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직접 담근 김치를?' 소치올림픽 기간 한국 취재진은 미디어 숙소 직원의 실수로 3주 양식인 김치를 잃는 황당한 사건도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김치를 직접 담가 주겠다던 숙소 직원의 말은 한낱 우스갯소리로 끝나고 말았다.(자료사진=CBS노컷뉴스)
러시아 소치 동계올림픽이 막을 내린 지 꼭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이제 선수들도, 임원들도, 취재진도 시차는 물론 일상 생활에도 모두 적응했을 겁니다. 저 역시 주말을 푹 쉬면서 본업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밤 사이 노트북을 찬찬히 보니 올림픽 기간 미처 풀어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꽤 있더군요. 민감한 사안이라 거의 다 쓰고도 쉽게 출고하지 못했던 기사, 우리 선수단의 성적과 맞물려 보관해야만 했던 사연, 기사 작성과 방송 리포트 제작에 뒷전으로 밀렸던 에피소드들입니다.
그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올림픽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더 늦다가는 안 되겠기에 용기를 내봅니다. 독자들은 이런 얘기를 더 궁금하게 여긴다는 아내 등 주변 사람들의 말에 힘을 얻었습니다. '임종률의 소치 레터 후기' 첫 번째인 만큼 가볍게 취재 후기로 시작합니다.
▲"현지 사정 열악…김치, 라면 필수!"4일 소치 출국을 앞두기 며칠 전부터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테러 소식도 있던 데다 지난 1일 먼저 떠났던 다른 취재진으로부터 현지 사정이 열악하기 짝이 없다는 전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찬물만 나오는 숙소는 물론 특히 민감한 먹거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모 기자가 트위터에 올린 기본 2만 원짜리 소치올림픽 메인프레스센터(MPC)의 밥상은 더욱 사기를 저하시켰습니다.
여기에 '실탄'을 장전해 오라는 선발대의 특명까지 떨어졌습니다. 다름 아닌 해외 장기 출장의 필수 아이템 소주였습니다. 현지에서는 한 병에 2~3만 원을 호가하는 귀한 몸인지라 특별히 후발대에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김치와 밥, 라면, 고추장에 소주까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소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적정 화물 무게를 넘어 적잖게 초과 요금이 나왔지만 현지에서 겪을 먹거리 고생을 생각하면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무려 2만 원짜리 밥' 소치올림픽 메인프레스센터 푸드 코트에서 먹었던 단출한 식단. 그러나 가격은 무려 2만 원이 넘어 취재진은 분통을 터뜨리기 일쑤였다.(소치=임종률 기자)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해 5일 새벽 소치에 도착해 숙소에서 여장을 푸니 상황은 예상보다 심각했습니다. 욕실에서는 찬물이 아닌 델 정도의 뜨거운 물뿐이었고, TV와 냉장고는 작동하지 않았습니다.(CBS노컷뉴스 2월 7일자 [임종률의 소치 레터]'변기물이 펄펄' 54조 원, 대체 어디로 갔나요? 참조)
다른 것보다 고된 해외 출장의 필수 양식인 김치가 걱정이었습니다. 냉장고에 보관할 요량으로 넉넉히 준비해왔지만 영락없이 쉬어터질 게 뻔했습니다. 숙소 프런트에 항의해 두 번이나 기술자라는 사람들이 왔지만 시간이 지나면 냉장고가 차가워질 것이라는 말뿐었습니다. 결국 김치를 창문을 열어놓은 옆방에 보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대판 '서빙고'가 따로 없었죠.
취재 복귀 후 늦은 저녁을 근근히 라면과 김치로 때워가던 즈음. 드디어 11일 밤(현지 시각) 한국 취재진의 첫 회합이 있었습니다. '빙속 여제' 이상화의 첫 금메달 소식이 있던 바로 그 밤입니다. 앞선 선수들의 잇딴 메달 무산으로 침체됐던 취재진도 기쁨과 후련한 마음에 한 잔 생각이 간절했던 겁니다.
제가 다른 언론사 후배와 묵고 있던 방이 실탄과 김치, 라면 등이 준비돼 있던 터라 회식 장소가 됐습니다. 이상화의 금메달이 준 여운을 즐기고 출장이 일주일을 넘기면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푸는 등 밤 늦게까지 자리가 이어졌습니다.
▲청소 직원 과도한 친절…프런트, 부족한 대처다음 날 아침 방을 어느 정도 치우고 문을 나서기 전, 마음에 걸려 청소하는 직원을 생각해 후배와 함께 평소보다 팁을 두 배 정도 놓았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니 방은 거짓말처럼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동안 이부자리와 수건 정도만 정리됐던 방은 옷가지와 책, 보도자료까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서빙고에 있던 김치까지 싹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대회 폐막 때까지 약 2주를 더 버텨줘야 할 소중한 양식이 사라지고 만 겁니다. 더욱이 모 선배의 배려로 포기 김치까지 얻어 출국할 때까지 문제가 없겠다며 든든해 했던 저희들로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비보였습니다.
'설마 웃는 얼굴에 침 뱉겠어요?' 소치올림픽 미디어 숙소 청소 직원들의 실수에 대해 미안해 하면서도 조치는 취해주지 않았던 직원들. 오른쪽이 직접 김치를 담가 주겠다고 말한 카테리나.(소치=임종률 기자)
분기탱천한 저는 새벽 3시의 시각임에도 숙소 프런트로 가서 따졌습니다. 일단 프런트 직원들은 "절대 하우스 키퍼들이 김치를 훔쳐갈 리 없다"며 부인하면서도 "김치를 쓰레기로 오인하고 버렸을 수는 있다"며 미안해 하더군요.
그때였습니다. 어이를 상실한 제게 180cm는 족히 돼 보이는 금발의 미녀가 다가왔습니다. 생글생글 미소를 머금더니 "리시트를 보여달라"고 하더군요. '변상을 해주겠다는 뜻인가 보다' 생각한 저는 한국에서 끊었던 영수증(receipt)을 들이밀었습니다. 그랬더니 입이 찢어져라 웃더니 "레서피(recipe, 조리법)를 보여달라"고 하는 겁니다.(맹세코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닙니다. 이 여성의 발음은 정말 알아듣기 어려웠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마트폰으로 김치를 보여주며 열심히 설명을 했습니다. 배추에 고춧가루, 소금, 새우젓(salted shrimps) 등을 넣어야 한다고 했죠. 그랬더니 고춧가루와 새우젓이 없다며 러시아식 김치(Russian Cabbage)를 만들어서 가져다 주겠다고 하더군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우스갯소리에 김칫독에 국물만큼이나마 남아 있던 어이를 완전히 잃어 더는 얘기하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후 국가대표 용품 공급업체 휠라코리아의 도움으로 김치를 다시 공수해오긴 했습니다. 휠라는 소치 현지에 '휠라 하우스'를 마련해 입맛을 잃은 우리 선수단과 체육회 관계자, 취재진에게 식사는 물론 김치와 라면 등을 공급해줬습니다.(다시금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표합니다.)
두 번 아픔을 겪을 수 없던 저희는 '절대 버리지 마시오'라는 문구를 서빙고에 붙여 놨습니다. 청소 직원들과는 영어가 통하지 않기에 러시아어로 특별히 제작한 문구였고, 덕분에 목숨과도 같은 김치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푹한 날씨에 서빙고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얼마 안 가 그마저도 먹을 수 없게 되긴 했습니다.)
▲화려한 겉모습 속 내실 부족했던 소치올림픽
'이것만큼은 절대 사수!' 목숨보다 소중한 김치를 지키기 위한 한국 취재진의 눈물겨운 '김치 사수 작전'의 현장. 소치올림픽 미디어 숙소 청소 직원들을 위해 러시아어로 써놓은 "절대 버리지 마시오" 문구다.(소치=임종률 기자)
이 일련의 사건들은 어떻게 보면 사실 굉장히 사소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해프닝을 이렇게 길게 쓸 필요가 있나 허무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원인을 곰곰히 따져 보면 결코 작은 일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더 큽니다. 정말 러시아가 올림픽 준비를 잘 했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형편 없는 음식에도 소치 시내와 두 배 정도 차이가 나는 올림픽 파크 내의 바가지 요금(저울에 재면서 주던 눈꼽만큼의 쌀국수를 잊을 수 없네요.), 냉장고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취재진의 공식 숙소. 여기에 자신들의 실수를 어물쩍 넘어가려는 직원들의 태도.
이번 대회는 개막도 하기 전부터 각종 문제점들에 대한 지적이 일었습니다. 숙소의 쌍둥이 변기, 녹물 수돗물 등은 이미 해외 토픽이 됐습니다. 개막식의 '사륜기' 사건과 피겨 여자 싱글 등 석연찮은 판정도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습니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대회에 큰 문제가 없었다며 큰 소리를 쳤습니다. 20년 만의 종합 우승을 자축하며 옛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알리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의욕만 빛난 '러시아의 동네 체육대회'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김치를 직접 담가 주겠다던 러시아 미녀의 미소, 그 친절함을 떠나 어쩌면 화려하게 치장된 소치올림픽의 겉모습 속에 숨겨진 러시아의 뻔뻔함을 상징하는 장면은 아닐까요? 4년 뒤 강원도 평창이 배워야 할 점이 굉장히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p.s-그렇다고 러시아 관계자들이 모두 그랬다는 것은 아닙니다. 소치 공항에 입국했을 때 환하게 맞아주던, 또 경기장에서 인터뷰 통역을 해주던, 취재 교통편을 친절하게 안내해주던 자원봉사자들의 미소도 떠오릅니다. 다만 러시아식 김치를 먹어보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군요.