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한 번 할래?". 대학을 졸업하고 한 증권회사에 갓 취직한 어느 날. 교회 후배 민석이(25)가 카카오톡 사진을 내밀었다.
호감가는 첫 인상에 그녀와 일주일간 SNS로 대화를 나눴다.
주말이던 지난달 6일 늦은 저녁, 드디어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서 그녀를 만났다.
처음 본 사진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에 놀라긴 했지만 크게 신경쓰진 않았다.
소개팅 주선자인 민석이도 자리를 함께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같이 찜질방을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이것이 다단계 지옥으로 빠지는 첫 관문일 줄은. 하지만 첫 소개팅은 곧바로 찜질방으로 이어졌고, 세 사람은 함께 일요일 아침을 맞았다.
◈소개팅에서 찜질방 그리고 대출까지…지옥같던 다단계 3일
= "근처에 내 사무실이 있는데 구경하러 가자". 찜질방을 나서자 민석이와 그녀가 이상한 제안을 했다.
''투잡''(Two Job)으로 쏠쏠하게 돈을 벌 수 있는 회사이니 같이 가보자고 했다.
''구경만 하는 건데 나쁠 건 없겠지''. 호기심도 살짝 동했다.
서초동의 한 4층짜리 건물 안에 들어서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둥근 테이블이 놓인 방으로 안내되자 민석이와 그녀의 표정에서 갑자기 웃음기가 사라졌다.
잠시 뒤 이들의 상사로 보이는 사람이 왔다.
회사 자랑과 본인 성공담을 한참 늘어놓더니 "여기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
다만 "600만 원만 있으면 된다"는 꼬릿표가 붙었다.
이어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차례로 와서 "600만 원어치 물품을 사면 석 달 안에 억대 연봉을 받는 직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원천징수 영수증까지 보여주며 "전혀 문제 없는 회사"라고 강조했다.
솔깃함과 두려움이 교차하던 중 얼떨결에 대출계약서를 작성했다.
서명을 하자마자, 민석이가 독수리처럼 낚아채갔다.
통장에는 600만 원이 입금됐다.
휴일이라 문 닫은 은행 대신, 대부업체가 선입금한 돈이었다.
이후 업체 사람들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찜질방에서 자자"며 집에도 못가게 했다.
부모님의 잇따른 전화에 그날밤 11시에야 겨우 집에 갈 수 있었지만, 업체 사람들은 귀갓길도 동행했다.
◈화장실 따라가고 이어폰 꽂아 통화까지 감시
= 다음날인 월요일 아침.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업체 사람들이 집 앞까지 나타나 양쪽에서 팔을 붙잡았다.
"회사 가야 한다"고 항의했지만 뿌리치지 못했다.
이날 결국 무단 결근한 채 서초동 사무실까지 동행하게 됐다.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밥 먹는 시간을 빼곤 10평 남짓한 방에서 끊임없이 강의를 들었다.
두세 시간마다 바뀌는 강사들이 회사 소개와 수익 구조, 영업 방식 등을 반복해 설명했다.
이들의 감시는 거의 감옥 수준이었다.
돈을 빌린 대부업체에서 대출 확인 전화가 오자, 이어폰을 양 쪽에 나눠 꽂고 대답을 감독했다.
식사는 물론 화장실 가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친구가 아프다고 거짓말하라"며 집에도 못 가게 했다.
회사도 결근하고 연락도 하지 않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부모님이 사무실 근처까지 데리러 왔다.
겨우 돌아간 집에서 사흘간 있던 모든 일을 털어놨다.
날이 밝자마자 가족과 친척들이 떼를 지어 사무실을 찾아갔다.
싸우다시피 항의한 데다, 영수증도 다행히 갖고 있었다.
''일주일 안에는 대출금을 환불받을 수 있다''는 규정까지 찾아낸 덕분에 간신히 돈을 되찾았다.
◈빠져나오긴 했지만…직장 해고에 "본인 탓" 면박뿐
= 지옥 같은 사흘이었지만 빠져나온 안도감이 훨씬 컸다.
그러나 무단 결근을 한 탓에 어렵사리 취직한 증권회사에서 해고됐다.
교회 후배와 그녀에 대한 배신감도 커서, 한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고민 끝에 경찰서를 찾아갔지만 "대출 계약서에 서명을 한 건 본인 책임"이란 대답만 돌아왔다.
만약 그때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한 달이 지난 지금 어떻게 돼있을까. 인생에서 영영 지워버리고 싶은 사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