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곁으로, 좀 전에 보았던 사내가 걸어오더니 벤치에 앉았습니다. 사내의 어눌한 표정과 태도는 소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완벽하리만치 무심한 소녀들 속에서 불구의 사내는 존재의 무게를 잃어버린 듯 했습니다. 소녀들의 거리낌 없는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삶의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저 소녀들도 여인이 되겠지요.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자기 앞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허방에 발이 빠지기도 하겠지요.
그중에서도 여자 나이 서른, 그건 철없는 소녀가 마침내 여인이 되는, 뼈가 저리도록 고독한 고통을 지불해야 하는 나이가 아닐는지요. 자기 속에 자기도 모르는 괴물 같은 욕망과 맞서 싸워야 하는 나이가 아니겠는지요. 그때 당신이 나타난 것입니다. 당신을 외면했다면, 저는 평온한 일상을 누리고 있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알 것도 같습니다. 당신과의 만남은 제게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게 아니었는지. 아무런 열정도 없이 살아가는 삶이란 사치스런 물건으로 가득 찬 고래등 같은 집을 지녔으되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삶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러니 당신은 제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한 번은 넘어야 할 고개였던 것이지요. 아버지란 고개를 넘기 위해 남편이 있었듯이 당신은 제게 남편이란 고개를 넘겨주기 위해 나타난 것은 아니었는지…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던 서른의 열정은 그러니까 제 자신을 파괴하려는 몸부림에 다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당신이 아닌 누가 있었더라도 저는 그 과정을 고스란히 밟았을 것입니다.
다시 눈 내린 밤의 풍경이 잡힐 듯 떠오릅니다. 그렇듯 삶도 한순간에 뒤집히기를 소망하던 서른의 제 모습도 보입니다. 한순간에 뒤집히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다음 날 오후 햇살에 하얗게 뒤덮여있던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던 것도 기억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사라진 후, 너저분하기 짝이 없는 제 삶이 비로소 실체를 드러내던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제가 찾고자 했던 진정한 저의 모습이란 것을 이제 알겠습니다. 눈물겹도록 부끄럽지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요. 그러고나면 그런 제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꼭꼭 닫아걸고 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파괴하지 않는 깊은 사랑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밤눈」 중에서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
그대, 지금 절망에 빠져 있나요? 자신의 삶이 산산이 부서졌다고 생각하나요? 돌이킬 수 없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그대는 비로소 진정한 삶의 환희를 맞을 준비가 된 것인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진정한 삶의 진경이 열리는 것, 이것이 바로 삶의 신비이지요.
세상만물은 움직입니다. 움직이고 변화합니다. 움직이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움직이고 변합니다. 그런데 그 운동의 방향은 어디일까요? 세상 모든 운동은 안정된 상태를 향해서 움직입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아마 그때이겠지요. 그러나 그 상태는 길지 않습니다. 고착은 곧 죽음이니까요. 삶의 아이러니지요. 그리하여 그대에게 닥친 고통 슬픔 절망은 권태와 안일에 빠진 그대의 삶을 깨우기 위한 죽비인지 모릅니다.
삶은 그 사람이 감당할 만큼의 고통을 준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곧 고통의 크기와 영혼의 깊이가 비례한다는 의미이겠지요. 이것을 깨닫는 순간, 그대는 고통의 맛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뜨겁고 짜고 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한 맛 속에 감춰진 달콤함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대는 고통조차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성아 올림
이성아
1960년 밀양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문학예술대학원을 수료했다. 1995년 『내일을 여는 작가』에 단편 「미오의 나라」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절정』 장편소설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와 어린이를 위한 책으로 『누가 뭐래도 우리 언니』 『작은 씨앗이 꾸는 꿈, 숲』 『채플린』 『까치 전쟁』, 청소년단편집 『그 순간 너는』(공저)과 평전 『아파치 최후의 추장 제로니모』 등을 펴냈다.
※원문은 책읽는 사회 문화재단 문학나눔의 행복한 문학편지 (http://letter.for-munhak.or.kr)에서 볼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