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김재만)은 설렘을 되찾고 싶다. 그것은 대화가 뜸해진 부부 관계를 깨는 것에서 시작될 터였다.
아내에게 익명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내는 남편. 그는 이 정도로 낭만파다. 그런데 아내에게 답이 없다. 대신 아내는 무엇인가 감추려는 기색을 보인다. 남편은 지금 불안하다.
아내(신소현)는 자신의 삶을 의심한다. 매일 아침을 만들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청소를 하고, 간간히 전화로 수다를 떠는 일이 전부인 일상 탓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손으로 정성들여 쓴 편지 한 통이 날아든다. 사랑고백이다. 남편이 볼까 얼른 편지를 불에 태운 아내는 생각한다. '누구일까?' 그녀는 또 편지를 기다린다.
블랙 로맨스 '낭만파 남편의 편지'는 극의 도입부에서 한 줄 문구로 '42.9㎡는 우주다!'라고 선언한다.
수백 억 원짜리 한국 영화가 만들어지는 시대에 단돈 1000만 원을 들여 42.9㎡(약 13평) 남짓한 대학로 소극장을 세트로 꾸미고 7회차 만에 촬영을 마친 까닭이리라.
극중 낭만파 남편이 아침에 출근을 하고 있다. 세트 한가운데 박아둔 기둥에는 '역곡' '테헤란로' 등의 지명이 적힌 팻말이 달렸고, 남편을 비롯한 직장인들이 기둥을 가운데 두고 다람쥐 챗바퀴 돌 듯한다.
바쁜 출근길을 설치미술로 보여 주는 듯한 이 장면처럼 영화 속 인물들이 머무는 일상의 모든 공간은 특징만 남겨진 채 극단적으로 단순화됐다. 이는 오히려 복잡하게만 보이는 세상의 본질을 여과 없이 보여 주는 최적의 장치가 된다.
실험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설가 안정효가 쓴 동명의 소설에 원작을 둔 이 영화는 문학 작품을 영화화할 때 골머리를 앓게 되는,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꾸는 작업을 과감히 생략했다.
남녀 주인공의 극중 생활 연기와는 별도로 각자의 속내를 설명하는 소설 속 문장들을 남자와 여자의 내레이션으로 들려 주는 덕이다.
"그들의 재미 없이 진행돼 왔던 부부생활이 이제는 신혼때하고도 너무나 달라져서, 더 이상 달라질 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하루 하루가 똑같아졌고, 똑같아졌다는 바로 그것이 달라진 것이라고 남편은 생각했다."
"남들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돈이 사람들의 행복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맞는 생각이라고, 아내는 언제 고장날지 모르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내레이션을 듣다 보면 마치 책 읽어 주는 사람이 옆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그만큼 안정효 특유의 심리묘사와 언어유희가 작품 전반에 오롯이 녹아든 모습이다.
이 영화는 배부른 돼지가 되기를 거부하고 배고픈 인간으로 남고 싶은,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깊은 사유의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