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근처에 위치한 자신의 작업실에서 신작 장편만화 '공작원' 작업에 한창인 만화가 김정기 씨
‘드로잉의 달인’으로 불리는 만화가 김정기(39) 씨. 스케치 없이 붓펜으로 세밀하고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솜씨에 전 세계가 매료됐다. 김 씨의 드로잉쇼 동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될 때마다 조회수가 수십만회를 넘고, 국내외 누리꾼은 “믿을 수 없다”(Incredible), “놀랍다”(Amazing)는 댓글을 쏟아낸다.
해외 초청도 줄을 잇는다. 프랑스,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일본에서 즉석 드로잉 퍼포먼스를 펼쳤고, 연말에는 미국(LA), 홍콩에 갈 예정이다. 프랑스, 브라질 등 내년 방문 일정도 벌써 잡혀 있다. 말레이시아에 갔을 때는 공항에서 100여명의 팬이 그를 마중나왔을 정도. 스케치 작품집은 세 권 합쳐 2만부 가량 팔렸는데, 구매자 대부분이 해외 독자다. 페이스북 팔로어는 6만 9천명에 이른다. 해외에서 명성이 더 높은 김 씨는 어느새 만화계의 한류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2011년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전시부스를 제공받았는데, 저는 작품을 판매하지 않고, 나흘간 8m 길이 3면벽에 그림을 그렸어요. 당시 그림 그리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면서 주목받은 거죠.”
지난 4월 28일 광화문광장에서 숭례문 복구 기념 드로잉쇼를 펼치고 있는 만화가 김정기 씨. 윤성호 기자=자료사진
올해에는 3.1절 기념ㆍ숭례문 복구기념 드로잉쇼를 진행했다. 최근 신작 ‘제3 인류’(열린책들)를 한국에서 출간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콜라보레이션 작업도 마쳤다. 그래서인지 국내에서도 길거리를 지나다보면 ‘저기 빡빡이, 김정기 아니야?’라고 속닥거리는 행인이 심심찮다.
지난달 30일 홍대 인근 작업실에서 만난 김 씨는, 연신 신기해하는 기자에게 “연필로 스케치하는 단계를 생략했을 뿐”이라며 쑥스러워했다. 그러면서 “보통 즉석 드로잉 퍼포먼스를 할 때는 큰 주제만 있고, 그리면서 하나하나의 이미지와 전체 구성을 만들어간다”고 했다.
비결은 끊임없는 노력. 김 씨는 “어릴 때부터 가리는 것 없이 많이 그렸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준비 단계도 점점 짧아졌다”고 했다. “6살 때, 일본 만화 ‘닥터슬럼프’ 그림이 그려진 스케치북 표지를 본 후 막연하게 만화가를 꿈꿨죠. 그때부터 주구장창 그렸어요.” 이후 "11군데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은 끝에" 2001년 만화 주간지 영점프에서 8개월간 연재된 '퍼니퍼니'로 데뷔했다.
그의 드로잉 작품 속 인물은 표정과 몸놀림이 정교하다. 전체 구성은 현실의 장면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놓은 듯 생동감 넘친다. 그림에 하나의 스토리를 담고 있는 것도 매력적이다.
“만화계 입문 당시 다른 작가에 비해 모작이 적었죠. 제가 그리는 소재를 이해하려 노력했고요. 인체 구조를 완전히 파악해서 인간을 그리는데 어려움이 없어지면 동물, 인공물도 쉽게 그릴 수 있거든요. 대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것도 인체와 공간을 현실감 있게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만화책과 각종 자료로 가득한 그의 작업실 곳곳에는 다양한 인체 모형이 놓여 있었다.
즉석에서 드로잉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짧게 2시간, 길게 나흘까지 걸린다. 김 씨는 “정신적으로 힘들지만” 사람들과 그림 그리는 과정을 공유하다 보면 “소통하는 느낌이 들어 좋다”고 했다. “(드로잉쇼는) 가수가 라이브 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림으로) 진검승부 하는 거죠. 행사장에서 ‘이것 좀 그려 달라’고 요청받을 때, 중간 중간 박수가 터져 나올 때 서로 통한다는 느낌을 받죠.”
평소에는 작업실에서 혼자 그리는 것에 익숙할 터. 혹시 많은 사람 앞에서 그리면 집중하는데 방해되지 않을까. “(구경하는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에너지가 솟아나요. 10분 정도 지나면 그림 그리는데 몰입하거든요. 노래를 시켰으면 떨려서 그렇게 못할 텐데(웃음)."
"생각한대로 안 그려져도 요령껏 무마시킬 정도가 됐다"는 그는 "해외에서 드로잉쇼 할 때면 그 나라 관광명소를 그려 넣는데, 현지인은 그래야 좋아한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작업실에서도 음악 틀어놓고 흥얼흥얼 대거나, 축구중계를 보면서 그리기 때문에” 시끄러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좋다고 귀띔했다.
김 씨는 내년 1월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드로잉 작품을 출품한다. 7시간의 고투 끝에 최근 완성한 이 작품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한 많은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장면 하나하나가 가슴 아프면서도 아름답다. 현재 생존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는 58명에 불과한 상황. 여성가족부는 만화로 국제사회에 위안부의 역사적 진실을 알리기로 했고, 여가부로부터 제작 의뢰를 받은 한국만화연합이 김 씨를 추천했다.
◈ "'만화=공짜' 인식 팽배… 만화가 정당한 대우 받아야"
한국의 웹툰은 지난 10년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무료라는 강점 덕분에 하루 1000만명 이상의 독자가 대형 포털사이트에서 서비스하는 웹툰을 본다. 네이버 웹툰은 고정연재물만 150편이 넘을 정도. 이에 반해 돈 내고 사는 만화 잡지는 몇 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 고사 직전이다.
김 씨는 "웹툰은 신인작가가 데뷔할 수 있는 문턱을 낮추고, 실시간으로 독자들의 반응을 접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만화=공짜'라는 사회적 인식을 심어주는데다 젊은 작가들이 손 그림을 외면하고 컴퓨터 작업에 너무 의존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이어 "현재 만화시장은 기형적이지만 모바일 시장 확대 등으로 만화계의 미래는 밝다. 다만 만화가가 정당하게 대우받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 씨는 내년초 프랑스에서 장편만화 '공작원'을 출간한다. 그림은 그가, 스토리는 프랑스 만화가 JD모반이 작업했다. 이 작품 역시 컴퓨터 작업을 거의 하지 않고, 손으로만 그렸다. "잘 만들어진 영화는 세월이 흘러도 대사와 장면이 오래도록 남잖아요. 저도 그런 아날로그 감성을 유지하고 싶어요. 혹시 알아요? 훗날 제가 '손으로 그림 그리는 거장' 반열에 오를지. 하하"
그렇다면 김 씨가 생각하는 '좋은 만화'란 무엇일까. "우선 만화는 재미있어야 되고, 독자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해야 돼요. 그리고 만화가가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면 좋은 만화가 나와요. 물론 그런 만화를 그리려면 기본기가 탄탄해야 겠죠."
인터뷰 중에도 그는 손에서 파란색 색연필을 놓지 않았다. "쓱싹쓱싹" 소리가 난다 싶어 그의 앞에 있던 종이로 시선을 옮겼더니 어느 틈에 그림 하나가 완성됐다. 역시 '드로잉의 달인'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