살과 외양, 그걸 감싸는 자연 풍경이 펼쳐진다.

    게다가 북악산을 제외한 인왕산과 남산, 낙산의 도성 구간은 밤에도 거닐 수 있다. 역사의 풍치가 느껴지는 도성을 은은한 조명이 비추며 따라오고 그 도성 너머에는 서울의 화려한 야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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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 모든 것 위에 가장 핵심적인 매력은 도성을 따라 걸으면서 역사도시 서울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게 되고, 서울의 세월과 역사,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서울의 가치를 재발견하면서 내가 사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들을 품고 있던 서울한양도성이 특히 최근 빠르게 인기와 관심을 모으게 된 것은 문화, 특히 역사문화자원에 주목하는 분위기, 그리고 건강과 자기 성찰, 정신적 힐링을 위한 걷기 열풍, 전국 각지의 올레길, 둘레길에 대한 관심, 이런 것들이 함께 맞물리면서부터다.

    게다가 그동안 개방되지 않던 청와대 근처의 북악산 성곽길이 개방되고, 인왕산 성곽길도 복원되고 도성 길이 전반적으로 정비되면서, 서울한양도성은 도보여행자들의 필수 아이템이 됐다.

    도성의 4대문 중 정문에 해당하는 남대문 즉 숭례문의 복구 개방도 5월 4일, 불과 보름 다가오면서 시민들의 관심은 더 커지고 있다.

    ◈ 서울한양도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능성은?

    서울한양도성이 지난해 11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재목록에 올랐다. 후보에 올랐다는 의미로, 정식 목록 등재의 과제는 지금부터다.

    서울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 도성 성곽 중에서 세계 최장 기간 도성 역할 수행했고 남아있는 수도 도성으로 세계 최장 길이를 자랑한다. 이러한 가치가 인정을 받고 있으며,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능성이 작지 않다.

    2015년 등재를 목표로 노력이 이뤄지고 있는 서울한양도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단순한 성곽 건축물의 관광자원화를 뛰어넘는 의미를 지닌다.

    도성이라는 말은 성곽 자체를 뜻하기도 하고, 그 성곽이 품은 도읍 전체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서울한양도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려는 시도를 계기로 삼아, 우리도 단지 성곽뿐 아니라 성곽이 품은 공간, 즉 도읍지였던 서울 옛 도심 자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유럽의 많은 역사도시의 옛 도심들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것처럼 말이다.

    이건, 단순한 성곽만을 세계적인 문화자원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것이 품고 있는 서울 사대문안 도심 전체의 역사문화와 생태 복원으로 연결시켜서 옛 도심 전체를 역사도시로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단순히 역사를 관광자원을 개발해서 돈을 벌자가 아니다. 서울에 대한 시각, 수도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사는 방식, 도시계획의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의 기폭제가 바로 서울한양도성이다. 지금 우리가 걸어갈 곳은, 이곳 성곽도시 서울의 둘레길, 바로 서울한양도성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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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성 트래킹을 시작하려면, 도성에 대한 기본 지식이 먼저 있어야 할 텐데?

    도성 그리고 도성을 드나드는 성문에 대한 기초 지식을 살펴보자.

    조선이 개국과 함께 고려 제2의 수도인 남경으로 천도해 지금 서울 도심을 수도로 정하면서, 정도전은 이 수도를 철저한 유교적 원리에 따른 계획도시로 건설했다.

    제일 먼저 한 것이 종교시설을 만드는 것. 불교국가 고려와 전혀 다른, 유교국가 조선을 개국하면서 유교의 종교시설인 종묘와 사직을 지었다. 종묘는 선왕의 위패가 모셔진 곳, 사직은 농경사회의 신인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던 곳.

    종교시설을 만든 후 지은 것이 정치공간인 경복궁. 경복궁을 지으면서 이어서 쌓은 것이 군사방어시설, 곧 성곽이다. 그리고 경제시설인 시전이 만들어졌다. 정도전은 이 모든 것을 ''주례고공기''라는 책에 담긴 유교의 전통적 도시계획원리에 따라 우리 자연환경에 적용시켜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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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곽은,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 사대문안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개의 산, 북쪽의 북악산(백악), 서쪽의 인왕산(인왕), 남쪽의 남산(목멱), 동쪽의 낙산(타락), 내사산이라고 일컫는 이 네 개의 산에 둘러서 쌓았다.

    그 성곽 둘레 길이가 18km. 이 18km 중에 무려 12km가 지금도 남아 있다.

    성곽이 옛 도심을 둘러싼 네 개의 산 능선을 따라 쌓여서 서울의 무차별적인 개발 속에서도 산에 있는 성곽들이 그대로 보존돼있었기 때문이다. 도성의 높이가 10m가 넘으니 성문이 없이는 사람이든 물자든 드나들 수 없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4대의 대문과 4개의 소문.

    4개의 산 밑에 있는 4개의 대문과 도성 한가운데의 종루를 유교의 핵심 가치인 오상, 즉 인의예지신을 붙여서 이름 지었다.

    남산 밑의 남대문을 ''숭례문'', 인왕산 밑의 서대문을 ''돈의문''(이 문이 원래는 사직터널 근처에 있다가 세종 때 지금의 서대문 자리로 옮겨졌는데, 새로 옮겨진 문을 그 당시에 ''''새문''''이라고 부르면서, 지금까지도 서대문을 새문이라고 부르고, 그 안의 도로를 새문안길 혹은 신문로라고 부르게 됐다), 북악산 위의 북대문을 ''숙정문''(여기에 智가 들어가야 하는데 ''지혜로움''이라는 덕목이 당시 민주국가가 아닌 봉건왕조에서 백성이 지녀야 할 덕목으로는 부적절하다는 생각에 ''지혜로움''보다 급이 좀 낮은 ''꾀''를 뜻하는 꾀 정 靖자를 썼다는 설명이 있다. 智는 결국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홍지문''에 쓰였다), 낙산 밑의 동대문을 ''흥인지문''(흥인문이라는 이름이 맞을 텐데 여기에만 之를 넣은 이유는, 동쪽 지세가 낮아서 산세의 형상을 가진 갈 지자를 넣어 낮은 지세를 보강하려는 뜻이었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설명) 그리고 도성 한 가운데 있는 ''보신각''. 백성들이 도성을 드나들 때마다 공간과 대화하며 유교 이념을 체득하도록 하기 위한 정도전의 기획이었다.

    지금 숭례문과 흥인지문, 숙정문이 남아 있고, 서대문인 돈의문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채로 빈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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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4대문 사이사이에 소문을 뒀으니 그것이 4소문. 지금 북소문인 창의문, 남소문인 광희문이 예전 모습으로 남아있고(단 광희문은 1975년에 그 위치만 남쪽으로 조금 옮김), 혜화문은 20년 전에 본래 위치에서 서쪽으로 조금 비껴선 자리에 복원해놓았다.

    서소문인 소의문만 역시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채로 빈자리. 그러니까 지금은 서대문과 서소문만 없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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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성곽을 산 위의 석성, 평지의 토성으로 처음 쌓은 이는 조선을 개국하고 천도한 태조 이성계. 그리고 그 다음, 성곽을 석성으로 전면 보수한 이가 조선의 국가 체제를 전면 정비했던 세종. 그리고 그 다음, 성곽을 정방형의 돌로 반듯하고 튼튼하게 다시 고쳐 쌓은 왕이 병자호란 이후 청의 간섭에서 살짝 비켜서 있던 숙종. 그리고 해방 후 개발로 훼손된 성곽 복구해 나선 인물이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는 굴레를 벗고자 전통문화재 복구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

    크게 이렇게 4차례에 걸쳐 성곽이 만들어지고 고쳐졌다. 도성을 따라 걸으면 바로 이 네 시기마다 서로 다르게 쌓인 성곽의 모습이 세월의 나이테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이것이 도성을 걷는 중요한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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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도성을 쌓을 때, 여러 구간별로 책임자와 감독자를 둬서, 지역의 이름과 책임자의 이름을 성곽에 새기도록 하고 하자보수까지 책임지게 하는 이른바 공사실명제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지금도 지역명과 책임자를 성돌에 새긴 글자, 즉 ''각자''가 도성 곳곳에 남아있다. 도성을 걸으면서 이런 각자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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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렇다면 18km 구간, 어디서 어떻게 트래킹을 시작해야 좋을까?

    조선시대에는 도성 전체를 하루 종일 한바퀴 도는 것이 하나의 전통놀이였고, 이를 순성놀이 혹은 순성장거라고 불렀다.

    지금도 가을에 서울 KYC의 도성길라잡이라는 단체가 서울시 및 종로구와 함께 진행하는 순성놀이가 있는데, 간략한 설명을 곁들인 안내와 함께 천천히 걸으면 아침 8시에 시작하면 오후 6시에 끝나니, 대략 10시간이 걸린다.

    기분 좋고 뿌듯한 경험이긴 하지만 18km 구간을 한번에 다 걷기에는 좀 벅찰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서울 KYC 도성길라잡이에서 서울시 및 종로구와 함께 도성 한바퀴를 네 코스로 나눠서 도성 트래킹 안내를 매주 일요일 낮 한시반부터 3시간 정도 길이로 진행하고 있다.

    북악산 구간, 낙산 구간, 남산 구간, 인왕산 구간, 이렇게 네 구간으로 나눠서 한주에 한 구간씩 역사 스토리텔링이 있는 안내 답사를 진행한다. 종로구청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하시면 되고 이 안내를 통해서 네 주 동안 도성 한바퀴를 돌 수 있다.

    시작은 어느 구간부터 해도 좋다. 다만 구간마다 난이도가 좀 다른데 처음에 좀 쉽게 시작하시면, 역시 산과 지대가 낮은 동쪽 낙산 구간이 좋을 수 있다. 낙산 구간에서 시작해서, 시계방향으로 남쪽 남산 구간, 서쪽 인왕산 구간, 마지막으로 북쪽 북악산 구간, 이런 순서로 가시는 것이 원래 순성의 방향에도 맞고 난이도의 순서에도 맞으니 참고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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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성 네 구간 각각의 특징은?

    물론 구간마다의 특징이 있다. 도성이라는 말에는 성곽 건축물 자체뿐 아니라, 성곽이 품은 도읍 전체도 포함된다는 점을 언급했는데, 이 부분이 중요하다. 서울한양도성을 걸을 때는, 성곽과 그 너머의 경치만 계속 보고 걷는 게 아니라, 그 구간이 품은 도성 내부의 이야기와 역사를 만나는 것이 진짜 서울한양도성의 답사다.

    조선시대 도성 지역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크게 북촌, 남촌, 서촌, 동촌으로 나뉘었다.

    먼저, 북악산 구간이 품고 있는 북촌.

    북촌은 잘 알다시피, 북악산을 등지고 청계천을 바라보는 남향의 양지바른 배산임수 명당지로, 고관대작들의 거주지였다. 그리고 경복궁, 조선총독부, 청와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우리나라 최고 권력의 핵심 지역이었다. 북촌의 핵심 키워드를 잡으라면 ''권력과 통치''.

    이 구간에서 꼭 가봐야 할 도성 안 마을이라면 역시 조선시대 최고 권력층이 살던 북촌 마을이다.

    가회동과 삼청동, 계동, 인사동 등의 골목과 거리를 산책하면, 역사 속 북촌의 정취와 함께 전통과 현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건물과 골목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훌륭한 시간 여행이다. 다만 북촌이 뜨면서 카페들이 너무 많이 밀려들어오고 공간의 상업화가 빨라지면서 마을 고유의 운치와 마을의 다양한 사람살이를 만나기 어려워졌다는 탄식도 많아지고 있다.

    북촌의 골목의 생태계가 아직 남아있는 곳을 추천한다면 개인적으로 계동길을 권한다. 중앙고등학교 정문에서 현대 계동사옥 방향으로 걸어내려가는 작은 거리에는 공방과 사진관, 문방구와 목욕탕, 교회와 사찰, 분식집과 레스토랑, 쌀집과 피자집, 전통찻집과 카페가 사이좋게 자리잡고 있다.

    12000원이면 소고기 스테이크를 맛나게 먹는 맛집도 골목 중간에 숨어있다. 이 작은 거리에서 양쪽 옆으로 한옥 골목들이 뻗어올라간다. 이렇게 북촌의 골목과 거리 그리고 마을 생태계가 획일적인 카페촌으로 잠식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인왕산 구간이 품고 있는 서촌.

    이곳은 경복궁과 청계천의 서쪽 지역으로, 양반들과 예술적 풍류를 즐기던 문인들(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추사 김정희와 중인들의 위항문학, 윤동주, 노천명 시인, 박노수, 이상범 화백,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패션쇼를 열었던 이여성 등), 그리고 궁궐에 물자를 대던 장인들 그리고 중인층들의 거주지였다. 지금도 많은 예술인들이 자리 잡아서 예술 활동을 해나가는 곳이자 갤러리의 집결지, 특히 19세기 후반부터는 정동을 중심으로 서양세력의 거점이 됐고, 그 서양세력을 외교적 권력 기반으로 삼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했던 경운궁(덕수궁)이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서촌의 핵심 키워드를 잡으라면 ''예술과 문화 그리고 근대화''.

    이 구간에서는 서촌 마을 안 골목 곳곳을 거닐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해온 예술인들이 살고 활동했던 역사의 현장들을 만나보시길 권한다. 그리고 서촌에 포진한 수많은 그리고 아기자기한 무료 입장 갤러리들도 꼭 즐겨보시길.

    서양 세력의 거점이자 근대화의 산실이었던 정동 산책은 필수 코스다. 허기가 진다면 통인시장의 도시락 카페를 찾으면 재밌고 맛나는 경험을 할 수 있고, 종로 피맛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경복궁역 뒤편 금천교시장도 지난 시절의 추억을 느끼며 헐한 가격에 배불릴 수 있는 곳이다.

    서촌은 북촌에 비해 좀 더 호젓하고 여유 있는 마을 분위기가 매력이라 북촌 산책을 이곳에서 대신하려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서 지금 서촌에도 북촌의 카페 물결이 넘어오고 있는지라 서촌에 둥지를 튼 많은 이들은 서촌의 마을과 골목 생태계를 지키려는 시도에 나서는 중이다.

    다음은, 낙산 구간인 동촌.

    이곳은 기본적으로 서울에서 지대가 낮은 곳이다. 한반도 지형이 동고서저형인데, 서울은 서고동저형. 그래서 청계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중랑천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그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 서해로 가고. 다시 말해 동촌은 땅이 낮은 평지대, 즉 청계천 범람 습지였다. 주거 여건으로 좋지가 않았기 때문에 양반 중에서도 조선시대 문인이 아닌 무인, 그것도 하급 무관들과 병사들의 거주지였다.

    그리고 가난한 백성들, 심지어 청계천 준설로 산처럼 쌓인 흙 속에 굴을 파서 살던 땅군 즉 거지들도 많이 살던 곳이 동촌. 이런 동촌의 특징은, 이 지역을 좀 더 저항적이고 민중적인 특색을 갖게 했다.

    근대 이후에도 차별받던 구식군대와 강제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을 중심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이 거셌던 곳, 해방 이후 전태일 열사로 상징되는 노동운동의 성지,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시장인 같은 재래시장과 동대문시장으로 대표되는 서민들의 터전이 이곳이다. 이런 동촌 지역의 핵심 키워드라면 ''서민, 민중 그리고 저항''.

    낙산 구간에서 꼭 가봐야 할 동네는 대한민국 공연문화의 아지트 대학로와 아시아 최대 의류시장인 동대문시장이다. 대학로와 동대문시장은 그 자체로 할 말이 워낙 많아서 다음 기회에.

    마지막으로 남산 구간인 남촌.

    남촌은 남산을 끼고 있어 좋은 자연환경을 지닌 거주지이긴 했으나, 남산 진고개라는 말이 보여주듯 북향으로서 음지이고 땅도 질어 양반 중에서도 가난한 선비, 몰락한 양반들의 거주지였다.

    과거 시험에서 지금의 고시 1차에 해당하던 것이 과거 초시라 일컬어지던 진사시와 생원시. 1차 시험인 생원시와 진사시에만 붙고 최종 합격이 안 돼서 양반은 양반인데 관직을 못 얻어 책만 붙잡고 사는 가난한 양반 선비들의 거주지. 생원시까지만 합격한 양반을 생원님이라 불렀는데, 이 말이 줄어서 샌님이 됐고 짚신을 살 돈이 없어서 음지의 질퍽한 땅을 걷기 위한 나막신을 맑은 날에도 신고 다녀 딸각딸각 신발소리를 내고 다닌다해서 남산골 딸각발이 샌님이라는 말이 나왔다.

    꼬장꼬장하긴 하지만 지조를 중시하면서 북촌의 기득권층을 원칙을 내세워 견제하던 이들, 그들이 바로 남산 기슭 남촌의 딸각발이 샌님들이었다.

    하지만 지난주에 남산 답사 키워드에서 짚어봤듯이 남산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의 주둔지인 왜성대의 터이자 100여년전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의 거점이자 일본인들의 핵심 거주지였다.

    그리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인권 탄압이 자행되던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터로 이어진 뒤 지금은 이런 역사를 잊지 않고 승화시키기 위한 인권과 평화의 성지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곳이 남산이다. 따라서 이 구간의 핵심 키워드는 ''일제와 민족 그리고 독재와 인권''.

    일제강점기 일본이 서울의 공간 개조를 시도하면서 자신들의 거점인 남촌을 중심으로 개발을 시작하는데, 본정으로 불리던 충무로, 명치정으로 불리던 명동이 모두 그때 만들어진 번화가. 자본주의의 상징인 백화점과 은행도 지금 남대문로에 일본이 만들었으니 당시 미츠코시 백화점과 조선은행 건물이 지금의 신세계백화점과 구 한국은행 건물이다. 남산을 산책하면서 남산 밑의 번화가들을 함께 걸으면서 이런 맥락들을 느껴보시길 바란다.

    도성 이야기는 그 자체로 무궁무진해서 방송으로 여러 차례 시리즈로 다뤄야 할 내용이다.

    도성 안 4개의 구간, 4개의 도성 지역에서 둘러볼 곳도 넘쳐 흐른다. 오늘은 그 간략한 개괄만 제한된 시간 안에 설명을 드렸으니, 오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일단 어느 구간이든 한번 산책을 떠나보시길 권한다.

    여기서 꼭 주의하실 건, 북악산 구간만은 군사제한지역으로 입장 시간이 3월부터 10월까지 하절기에는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로 제한돼 있고, 퇴장시간은 6시(동절기에는 오전 10시~오후 3시, 퇴장시간은 5시), 신분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 입장료는 물론 무료. 다른 구간들은 이런 출입 제한이 없다.

    어느 구간을 누구와 걸으셔도 좋지만, 특별히 이야기가 있는 안내를 따라가시는 것을 추천한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서울KYC 도성길라잡이라는 단체에서 종로구와 함께 도성 한바퀴를 한달 동안 한주에 한 구간씩 네차례에 걸쳐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북악산 구간, 낙산 구간, 남산 구간, 인왕산 구간, 이렇게 네 구간으로 나눠서 한주에 한 구간씩 역사 이야기가 있는 안내 답사를 진행하니까, 종로구청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하시면 된다. [BestNocut_R]

    봄볕 속에서 느끼는 세월과 역사의 숨결 그리고 낭만을 지금 즐겨보자. 하루로 만나는, 아니면 네 번에 걸쳐 만나는 천년 고도 ''낭만 서울''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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