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영웅은 너다' 심석희가 18일(한국 시각) 소치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계주 3000m 결승에서 마지막 주자로 나와 짜릿한 역전 우승으로 금메달을 결정지은 뒤 승리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소치=대한체육회)
이게 정말 어떻게 된 우연일까요?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 심석희(17, 세화여고)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2013년 2월 18일 오후 태릉선수촌에서 맹훈련 중이던 심석희를 만나 아직 고교 입학 전, 갓 졸업한 중학생의 자못 원대한 포부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심석희는 "최종 목표는 올림픽 금메달, 출전 자체도 정말 하고 싶지만 어릴 때부터 꿈이던 올림픽 금메달을 꼭 따고 싶다"고 다부진 각오를 밝혔습니다. 당시에는 약간 긴가민가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아직 여중생으로 성인무대에 데뷔해 그 시즌 쇼트트랙 월드컵 시리즈 6연속 우승을 했지만 아직 어려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다소 어눌했던 말솜씨에 수줍고 아직 덜 익은 미소. 174cm 껑충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까지. 찰나의 몸싸움이 순간순간 치열하게 벌어지는 쇼트트랙 격전지에서 버틸 수 있을까 속으로 갸웃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본인도 "키가 커서 그런지 순발력이나 빠릿빠릿한 게 부족하고 발도 좀 느려요"라고 느릿한 말투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중학교 졸업생은 꼭 1년 만에 자신의 말을 지켰습니다. 18일(한국 시각) 꿈에 그리던 소치올림픽 무대 여자 계주 3000m에서 조해리(28, 고양시청), 박승희(22, 화성시청), 김아랑(19, 전주제일고) 등 언니들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지난 15일 주종목이던 1500m에서 값졌지만 2% 아쉬웠던 은메달을 뛰어넘어 기어이 금빛 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어릴 때부터의 꿈이 현실이 된 겁니다.
심석희는 또 1년 만에 올림픽 금메달보다 어쩌면 더욱 큰 포부를 이뤄냈습니다. 당시 인터뷰 말미에 의미심장하게 던졌던 평생의 바람입니다. 심석희는 그때 "스타보다 영웅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반짝 하고 사라지는 별이 아니라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쇼트트랙 하면 딱 떠오르는 영웅 말입니다.
거짓말처럼 심석희의 소망은 꼭 1년 만에 이뤄졌습니다. 한국 쇼트트랙에서 '난세의 영웅'이 힘차게 탄생한 겁니다.
'영웅의 하이파이브' 심석희가 18일(한국 시각) 소치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 마지막 주자로 나서 금메달을 확정지은 뒤 최광복 감독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소치=대한체육회)
심석희가 이끈 여자 계주 금메달 전까지 한국 쇼트트랙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였습니다.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러시아 이름 빅토르 안)가 남자 1500m 동메달에 이어 1000m에서 8년 만의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는 맹활약을 펼치면서 우리 빙상계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왜 안현수가 우리나라를 등지고 러시아로 가야 했는지, 그 과정에 부조리는 없었는지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졌습니다. 여기에 대표팀도 잇딴 불운으로 예상했던 성적이 나오지 못하면서 질타는 더욱 거세졌습니다. 대통령까지 나서면서 빙상연맹에 대한 감사원이 감사에 착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 계주가 금메달을 따내면서 압사 직전이던 한국 쇼트트랙의 숨통을 트이게 한 겁니다. 일등공신은 단연 심석희. 막판 질풍노도의 레이스로 역전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영웅의 탄생도 드라마틱했습니다. 사실 지난 15일 1500m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힌 심석희는 그러나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중국 저우양의 노련한 침투에 밀려 금메달을 놓쳤습니다. 이날 여자 계주 결승에서도 선두 다툼을 벌이던 우리 대표팀이 세 바퀴를 남기고 역전을 허용해 패색이 짙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주자로 나선 심석희가 빛의 속도를 냈습니다. 마지막 한 바퀴부터 폭발적인 스퍼트로 중국의 리젠러우를 따라잡더니 반 바퀴를 남기고 기어이 제치면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거짓말 같은 대역전극. 물론 중국의 실격으로 자동 우승이 되는 것이었지만 그것과 관계 없이 실력으로 숙적을 통쾌하게 누르는 이 장면은 반짝하고 사라질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겁니다.
'영웅의 탄생' 심석희(139번)가 18일(한국 시각) 소치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 마지막 반 바퀴를 남기고 중국 리젠러우(111번)를 제치고 1위에 오르자 박승희(138번), 조해리(135번) 등 동료들이 손을 번쩍 치켜들고 있다.(소치=대한체육회)
실제 경기장에서 그 장면을 보면서 짜릿한 전율이 등뼈를 타고 흐르는 순간 머릿속에 번개처럼 꼭 1년 전 심석희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 겁니다. "스타보다는 영웅이 되고 싶어요." 어눌하고 느렸던 자신의 말을 심석희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1년 만에 현실로 만든 겁니다.
이제 심석희는 또 하나의 도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날 계주에 앞서 예선을 통과한 1000m 경기. 심석희는 박승희, 김아랑과 함께 21일 준준결승부터 치러 개인전 첫 금메달 사냥에 나섭니다.
난세의 영웅 탄생 신화를 화려하게 마무리하려는 심석희. 16살 꺽다리 여중생 쇼트트랙 유망주를 인터뷰한 지 꼭 1년이 지난 지금, 이번에는 제가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석희야, 넌 이미 영웅이야."
p.s-당시 심석희의 인터뷰 기사는 "16살 '키다리 쇼트 여제' 심석희가 꿈꾸는 '역설의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2013년 2월 25일자 인터넷 CBS노컷뉴스와 무료 일간지 데일리 노컷뉴스에 실렸습니다. 주 1회 와이드 인터뷰 지면 날짜에 맞춰 일주일 전 미리 인터뷰한 뒤 기사 작성과 퇴고, 편집 과정을 거쳐 게재됐음을 알려드립니다. 당시 CBS 노컷뉴스 기사를 보면 심석희의 풋풋한 인터뷰 영상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