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한 도시의 핏줄이다. 역사도시에는 도시와 함께 나이를 먹은 길과 골목들이 여전히 실핏줄처럼 놓여있다. 서울은 어떨까? 고려 남경으로부터 1000년 고도이자 조선 한성으로부터의 600년 수도인 역사도시 서울도 예외는 아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지금까지 이어진 파괴적 개발 속에서도, 역사도시 서울한양도성 즉 사대문안 구도심 속에는 여전히 이 도시의 역사와 함께 해 온 핏줄로서의 길, 실핏줄 같은 골목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런 길과 골목 중 대표적인 곳 몇 군데를 지금부터 함께 걸어보자. 무심히 걷던 서울 도심의 길과 골목이 품은 세월의 두께를 사색하고 음미한다면, 서울살이도 결코 팍팍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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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500년 길과 골목들을 고스란히 품은 ''''서촌''''
조선시대의 길과 골목을 가장 잘 품고 있는 곳이 경복궁 서편~인왕산 동편에 이르는 서촌이다. 서촌에 들어서면 굽어 흐르는 길을 만나고, 골목으로 접어들면 개량한옥과 주택들 사이사이로 아기자기한 골목길들이 꺾이며 이어진다. 이 길들이 대부분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길들이다. 서촌에 이렇게 500년 길과 골목이 남아 있게 된 데에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이곳이 경복궁과 청와대 부근 마을로서 고도 제한을 포함해 각종 난개발이 억제돼왔기 때문이다. 기존의 길과 골목을 부수고 구획을 정리하는 따위의 개발 열풍이 이곳을 비켜간 것이다. 둘째는 북촌과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북촌은 조선시대 최고위 양반관료 거주지로서 거대 한옥 밀집 지역이었다. 그래서 북촌에서는 지난 100여년 동안 대형 한옥 필지를 분할해서 집을 짓고 길을 내는 일들이 일어난 반면, 중인과 예술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서촌의 한옥은 그렇게 필지를 분할할 만큼의 거대 한옥 지역이 아니었기에 기존의 필지들이 상당 부분 보전돼 있다. 서촌에 500년 골목이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북악산과 인왕산을 북과 서로 바라보는 서촌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많았고, 이 물길을 따라 물길 양옆에 길이 나 있었다. 서촌을 걸으면서 만나는 ''''굽어 흐르는'''' 길들은 조선시대 물길을 따라 나 있던 길이었다고 보면 되고, 그 속의 실핏줄 같은 골목은, 500여년 우리 민족이 걸어온 바로 그 길이라고 여기면 된다. 아쉬운 점은 지금의 길을 만든 조선시대 아름다운 물길들이 모조리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덮여버렸다는 것. 그러나 지금 그 콘크리트 길 밑에선 여전히 물이 흐르고 있다. 눈과 귀를 열고 지금 서촌의 길과 골목 속 500년을 걸어온 사람들의 발자욱, 콘크리트 밑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느껴보자.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 내려서 서촌 동네 곳곳을 조용히 걸으며 시간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다. <오래된 서울="">(최종현, 김창희 저)이라는 책을 참조하면서 서촌을 걷는다면, 더 밀도 높은 시간 여행이 될 것이다.
②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종묘 ''''돌담길''''
우리 고궁의 돌담길은 그 운치뿐 아니라 오랜 역사성으로도 가장 소중한 길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경복궁 전체 돌담길과 창덕궁 서편 및 창경궁 동편 돌담길은, 길의 모습은 변했어도 500여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닌 길이다. 종묘 돌담을 따라 나 있는 ''''순라길''''도 마찬가지다. 덕수궁은 19세기말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본격적인 고궁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 덕수궁 돌담길의 나이는 100여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고궁의 돌담길을 걸을 때 담장의 운치뿐 아니라, 궁궐 주변 순라를 돌며 걸었던 병사들과 고관대작들 그리고 나인들의 발자욱을 생각하며 걷는다면, 더 멋진 산책이 될 것이다. 여기서 아쉬운 것은, 고궁 가운데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의 돌담길이다. 돌담길의 의미와 역사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지금 돌담길을 자동차 주차장으로 만들어놓았다. 게다가 창덕궁 돌담 옆에 개인 주택마저 끼어들어간 상황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라도 길의 역사, 길의 가치에 주목하고 지금과 같은 돌담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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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사간동길과 그 사이 골목들, ''''율곡로 1길''''
앞서 서촌과 북촌을 비교했지만,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북촌의 저력도 결코 만만치 않다. 먼저 경복궁 동십자각 오른편 ''''란 스튜디오'''' 옆으로 나 있는 길로 들어서자. 이 길도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그 길, 바로 사간동길이다. 굽어 올라가는 길 사이로 골목들이 나 있으니, 이곳 역시 산책해보자. 예쁜 갤러리와 작은 식당과 카페들이 있지만 의외로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동네라서 꽤 호젓하다. 이 골목을 걸으면서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사간동길 오른편에서 풍문여고 부근까지 높은 담장을 치고 넓은 북촌 땅을 차지하고 앉은 곳, 바로 송현동 일대 약 13㎡에 달하는 미 대사관 직원 숙소 부지다. 미 대사관과 이곳 대사관 직원 숙소 부지를 용산으로 이전하기로 돼 있지만, 문제는 이곳 미 대사관 직원 숙소 부지를 지금 소유하고 있는 대한항공이 7성급 한옥 호텔을 짓겠다고 나선 것. 이곳이 경복궁 궁녀들 특히 무수리들의 숙소 터였음을 감안하면, 이곳을 궁궐 궁녀들의 삶을 조명하고 복원하는 역사문화의 장소로 복원돼야 하지 않을까.
④ 안국동과 삼청동을 잇는 ''''별궁길''''
안국역에서 삼청동으로 올라가는 길은 두가지다. 풍문여고 입구 옆 감고당길과 지금 ''''윤보선길''''이라고 이름 지어진 별궁길. 감고당길과 별궁길 모두 매우 운치있는 산책로다. 여기서 별궁길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길로 추정할 수 있다. 지금의 풍문여고 부근에 자리잡았던 안동별궁은 고종 18년(1881년)에 지은 별궁으로, 이 터는 그 전부터 역대 왕실의 저택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 고종이 별궁을 지어 왕세자의 가례식, 순종과 계비의 혼례식 등이 이곳에서 열렸고, 고종 당시 조선 왕실의 축제가 열리던 별궁으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이 안동별궁의 오른쪽 경계에 나 있던 길이 지금의 별궁길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길을 따라 윤보선가와 안동교회를 지나 갤러리들 사잇길로 올라가는 골목을 산책해보자. 역사도시 서울 산책로를 대표할 만한 운치를 느껴볼 수 있다. 길이 생명을 얻으려면 걷는 사람이 많아야 하고, 다니는 차는 줄어야 하는데, ''''감고당길''''이 주말과 휴일 차 진입을 막고 보행 거리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부분은 그런 면에서 고무적이다.
⑤ 한옥마을의 중심 ''''북촌한옥마을 골목길''''
지금의 북촌 한옥들은 과거 그대로의 한옥이 아니라, 필지를 나눠 ''''대량생산''''한 개량 한옥으로, 역사가 그다지 길지는 않다. 따라서 지금 북촌한옥마을에 나 있는 길과 골목들이 모두 조선시대 그대로라고는 할 수 없다. 일부 길은 택지에 묻혀 합쳐지고, 혹은 필지가 나뉘면서 새 골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북촌한옥마을의 중심을 이루는 길들은 조선시대 길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지금 그 길들을 현재의 지도와 정확히 비교해서 적시하기는 어렵지만, 비교적 규모를 가진 길들은 필지가 나뉘기 전 거대 한옥 지역으로서의 조선시대 북촌 당시부터 존재하던 길이라고 볼 수 있다. 북촌한옥마을을 거닐면서 전통적인 풍치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길과 골목에 눈길을 돌려 시간 여행을 떠나보면 더욱 좋겠다.
⑥ 전통문화거리 ''''인사동길''''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의 거리로 골동품점, 화랑, 표구사가 운집했던 인사동은 지난 2002년 국내 최초로 ''문화지구''로 지정됐다. 하지만 문화지구 지정 10년이 지난 인사동은 고유한 전통 문화적 특징을 잃은 채 그저 그런 보통의 공예품과 상업의 물결로 뒤덮였다는 안타까운 지적을 받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요즘 인사동에서 진정성 있는 전통적 특징을 찾기 위해, 인사동길 이면의 골목들을 헤매고 다닌다. 이렇듯 고유의 특징 복원을 위한 변화의 요구 앞에 서 있는 인사동 상점과 상품 그리고 건물들 밑에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500년이 넘는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길이 묵묵히 놓여있다. 인사동의 남과 북을 관통하는 인사동길과 그 옆의 골목들이다. 지금의 인사동길과 골목의 형세는 조선시대부터의 모습을 상당 부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전통의 빛을 잃어간다는 비판 속에서도 인사동은 그 길과 골목을 통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문화거리로서의 내공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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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600년 역사의 상업로 ''''종로''''와 서민의 길 ''''피맛길''''
서울 한양도성은 처음부터 조선 왕조의 도성의 역할을 하기 위해 건설된 계획도시였다. 도성 내 경제 중심 도로였던 종로 역시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동서 간선 도로였다. 육의전을 비롯한 상점들이 들어찼던 시전 거리 종로는 한양 도성의 가장 큰 번화가였다. 근대에는 아시아 최초로 전차 노선이 부설됐고, 1974년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이 도로 아래에 지하철이 건설됐다. 80년대 이후 상권의 독보성은 사라졌지만, 지난 600년간 우리나라 역사를 대표해 온 번화가이자 상업의 거리가 바로 종로다. 지금 종로는 바로 600년 종로의 모습과 상징성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종로에는 역사의 흔적이나 운치를 거의 느낄 여지가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대표하는 거리임에도, 건축물에서든 거리의 특징에서든 그 어디서도 전통을 만나볼 수 없다. 과거 종로에 늘어섰던 시전 행랑들의 일부라도 복원돼 있다면 좋으련만, 종로는 지금 국적 없는 현대의 특색 없는 거리일 뿐.
그래서일까. 우리는 종로가 아닌 그 뒤편의 좁은 피맛길에서 역사를 만나고 낭만을 만끽했다. 말을 타고 종로를 행차하던 양반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서민들이 이용하던, 말을 피해 다니는 길이라는 ''''피맛길''''. 이 좁고 남루한 길에서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끼고 애환을 나눴던 이유는, 이 길이 우리 핏 속에 기억된 600년 서민들의 역사길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도심 재개발 속에서도 피맛길은 남아, 종로 입구에서 종로 3가까지는 북쪽 피맛길이, 종로 3가부터 6가까지는 남쪽 피맛길이 고된 서울살이에 지친 현대의 서민들을 달래주었다. 그러나 이제 르메이에르 건물이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지금 진행되는 청진동 재개발 공사로 북쪽 피맛길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600년 서울 역사길을 대표해 온 피맛길이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지금 피맛길의 정취를 느끼려면, 종로 3가로 가서 남쪽 피맛길을 찾아야 한다. 피맛길을 걸어보자. 종로 입구에서부터 사라져버린, 그리고 사라져가는 피맛길을 보며 우리가 서울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되돌아보자. 그리고 종로 3가에서부터는 남쪽 피맛길로 접어들어 600년 우리 서민들이 울고 웃던 이 골목 속에서 정겨운 이와 한잔 기울여보자.
⑧ 600년 역사의 국가중심대로 ''''세종로''''와 서편 옆길 ''''새문안로 9길''''
종로가 조선의 경제 중심 도로였다면, 정치 중심 도로는 육조대로, 지금의 세종로였다. 세종로는 지금도 정치권력을 상징하는 핵심 도로로서, 조선시대 육조대로의 모습과 흐름을 이어오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곳 세종로를 걸으면서 ''''육조대로''''로서의 역사적 흔적이나 특징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 세종로라는 이름에 맞춘 세종대왕동상이 지독하게 진부하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놓여 광화문을 향하는 전경만 도리어 막아서고 있을 뿐이다. 광화문광장뿐 아니라, 얼마전 광화문광장 옆 세종로 보행로 옆에 만들어진 세종로광장도 육조대로로서 이 역사길의 매력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육조대로에서 광화문 앞에 놓였던 삼군부 총무당 본관 건물을 엉뚱하게 일제에 의해 옮겨져버린 지금 위치(성북구 삼선공원)에서 육조대로 세종로광장 등의 터로 옮기고,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잘 만들어 전시 중인 육조대로 주변 상세 축소 모형을 바닥에 입체 전시하는 등의 방식으로 세종로의 역사성을 복구해내는 발상이 필요하다.
도리어 눈길을 끄는 길은, 세종로 네거리에서 세종로 서편으로 비스듬히 휘어가는 ''''새문안로 9길''''이다. 이 길 역시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5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길이다. 인왕산에서 내려온 백운동천이 청계천으로 흘러가던 물길로서 지금도 그 흐름을 그대로 간직한 채 놓여있다. 이 길 때문에 세종로네거리 서북편에 놓인 건물이 끝이 뾰족한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우리가 늘 걷던 이 길의 600년 나이를 생각하며 이젠 역사산책로 삼아 답사해보면 어떨까.
⑨ 조선왕조 500년 중 300년의 궁궐대로 ''''돈화문로''''와 주변 먹거리 골목 ''''돈화문로 11길''''
조선왕조 500년의 기간 동안 가장 오래 왕이 머물며 정사를 펼치던 궁은 어디었을까? 바로 ''''창덕궁''''이다. 경복궁은 조선 개국 후 200년을 머물다가 임진왜란으로 불 탄 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까지 무려 300년 동안 폐허로 남아있었다. 그 300년을 메운 궁이 바로 창덕궁으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앞에서 단성사와 피카디리까지 종로에 이르도록 남쪽으로 나 있는 길은 지금까지도 ''''돈화문로''''로 남아있는 600년 역사의 길이다. 하지만 돈화문로는 창덕궁의 가치와 위상에 걸맞지 않게 사람들의 발길이 적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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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뒤의 피맛길처럼, 돈화문로 옆에도 피맛길과 같은 길이 조선 초기부터 나 있었으니, 그것이 지금의 돈화문로 11가길이다. 그리고 왼쪽으로 살짝 굽어드는 돈화문로 11나길은 고려시대부터 있던 길이다. 이 길이 있는 동네 이름은 익선동. 익선동 한옥촌으로 들어가면 100년 역사를 바라보는 한옥 100여채가 가까이 들어서 있다. 서울에 오래 살았어도 한번 들려본 기억도 없을 법한 동네지만, 역사길과 골목들이 보존돼 있을 뿐 아니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유명한 서민적 먹거리 골목이다. 두 사람이 겨우 나란히 지나갈 법한 좁은 골목을 따라 맛집들이 이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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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사직단으로 들어서던 왕의 길, ''''사직로 8길''''
''''사직단''''으로 가보자. 사직단 정문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면 사직터널에서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사직로가 가로막고 있다. 그 사직로 너머에 ''''광화문 스페이스본''''을 지나 ''''서울시경찰청''''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그 길이 조선시대부터 왕이 사직단으로 가기 위해 걸어오던 길, 곧 왕의 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직단으로 들어오던 길은 사직로 때문에 끊긴 채 사직단을 사직로 너머에서 바라보고 있다. 횡단보도를 통해서라도 연결해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사직단과 차로로 끊겨 있다. 뿐만 아니라 600년의 길 흐름을 간직하고 있는 사직로 8길 역시, 평소 차량이 그리 많지 않은데도 보행보다는 차로 위주로 길이 만들어져 있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오랜 길들을 그에 맞게 보전하고 가꿔가는 데에는 인식이 부족한 탓이다. 왕의 길을 걷는 풍취를 느끼기에는 아쉬움이 크지만, 그래도 우리는 사직단과 그 뒤 ''''터미널뷰''''로서의 인왕산 전경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걸어보자. [BestNocut_R]
지금까지 역사도시 서울의 500여년 역사의 길과 골목들 가운데, 우리가 잘 알고 자주 가는 곳 몇 군데를 짚어봤다. 이밖에도 서울 사대문 안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곳곳에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길과 골목들이 즐비할 것이다. 이제는 어떤 건물이나 장소로서의 유적뿐 아니라, 역사도시의 핏줄인 길과 골목에도 주목할 때가 됐다. 그리고 그 길을 그 장소성과 역사성에 맞춰 다시 다듬어내야 한다. 이건 유럽의 도시에서만 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다. 서울 곳곳에 문득 놓여있는 건물 터 표지석뿐 아니라, 오래된 길과 알려주는 표지판도 세워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길을 찾아 숨어있던 이야기들을 발견하고, 거기서 다시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쌓아나가는 것,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가 속삭이는 길과 골목을 또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야말로, 역사도시 서울의 가치를 복원하는 진정한 길이 아니겠는가.
CBS 이진성PD (서울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twitter.com/js8530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오래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